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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게르니카’의 역설

 

나치가 에스파냐의 게르니카에 가한 폭격을 다룬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그 끔찍한 잔영이 대중 속에 깊이 파고들어 가서, 그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그칠 줄을 모른다. 현대사의 비극이 찾아올 때마다 사람들은 이 작품을 깃발 삼아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상기시켜 주곤 한다. 역사상 이만큼 정치적인 작품은 없었다.

‘게르니카’는 정치와 예술의 한 극단적인 관계를 예로 보여주고 있다. ‘게르니카’는 군대도, 언론도 하지 못한 것을 예술이 해낼 수도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렸다. 게르니카에서는 1만5천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되었고, 에스파냐는 나치와 협력한 프랑코 군에 의해 결국 함락되었지만 이후 ‘게르니카’는 유럽과 미국을 순회하며 프랑코 군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 우리 사회에서도 세월호를 추모하며, 5·18을 추모하며 이 작품을 꺼내 들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 굳은 생각을 지니고 있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내면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이처럼 영원불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피카소 역시 이 작품을 그렸을 때,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 작품으로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켜야겠다는 결의에 차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피카소라는 영리한 작가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하기 위해 영감을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허기진 짐승처럼 삼켜버리곤 했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작가를 말이다. 사이먼 샤마의 ‘파워 오브 아트’ 피카소 챕터는 그즈음 그의 정치적 태도가 어떻게 바뀌어 나갔는지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게르니카를 향한 뜨뜻미지근했던 반응이 드디어 미국에서 열렬한 지지로 바뀌기 시작할 즈음, 그는 정치에 도취되어 있었으며 조국 에스파냐를 수호하는 열렬한 애국지사가 되어 있었다. 정치적인 소신을 밝히는데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고 프라도 미술관의 관장직도 수락했다. 고야와 벨라스케스의 작품이 전쟁으로부터 상하지 않도록 피신시키는 일은 고국을 지키는 일처럼 보였다.

허나 피카소의 그러한 열정은 곧 식어버렸다. 얼마 후 모임과 파티, 샤넬이 디자인했다던 스트라이프 티셔츠와 새로운 여성과의 관계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피카소는, 예술과 정치는 별개라고 말하던 예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쟁의 참상과 인간의 비극을 다룬 작품은 몇 개 더 발표되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사실 그림의 주제에 관해서라면 머무르는 법이 없었던 그였기에,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글에서 피카소라는 인물을 폄하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다. 단지 피카소라는 인물이 역사에 길이 남은 ‘게르니카’라는 대작을 완성할 수 있었던 그 극소한 확률의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예술이란 대중에게 이런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라면, 피카소가 어떻게 해서 그러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는지 그 심심하고 시시한 과정에 대해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필자는 피카소가 역사에 길이 남긴 ‘게르니카’에 감동받고 있는 일인이다. 고통에 일그러진 눈빛보다 더욱 끔찍한 눈빛은 공허한 눈빛이다. 놀라움으로 경직된 사지는 제각기 쭉쭉 뻗었고, 입은 벌어졌으며 혀는 솟아버렸다. 빛의 칼날이, 비좁고 어두컴컴한 실내를 사정없이 가로지르고 있다. 게르니카의 폭격은 실제로는 한낮에 도시 전체에 일어난 일이지만, 작가적 상상력은 이를 작고 비좁은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치환시켰다.

큐비즘은 단지 몇몇 화가들이나 즐길 줄 아는 시시껄렁한 유희나, 혹은 대중들은 가닿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만 머무를 뻔 했다. 하지만 비로소 대중들은 그러한 표현이 왜 필요한지를 확실히 인지하게 된다. 피카소가 입체주의에 수십 년에 매달려온 이후였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과 뒤엉켜 있는 소와 말은, 그의 고국 에스파냐를 의미하기도 했고,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투우장에 자주 가곤했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오랜 내공이 쌓여 그즈음 피카소는 에너지를 폭발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고, 마침내 그 일은 일어났다. ‘게르니카’는 피카소가 평생에 걸쳐 남긴 수만 점의 작품 중 단 하나에 불과했고 ‘게르니카’가 이룬 성공 역시 수만 분의 일의 확률로 일어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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