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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기의 말에게 말 걸기] 내 몸으로 겪어서 나온 말

 

예기치 못한 이변 사태로 낯선 이국의 공항에서 예보도 없이 긴 시간 연발하는 항공기를 기다려 본 적이 있는가. 그때 경험했던 지루함과 기다림은, 온전히 내 실존의 몫이라 할 수 있다. 그 지루함과 그 기다림이 실존의 무게를 지니는 것은, 그 지루함과 그 기다림을 ‘지금 여기’의 내 몸이, 내 몸의 감관이 감당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루하다, 기다리다 등은 몸이 만들어 내는 언어이다. 기슴이 뭉클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발을 끊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등등의 말들은 몸이 겪어서 토해 놓는 말이다. ‘오금아, 날 살려라’ 하는 말에 이르면 체험의 언어, 몸의 언어가 가지는 인간 휴머니티를 진하게 느낀다.

 

그런데 이런 몸과 체험 언어가 사라지고 있다. ‘기다린다’라는 말은 부정의 의미로만 부각되고, ‘지루하다’라는 형용사를 현대인들은 별로 실감하지 못하는 듯하다.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우리의 오감과 우리의 뇌를 무언가가 끊임없이 채워주는 정보 생태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의 지루함을 메꾸어 주는 정보나 콘텐츠들은 SNS에 무한정 들어 있다. 이런 콘텐츠들은 내가 내 몸으로 겪는 나의 경험이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서 나에게 연결되어 오는, 이른바 ‘매개된 경험’이다. 그것은 대개 디지털로 구성되고 운용되는 경험이다.

 

내가 주체가 되고 내 몸이 직접 경험하는 것들은 점점 사라지고, 그 자리를 디지털 기술이 지배하는 매개된 경험들이 들어와 차지한다. 그래서 내 몸이 직접 겪은 경험에서 얻는 나의 주체적 감수성과 의식은 입지를 잃어가고, 기술과 자본이 만들어 놓은 간접의 경험들이 마치 내 경험인 양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지루함을 몰아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SNS의 디지털 콘텐츠는 일정한 쾌감과 즐거움을 끊임없이 제공한다. 쇼츠(shorts)라고 불리는 짧고도 자극적인 SNS 영상이 대표적이다. '불안 세대(The Anxious Generation)'의 저자 조나단 하이트(Jonathan Haidt)는 이런 것들이 현대인의 뇌를 썩게 한다고 말한다.

 

미국의 문화비평가이자 역사학자인 크리스텐 로젠(Christine Rosen)이 쓴 '경험의 멸종(The Extinction of Experience/2024)'은 현대인의 삶에서 몸이 직접 겪어내는, 체험의 진정한 가치가 멸절하고 있음을 무섭게 경고하는 책이다. 그는 여행조차도 더 이상 새로운 경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SNS에 공유하기 위한 콘텐츠 생산의 수단으로 변질되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기다림의 순간을 스마트폰으로 채우며 내면의 사색과 주변 관찰의 기회를 잃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게 한다.

 

이 책에서 저자 로젠은 18세기 수학자 아이작 밀너(Isaac Milner 1750~1820)의 유명한 말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경고를 제기한다. 로젠은 일단 아이작이 자기 시대 계몽주의 사람들에게 가한 날카로운 비판을 먼저 보여준다. 바로 이 말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위대한 자들은 자신들에게 ‘영혼이 있음’을 잊고 있다.” 그가 정작 우리에게 들이대는 경고는 2백여 년 전 영혼을 몰각한 사람들보다 더 절망적 인간상을 응시하게 한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많은 사람이 자신들에게 ‘몸이 있음’을 잊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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