· 1. 춘래불사춘 지난 주말, 모처럼 바깥나들이 했다. 쥐똥나무꽃이 예쁘게 피어 발갛게 져버린 벚꽃의 아쉬움을 덜어주었고, 연둣빛 신록이 어지간한 꽃무리보다 나았다. 하지만 바람이 어찌나 부는지 더러 걷기도 힘들 지경이었고, 기온마저 뚝 떨어져서 제법 추웠다. 옷을 입었다 벗기를 반복해야 했다. 동행이 죄다 춘래불사춘이라 한탄하니, 왕소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조용히 힘을 기르자던 덩샤오핑의 도광양회가 시진핑의 주동작위, 일대일로로 바뀌면서 힘을 뽐내고 있다만, 고래로 중국 한족은 외래 민족과 전쟁만 하면 졌다. 오죽하면 북쪽 사람에게 졌다(敗北)는 말이 관용어로 굳어졌을까. 한나라 원제 시절, 강성한 흉노족과 화친을 맺고자 후궁 중 한 명을 골라 시집을 보내는데, 이때 뽑힌 사람이 왕소군이다. 북방으로 끌려가야 하는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비파를 연주했는데, 날아가던 기러기가 왕소군의 미모에 홀려 날갯짓하는 것을 잃어버려 그만 땅에 떨어졌다는 경국지색이다. 후일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그녀를 기려 지은 시에 ‘춘래불사춘’이란 말이 나온다. 나라를 지킬 변변한 장수 한 명이 없어, 가녀린 여인을 공물 삼아 화친을 맺어야 하는 한나라의 처지가 말이 아니다. 하긴
동물적 생활을 보내는 사람에게 육체적 욕망의 만족이 행복인 것처럼, 자신의 영성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기 부정은 바로 행복이다. 남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은 선인이다. 만약 그가 선을 행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다면 그는 더욱 더 선인이다. 나아가서 그가 선을 행한 상대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면 그는 최고의 선에 도달한 것이며, 그 선을 더욱 강화할 수 잇는 것은 오직 그가 그것을 계속함으로써 받는 고뇌의 증대뿐이다. 또 만약 그가 그것 때문에 죽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최고의 완성에 도달한 것이 된다. (라 브뤼에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예수) 아집은 영혼의 감옥이다. 감옥이 우리의 육체의 자유를 빼앗는 것처럼 아집은 반드시 우리의 행복을 빼앗는다. (류시 말로리) 남을 위해 사는 것이 비로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얼핏 이상하게…
기본소득 논의는 일찍이 미국에서 시작됐다. 1960년대 자유주의 예찬자인 통화주의자들에 의해서였다.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은 1962년 빈곤 퇴치를 위한 수단으로 기본소득의 일종인 ‘마이너스 소득세(negative income tax, NIT)’를 창설하자고 제안했다. 닉슨 대통령(Richard Nixon)은 이에 영향을 받아 자녀가 있는 가정에 연간수당을 보장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상원에서 기각됐다. 진보적 입장에서 기본소득을 주장한 인물은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였다. 그는 1967년 가난을 물리칠 최선의 수단으로 기본소득을 들었다. 그러나 1980년 공화당의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이 탄생되면서 기본소득 논의는 폐기됐다. 레이건은 기본소득이 노동 가치와 양립불가능하고 불건전한 의존문화를 부추길 것으로 보았다. 그러던 기본소득이 최근 재점화되고 있다. 지난 미국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 앤드류 양(Andrew Yang)은 기본소득을 지지했다. 그는 미국의 모든 시민에게 자유 배당금으로 매월 1000달러를 주자고 주장했다. 이 장치야 말로 경제와 고용창출을 위한 영구적 지원이라는 것이다.…
종편 방송을 중심으로 불붙은 ‘트로트’ 신드롬이 실로 대단한 광풍이군요. TV조선이 시작한 트로트 경연 열풍에 거의 모든 방송사가 영향을 받고 있는 형국입니다. 발라드·재즈·록 등은 물론 아이돌 출신들까지 오디션 프로그램에 앞다투어 몰려드는 풍경이 일상이 됐네요. 배우들이 트로트 가수를 꿈꾸는 일도 귀한 일이 아닙니다. 트로트 경연에 나온 유명 발라드 가수가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가슴을 짠하게 만들더군요.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 장르를 바꾸는 일이 쉽지 않을 텐데, 어쨌든 도전하는 모습은 참 대단합니다. 평생을 걸고 해온 음악을 버리고 트로트에 뛰어드는 행태에 대한 일부의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음악은 장르마다 특징이 있고, 독특한 매력도 따로 있긴 하지요. 그 가치를 지키는 일도 소중하지만, 다양한 도전을 끝내 비난할 이유가 따로 있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논란은 또 있어요.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정서를 담은 성인가요들을 부르는 모습이 불편하다는 시각입니다. 얼핏 들으면 일리가 있어요. 그러나 이미 열린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트로트를 금지곡으로 막아놓고 동요만 부르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지 않을까 싶네요. 사랑의 기쁨, 이별
