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전원일기'는 1980년 10월 21일에 시작하여 2002년 12월 29일까지, 22년이 넘게 방송된 국내 최장수 주간 드라마이다. 나이 든 세대에게 드라마 '전원일기'는 너무도 친숙하다. 젊었던 시절 자신의 시대를 향한 향수를 담고 있는 고향 같은 드라마이기도 하다. 김포 양촌리라는 농촌 마을을 드라마의 공간으로 삼고,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이루어지던 시대 배경을 맥락으로 거느리며, 농촌의 일상사를 다룬 드라마이다. 그 일상사에서 묻어나는 마을 사람들의 인정을 인간적 시선으로 다가가, 잔잔한 감동을 주었던 드라마이다. 그런데, 드라마 '전원일기'가 방송을 중단해야 할 위기는 진작에 찾아왔었다. 20년 넘게 그저 빤하기만 한 농촌 마을, 그것도 몇 가구의 이야기로만 계속 드라마를 이어가기로는 궁색한 구석이 많았다. 말하자면 소재 고갈에 직면한..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첫경험의 순간들이 있다. 한의사를 업으로 택한 숙명인지 나는 어려워보이는 병들이 좋아지는걸 목격할 때 온몸의 전율이 흐른다. 특히 꼬꼬마한의사시절에 잘 안낫는 질환의 환자들이 놀라웁게 호전되는 광경을 목격한 순간들의 경이감들은 그 이후의 수많은 치료경험이 쌓여도 퇴색되지 않고 생생하다. 한 파킨슨 병 환자의 경우도 그렇다. 한방병원의 내과전문의과정 2년차 레지턴트였던 때 입원병동에 파킨슨 병으로 약을 복용하고 있는 한 환자분이 중풍으로 입원하였다. 70대중반의 뇌경색환자였다. 침대에서 절대안정을 취해야 하는 급성기가 지나가고 회복과 재활훈련이 시작되자 종종걸음, 느린동작, 지팡이를 잡는 손의 떨림 뻣뻣한 일상동작까지 파킨슨 병의 증상이 또렷이 보였다. 그녀는 변비가 심했다. 중풍자체로도 오는 증상이지만..
우리나라에 장마가 시작됐다. 최근 기상청이 공개한 지난해 ‘2023년 이상기후 보고서’는 오랜 가뭄 뒤에 폭우가 쏟아지거나 극심한 기온 변동 등 기후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졌다고 밝혔다. 심각한 것은 기후위기가 가속화하고 있어 이런 현상은 더 심화할 것이란 분석이다. 지난해에는 ‘양극화된 기후’로 인해 남부지방에 기상관측 이후 가장 길었던 가뭄이 계속됐고 해소되자마자 660mm가 넘는 비가 쏟아졌다. 장마철 역대 1위 강수량이었다. 이로 인해 53명의 인명 피해와 8071억 원에 달하는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극한 기후현상으로 인명과 재산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장마철이 되면 주거 취약계층이 사는 지역이나 반지하 주택에서는 재해 사고와 반복되는 상습 침수 우려 때문에 불안에 시달려야 한다. 특히 반지하 주택은 집중호우, 화재 등에 취약할 뿐만..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는 게 싸움 구경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피해자가 아닐 때 이야기다. 지난 13일, 공정거래위원회와 쿠팡 간 싸움이 본격화되었다. 공정위와 쿠팡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를 지켜보자니 여간 껄끄럽지 않다. 그도 그럴 게 국내 유통업계 1위 사업자로 올라선 쿠팡은 이미 3천만 명 이상의 국내 이용자를 보유하고 있다지 않은가. 공정위와 쿠팡의 오랜 다툼의 역사는 다시 한번, 역대급의 과징금과 함께 불이 붙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쿠팡에 잠정 1400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공정위가 유통업체에 부과한 역대 과징금 중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공정위는 쿠팡이 자사 상품을 상단에 고정 노출하고, 임직원을 동원하여 구매 후기를 작성하도록 하는 등 불공정행위를 해왔다고 보았다. 쿠팡에 입점한 일반 사업자와의 공정한 경쟁과 소비자 후생을 저해했다는 것이다. 제재 결정을 발표하는 44쪽에 걸친 보도자료는 공정위가 고려한 근거들, 즉 쿠팡의 내부 자료와 소비자들의 구매 후기, 입점 사업자의 문의와 쿠팡의 답변 등을 정리하여 보여준다. 일례로, 쿠팡은 그간 임직원으로 구성된 ‘체험단’을 동원하여 자사 상품에 우호적인 구매 후기를 남겨왔다. 이는 다른 입점 사업자에게는 금지된다고 안내해 온 행위다. 이를 두고 공정위는 체험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아마존과 비교하며, “아마존조차도 일반 소비자가 아닌 임직원으로 하여금 구매 후기를 작성하도록 하고 있지는 않”다고 언급한다. 공정위의 제재에 쿠팡은 즉각 입장을 발표하였다. 제재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듯 하나 기실 공정위에 화가 단단히 난 듯하다. 이번 제재 탓에 로켓배송 서비스의 유지와 약속했던 전 국민 100% 무료 배송을 위한 투자 모두 어려워졌다는 게 쿠팡의 입장이다. 소비자에게 제공되어오던 서비스마저 철회할 수 있다는 쿠팡의 발언에서 소비자와 영세 사업자는 느닷없이 볼모로 붙잡힌 신세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해 온 국내 3천만 소비자의 처지에서 생각해보자. 그간 눈 뜨고 코 베여 왔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이 싸움, 영 재미가 없다.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앞으로 이 서비스 계속 써도 괜찮은 건가. 이번 논쟁이 정말 ‘싸움’에 그치지 않으려면, 그 건설적 대화의 중심에는 당연히 소비자와 영세 사업자들이 자리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번 제재의 결과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속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결과와 무관하게 쿠팡 그리고 여타 플랫폼 사업자가 진실로 소비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자사 알고리즘이라고 몰래 유리하게 바꾸고 이용하다가 소비자도, 입점사도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소비자가 궁금한 건 과징금이 과다한지, 쿠팡이 유달리 미움받고 있는지가 아니다. 그래서 쿠팡 알고리즘을 믿어도 되는가? 쿠팡은 여기에 답해야 한다.
