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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수의 관규추지(管窺錐指)] 불우를 견디는 법

 

 

지난 3·9 대선에서 이재명은 윤석열에게 졌고, 그 뒤로 예수가 광야에서 헤맨 날짜만큼 시간이 흘렀지만, 충격은 가실 줄 모른다. 숱하게 많은 사람이 패닉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필자도 대선 끝난 뒤로 땅만 쳐다보며 걷는 중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는, 앞으로 닥쳐올 불우한 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지금, 자기 책을 불사르라던 명나라 이탁오를 떠올린다.

 

명나라 말 복건성 천주부에서 태어난 탁오 이지가 쓴 책 중에서 가장 유명한 책은 분서(焚書)다. 이 책에서 그는 유불선의 가르침은 똑같으며, 공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판단에 따라 경전을 해석하고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자학자가 보기에 이런 사문난적이 없겠다. 결국 감옥에 갇혔고, 나이 76세에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한다. 그가 자기 책을 분서라 이름한 이유는 지금 같은 세상에서 내 생각이 받아들여질 리 없으니 태워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찌 분서 한 권뿐이랴. 그의 가슴에 가득 찬 생각이 모두 개인의 행복과 남녀평등 같은 시대를 뛰어넘는 것들이었다. 분서를 쓰지 않았어도 필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시골 한의사에 불과한 자에게 무슨 대단한 식견이 있으랴만, 이번 대선 패배는 사로가 아니라 활로이며, 기제괘가 아니라 미제괘로 나가는 유일한 한 수가 아닌가 싶다. 필자를 포함한 삼팔육 세대는 과거 무도한 군사정권과 맞서 싸웠다는 것 하나로 사십 년 내내 자기 자신을 정당화했다. 그러니 우리가 정권을 갖는 게 옳고 당연하며,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당연한 권리이고, 조국 가족의 아빠 찬스는 그저 있을 수도 있는 해프닝으로 치부했다. 그런 엉터리 자기 확신을 도그마라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 부르랴. 자기가 옳은가 의심하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무너지기 마련이고, 그런 권력을 심판하라고 선거란 제도가 있다. 우리가 진 것은 우리가 틀렸기 때문이다.

 

윤석열이 이재명보다 훌륭해서 진 게 아니다. 저들이 우리보다 더 나아서 진 것도 아니다. 딱한 일이지만, 국민의 힘에 어떤 정의와 공정과 유능함이 있겠는가. 장관 후보 몇몇만 봐도 금세 알 수 있는 수준 아닌가. 저런 낯부끄러운 자들에게 졌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못하면, 이번 선거에서 우리가 배운 게 없는 것이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정권이 아니다. 정권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방편일 뿐이다. 더 나은 세상이란 뭔가를 끊임없이 묻고, 공동체 내의 다수 의견을 수렴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정권을 다시 찾은들 무엇할 것인가.

 

이탁오는 주자학 일통으로 전제화된 세상을 향해 외쳤다. 올바른 인간의 길이 어찌 공자 가르침뿐이겠느냐. 그는 잊혔던 묵가를 다시 높였고, 부처 가르침도 공자 말씀과 같다고 말했다. 노자에 깊이 공부해 평등세상을 꿈꾸던 당대의 이단아였다. 하지만 금서로 지정된 그의 책은 널리 읽혔고, 마침내 세상을 뒤바꿨다. 그가 우리에게 착각에서 깨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과거에 독재와 싸웠으니, 지금도 옳은 사람 따윈 없다. 우리는 순간마다 반성하고, 회의해야 한다. 나는 과연 옳은가. 우리는 정말 옳은가. 우리가 나가고자 하는 길은 제대로 된 길인가. 그런 의심과 자기 성찰만이 앞으로 5년 간의 불우함을 견디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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