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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그대 정태진을 아는가

- 경기도의 일제 잔재 청산사업에 거는 기대

 

1920년대에 미국 유학생은 아주 특별했다. 경기도 파주 출신의 정태진은 그 특별한 유학생 중에서도 특별히 똑똑했고, 특별히 가난했다.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우스터대학을 수석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정태진은 친일파들이 득실거리는 경성에 뒤로하고 유학 전 재직했던 함흥의 영생여고보(현 수원 영생고)로 돌아갔다. 


조선어와 영어과목을 맡은 그는 수업을 마치면 우리말 채록(말모이)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학생들은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그때 정태진에게 배웠던 소설가 임옥인은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고 우리말 교육이 맥을 못추던 때 우리는 선생님을 통해 모국어의 아름다움과 국문학의 정수를 접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1938년, 일제가 조선어교육과 사용을 전면금지하면서 정태진의 담당 교과는 조선어와 영어가 아닌 ‘대수’와 ‘수신’으로 바뀌었다. 학교를 그만둔 정태진은 조선어학회의 <조선말 큰사전>편찬 작업에 뛰어들었다. ‘일본이 지도상에서 조선을 지워버린다고 해도 조선어가 남아 있는 한 조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조선말 사전이 있는 한 조선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사무실에서 먹고 자며 일을 했다. 


그런 정태진과 조선어학회를 일제는 가만히 두지 않았다. 과거에 정태진으로부터 배운 여학생의 일기장을 털어 정태진이 금지된 한글과 민족정신을 가르쳤다는 정황을 포착한 일제 경찰은 정태진을 필두로 조선어학회 간부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가혹하게 고문해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을 만들었다. 1년 넘게 취조, 고문하며 친일을 강요했지만 아무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들의 투쟁은 항일무장 투쟁의 최정점인 ‘봉오동-청산리 전투’에 비견할 수 있는 ‘항일문화 투쟁’의 최정점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윤재, 한징선생이 옥사하고, 가장 먼저 잡혀들어가 가장 오래, 가장 가혹하게 고문을 당했던 정태진은 해방된 1945년에야 함흥형무소 문을 나섰다. 미군이 진주하고,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영어 몇 마디만 해도 행세를 하는 시대에 친일의 티끌 하나 묻히지 않은 미국 우스터대학의 수석졸업생으로 4개국어에 능숙한 정태진의 앞길은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그는 미군정청 장관도, 국회의원도 다 마다하고 만들다 만 우리말 큰사전을 끝내는 일에 매달렸다. 한글을 망가뜨리려는 이승만에 맞서며 전쟁의 포성 속에서 편찬한 사전을 조판 인쇄하다가 최후를 마쳤다. 


작은 공적도 큰 공적으로 꾸며대고, 심지어는 친일매국노들의 덮을 수 없는 죄악마저 가소로운 업적으로 가리며 기념까지 하는 시대에 단 한 번도 자신을 앞세우지 않았던 참 지식인, 진정한 애국자 정태진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자신을 앞세워 스스로 이름을 높인 자들은 앞다퉈 기념하면서 나라의 말과 글을 지키는 일에 생애를 고스란히 바친 정태진을 기념하는 추모행사를 여는 단체, 기관 하나 없다.


올해 경기도가 기획한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공모’사업이 눈물겹게 고맙고 반갑다. 해방 75주년이다. 친일, 이제는 청산할 때도 되었다. 국민의 이름으로 기리고 기념할 것을 기념하는 나라다운 나라로 가는 길을 경기도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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