한동안 뜸하다 싶던 경기도 대형 화재 참사가 또 터졌다. 경기 화성시의 한 리튬전지 제조공장에서 폭발과 함께 불이 나 25일 오후 현재 23명이 숨지고 8명이 다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잊을만할 때 또 발생한 후진국형 대형 화재 참사에 억장이 무너진다. 아직 원인 규명이 정확하게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동안 공을 들여왔던 산업안전 시스템에 구멍이 난 것만은 분명하다. 경기도 산업안전 행정의 허점까지 세밀히 찾아내어 확실하게 보완해야만 한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화재는 24일 오전 10시 31분경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산업단지에 있는 리튬전지 제조업체 ‘아리셀’ 공장 11채 중 3동 2층에서 폭발음과 함께 발생했다. 소방 관계자는 배터리 셀 하나의 폭발에서 시작돼 퍼졌다는 목격자 진술을 확보했다. 공장에는 3만 5000 개에 이르는 리튬전지..
브라이트 호라이즌스(Bright Horizons Family Solution Inc.)가 매년 발표하는 현대 가족 지수에 따르면 미국인의 3분의 2는 새로운 직업을 구할 때마다 남성(아버지)보다 여성(어머니)이 탈락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오히려 경력을 발전시킬 기회가 워킹맘 대신에 자격을 덜 갖춘 직원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한다. 또한 사회학자 미셸 버디그(Michelle Budig)의 연구에 의하면 일하는 어머니는 자녀 한 명당 급여가 4퍼센트 삭감되는 반면 일하는 아버지는 오히려 평균적으로 6퍼센트나 인상된다. 성별 간의 임금 격차는 해를 거듭할수록 커지고 있으며, 이는 승진 비율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의 경우 직업 시스템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직장 생활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불..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할머니와 살았다. 할머니와 살았던 어린 시절은 그의 가슴에 나이테처럼 새겨졌다. 나이테로 꼭꼭 새겨진 할머니는 그가 대학 다닐 때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가 이 세상에서 보낸 마지막 육 개월을 그는 곁에서 지켜보았다. 돌아가실 무렵, 할머니는 기력이 없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죽고 싶지 않다고 읊조렸다. 그때, 왜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을까. “제가 꼭 옆에 있을게요” 말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안아드리기만 했을까. 아직도 그는 그게 늘 안타깝다.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죽음을 앞둔 할머니의 깜깜한 밤하늘을 촛불이라도 태워 밝혀드릴 수 있을 텐데. 후회는 늘 늦고 더딘 것이라서, 할머니의 영원한 떠남을 그는 쉬 받아들이지 못했다. 상실의 아픔은 할머니 장례를 치른 뒤에 밀어닥..
전세사기‧깡통전세로 인생길이 가로막힌 피해자들의 절규가 계속되는 가운데 정치·행정·사법당국의 대응은 하세월 게걸음이다. 경기지역 전세사기 피해 임차인들이 경찰의 신속한 사건 수사를 위한 ‘전세사기 전담수사팀’ 설치를 주장하고 나섰다. 전세사기 사건은 여전히 진행형인 비극으로 파장을 넓히는 중이다. 사건 수사가 발 빠르게 효율적으로 진행되는 게 급선무다. ‘전세사기 전담수사팀’ 설치 요구는 충분히 일리가 있다. 당국의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최근 수원과 평택 등 전국에서 70억 원 규모의 전세 사기를 벌인 임대인이 재판에서 유리한 입장을 만들기 위해 ‘보여주기식’ 행태에 나섰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경기신문 취재에 따르면 전세사기를 벌인 임대인은 파산신청을 한 뒤 강원도 원주의 한 택시회사에서 기사로 근무 중인 것으로..
