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마 한의사 시절, 내가 인턴을 했던 병원은 중풍 전문병원이었다. 급성기 뇌경색·뇌출혈 환자들이 끊임없이 입원했고, 인턴들의 호출기는 하루에도 수십 번 울려댔다. 어느 날 점심 두어 숟갈을 뜨려던 순간, 호출기가 울렸다. ‘왼쪽 대뇌의 절반 이상이 손상된 중대뇌동맥 뇌경색 환자가 L-tube를 또 뽑았다는 연락’이었다. 전날에도 두 번 뽑은 분이었다.
병실로 올라가 튜브를 삽입하려 하자, 환자는 마비되지 않은 손으로 튜브를 잡아채 바닥에 내던졌다. 다시 넣으면 또 빼고, 실어증으로 인해 6인실 병동 전체가 울릴 만큼 우우우— 하고 울부짖는 소리만 들렸다. 다섯 번, 여섯 번. 잠시 생각이 스쳤다.
“이렇게까지 거부하는데 꼭 넣어야 할까?”
그러나 당시 나는 열정적인 인턴이었다. 병실이 쩌렁쩌렁 울릴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 너무 힘들지만, 치료하면 좋아질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걸 끼어야 좋아질 수 있어요. 최선을 다해서 살 수 있을 만큼은 살아봐야 하잖아요.....”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한지 5분이 지났을까 그의 눈빛이 흔들리며, 몸부림이 조금 가라앉았다. 나는 다시 L-tube를 삽입했고 그는 영양섭취가 가능해졌다.
25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확신은 질문으로 바뀌었다. 만약 그 환자가 중증 치매였다면? 말기 암으로 고통만 남은 상태였다면? 혹은 그 자리에 내가 누워 있었다면, 나는 여전히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최근 ‘죽을 권리’를 다룬 10여 편의 연구들을 살펴보면, 결론은 단순하지 않다. 많은 논문들은 먼저 “존엄”의 개념부터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결정만을 존엄의 기준으로 삼기보다, 인간의 관계성·취약성·돌봄의 조건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여러 연구는 조력죽음이 도입된 사회에서 취약 계층이 오히려 ‘죽어도 된다’는 압력을 받을 위험을 지적한다. 장애인·독거노인·경제적 취약층일수록 “삶의 부담을 타인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다.
의료윤리 연구들은 또 다른 측면을 지적한다. 조력죽음은 환자의 선택 문제를 넘어서, 의사의 역할과 정체성 자체를 흔드는 문제라는 것이다. 생명을 지키는 것이 직업적 본질인 의료인이 죽음을 돕는다는 행위는 개인 윤리와 직업적 양심의 깊은 충돌을 낳는다.
한편 법제도를 분석한 논문들은 조력죽음을 안전하게 설계하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고 말한다. ‘회복 불가능성’ 판단, 반복적 의사 확인, 남용 위험 등은 완벽히 통제할 수 없으며, 제도화는 곧 사회적 가치의 큰 전환을 의미한다.
한국의 경우, 조력죽음은 허용되지 않고 임종 과정에서의 연명의료 중단만 가능하다. 의사 2명이 회생불가·급속 악화·사망 임박 상태를 확인해야 하며, 불필요한 연명치료만 중단할 수 있다. 즉 한국의 제도는 “죽음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다한 생명에 무의미한 고통을 더하지 않도록 하는 것”에 가깝다.
결국 질문은 죽음이 아니라 삶의 조건으로 돌아온다. L-tube를 뽑던 그의 마음은, 짐작컨데 고통을 견딜 수 없다는 표현이 아니었을까.
최근 연구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것도 같다. 죽을 권리를 말하기 전에,사람이 버티고 살아갈 수 있는 ‘조건과 돌봄’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
죽을 권리에 대한 질문은 답이 미완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논의되어야 할 것은 살 수 있는 권리, 견딜 수 있는 삶의 환경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