우리는 1년여 간 코로나 판데믹을 겪으면서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경험하고 있다. 4차 유행을 우려하고 있지만, 백신 접종의 확대 추세를 감안하면 머지않아 코로나는 종식될 것이다. 코로나가 준 교훈 중의 하나는 코로나와 같은 돌출적 위기(surprise)가 언제든 터질 수 있다는 것이고, 그 파장 또한 기존의 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고민해야 할 것은 현재의 코로나 국면 수습도 중요하지만, 코로나 이후의 국제정세를 미리 상상해보고 대비하는 일이다. 인간이 미래를 예측하는 시간적 한계가 5년이라는 통설이 있고, 전문가의 예측조차 틀리는 경우기 비일비재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길이라도 예측하는 노력은 개인의 삶이나 국가의 미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열어줄 것이다. 적어도 ‘예고된 위기’는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 예고된 위기이자 기회는 ▲코로나보다 더 지독한 감염병의 출현, ▲혁명의 씨앗 배태, ▲세계화의 급속한 변화, ▲국가행동주의 시대의 도래, ▲소규모 모임으로 갈라지는 세계, ▲지킬하이드 세상 등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먼저, 기후변화로 인해 코로나보다 감염력과 치사율이 높은 바이러스가 출현할 것이란 전망은 상식이 되었
‘월드뮤직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오래 강의해왔지만 내 강의의 대부분은 음악과 음악인 이야기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역사 강의로 샐 때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쿠바의 관타나메라’ 를 소개할 때다. 중,노년층의 관심이 늘 뜨겁다. 그들은 70년대 3인조 그룹 세샘 트리오(‘나성에 가면’을 히트 시킨)의 목소리로, 청춘시절에는 미국 조앤 바이즈, 호세 펠리치아노의 노래로 만났던 관타나메라를 추억 속에서 호출한다. 흑백 사진첩 넘기듯 아련한 눈빛이 된다. 노래 속 여인의 고향, 황백색 꽃 피는 종려나무 무성한 지구 반대편 섬 관타나모의 풍광을 전하면 ‘죽기 전에 언제 한 번 가보나’ 하는 동경의 눈들로 빛난다. 그러다 노랫말의 주인공, 쿠바 혁명가 호세 마르티 이야기를 하면 노래 이미지 반전에 충격 받는다.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와 미군 주둔 관타나모 기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알카에다 포로 수용소, 혹독한 고문 등의 뉴스를 떠올린다. 지금은 수교국이지만 60여년간 적국이었던 미국 포로수용소가 왜 쿠바 땅 관타나모에 있는지부터 질문이 쏟아진다. 관타나모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500년 전으로 돌려야 한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곳
지난 2018년 9월 19일, 평양 5.1경기장에서 우리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시민 15만명 앞에서 행한 그 연설을 지켜보면서, 이제 남북의 실질적 평화시대, 나아가 남북연합의 시대가 곧 올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 조였던 기억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분단 70여년의 역사가운데 그 날처럼 한반도 평화의 꿈을 그렇게 구체적으로 실감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북한이 문재인정권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해 김정은위원장 신년사와 평창 동계올림픽 참여, 이 후 특사파견에 따른 북미정상 만남의 주선과 4·27 판문점 남북정상의 만남에 이은 6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의 실현, 결과물인 합의문에서 북이 그간 그렇게도 바라왔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새로운 북미관계수립이라는 성과를 얻게 되면서 우리 문재인정부의 중재능력과 대미 영향력에 대하여 새로운 평가를 내린 결과가 평양 5.1경기장에서의 문대통령 연설이었다고 필자는 굳게 믿는다. 1년 남은 이 정부가 ‘꽃피는 봄날’을 다시 보고 싶다면 현 상황에 대한 바른 인식과 대안책을 강구해야 할 절박한 시점이다. 지난 달 북한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와 이후 최선희 외무성제1부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질이다.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장 필요한 것은 모르고 있는 사람이 있다. 모른다는 것은 그리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니다. 아무도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이고 잘못된 일이다. 지식인들의 논리 정연해 보이는 말들은, 때때로 어떻게도 받아들일 수 있는 애매한 의미를 언어에 부여함으로써,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회피하려고 한다. 이유는 ’모른다‘고 하는 매우 솔직담백한 말이 학문의 세계에서는 그리 환영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 인간의 무지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태어나면서부터의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무지이고 다른 하나는 진정한 현자만이 도달하는 깨달음의 무지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것저것 거죽만 핥은 얄팍한 지식을 갖고 대단한 학자인 양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데 바닥 민중은 그들의 허황됨을 알고 경멸한다. 그러면 그들은 민중을 무지몽매한 무리라고 경멸한다. (파스칼) 가장 나쁜 것은 깊이 고찰된 사상에만 어울리는 특별한 언어를 사용해, 함부로 자신의 사상을 얘기하려는 사람들이다. 만일 그들이 쉬운…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1936~2011) 대통령이 유명했던 것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청바지를 입고 뒷 주머니에 시집을 꽂은 채 주말이면 공연을 보러 갔다는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건 상당 부분 하벨이 대통령이 된 후에 윤색된 얘기이거나 그의 전기 영화에 쓸 요량으로 첨삭된 각본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뭐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하벨처럼 시인이나 극작가는 정치를 해서 비교적 직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는 있어도 그 역(逆)은 그리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정치라는 영역에 인문학적 상상력을 끌어 들일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많은 것이 달려 있음을 보여 준다는 얘기다. 수많은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한 것은 인문학과 예술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그랬다. 예술이 사라진 사회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인민에 봉사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갖고 있다 한들 선전(宣傳), 선동(煽動)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벨이 체코의 벨벳혁명 과정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늘 미완의 혁명이며 때문에 영구적으로 혁명을 수행해 나가야
“우리 때는 공장에 가는 학생의 수가 많은 대학 순서대로 명문대였는데, 지금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국가시험도 거부하며 반발하는 이기주의자가 많은 순서대로 명문대다.”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흔드는 8090년대의 청년들은 이 시대의 20대 청년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1980년까지 대학생들 대부분은 대학교 배지를 달고 다녔다. 다른 건 몰라도 80년대의 대학생들이 제 옷깃에 달았던 대학 배지를 스스로 뗀 일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일이었다. 80년대의 대학생들은 80년 5월, 광주가 짓밟히는 것을 외면하고 침묵했던 자신들이 정의와 진리를 표상하는 대학의 배지를 달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80년대 청년들의 힘은 반성을 실천으로 옮긴 결단과 행동력이었다. 모든 언론이 광주민중항쟁을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도들의 만행으로 도배질을 하고 있을 때,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싸우다 제적당하고, 감옥으로 간 것이 80년대 청년 학생들이다. 고작 ‘가리방’으로 등사한 유인물 몇 장 뿌리고 개처럼 두드려 맞으며 끌려간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검사와 판사들이 구형하고 선고한 형량을 합하면 몇 만 년이 될지 모른다. 그렇게 감옥으로 간 숫자보다 더 많은 대학생이 졸업장을 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