내가 초등학교 시절 TV에서 아주 재미있는 미드(미국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이름하여 “소머즈” 원제는 Bionic woman. “600만불의 사나이”의 여성판으로 초능력을 사용하는 특수 요원, 소머즈의 활약을 그린 내용이다. 내 기억으로 그 드라마의 마지막 회 정도 될 때 아주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나온다. 어떤 능력 있는 박사가 핵폭탄의 위험성에 대하여 인류에게 경고를 한다. 그냥 말로 하는 경고가 아니라, “앞으로 지구 어디서든, 어느 나라든 핵실험을 한 번이라도 하면 자동으로 자신이 설치한 어마어마한 핵폭탄 미사일이 발사되어 전 인류가 멸망할 것이다”라는 무시무시한 경고이다. 모든 나라가 혹은 위정자들이 경고를 귀 담아 들었다면 이 에피소드는 그냥 재미없게 끝나겠지만, 항상 이야기가 재미있으려면 누군가는 그 경고를 무시하고 핵실험을 한다. 그리하여, 박사가 설치한 핵미사일 발사 시스템은 자동으로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다. 소머즈의 미션은 바로 이 카운트 다운된 핵미사일 발사 시스템을 중단시켜야 하는 중차대한 일이다. 항상 그렇듯이 시간은 촉박하고 미션은 어렵다. 이 핵미사일 발사 시스템은 박사의 연구동 캠퍼스 중앙에 설치되어있고 중앙 컴퓨터에 의해 작동, 보호되고 있다. 소머즈는 이 연구 캠퍼스에 침투하여 중앙 컴퓨터를 중지시켜야 하는 것이다. 중앙 컴퓨터는 침입자를 막도록 설계되어 있기에 소머즈가 캠퍼스에 담 넘어 들어가자 마자 방어 기재가 작동하여 소머즈에게 총격을 가하는 등 여러 장치를 작동하여 소머즈가 중앙 컴퓨터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방어를 한다. 이 과정 중에 중앙 컴퓨터는 스피커를 통해 소머즈에게 말을 건다. “네가 중앙 컴퓨터의 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겠지만 불가능 할 것이다.” “너는 그 중심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등등 이런 식으로 소머즈와 중앙 컴퓨터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간다. 나는 어린 마음에 “컴퓨터와 사람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한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물론 많은 액션, 재난 영화가 그렇듯이 결국 소머즈의 미션은 1초전에 성공한다. 그 후 어떤 과학잡지에서 이 주제에 관한 한 과학자의 글을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사람과 컴퓨터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는 일은 우리가 살아생전에는 불가능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5월 13일, 내가 어린 시절 신기하게 봤던 공상과학 같은 일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바로 “ChatGPT 4-o”의 등장이다. Open AI가 기습적으로 발표한 챗GPT의 새 모델이다. 사람처럼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 사람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장면을 보여줬다. 정말 놀라운 일이고 이 인공지능을 이용해 앞으로 우리의 생활 자체에 많은 변화가 이루어 질 것이 명약관화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인공지능(AI)의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인류 사회가 이것을 안전하게 어떠한 위험도 없이 잘 사용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준비가 덜 되어있다는 것이고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이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위험 요소이다. 하여, 최근 AI기업의 전현직 개발자 직원 13명이 “직원들이 보복 걱정 없이 AI 위험성을 경고할 권리를 보장하라”고 촉구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AI 기술의 위험성을 담은 비공개 정보를 사회에 알려야 할 필요가 있는데 회사들이 내부 고발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계약을 체결해 의도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당연히 이윤 추구를 위해 위험성에 대한 제대로 된 감독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니 이들의 촉구는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고 본다. 문명의 이기를 이용한다는 것은 인류 삶에 보탬을 주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기업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이는 인류의 발전도 진화도 아닐 것이다. 오래된 미래의 작가 노르베리 호지의 글이 생각난다. “행복하지 않으면 진화가 아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내가 아직도 사람으로 보이나요? ㅎㅎㅎ
‘할 일 미루기’라는 말은 하나의 온전한, 이미 존재하는 동사처럼 느껴질 정도로 익숙한 표현이다. 나는 할 일을 곧 잘 미룬다. 매번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크고 작은 할 일들을, 치밀할 정도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으로 미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즐겁지 않다. 오히려 괴로운 일이다. ‘아, 이거 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나 중얼거림을 반복하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할 일을 미루고 있는 내가 있다. 그러다 문득 ‘할 일 미루기’라는 말에 집착하게 됐다. 나는 왜 해야 할 일을 미룰 때 괴로움을 느끼는 걸까? 직관적이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할 일 미루기는 나쁜 일이니까. 착한 어른이(?)가 되려면 할 일을 미루면 안 되니까. 근데 정말 할 일을 미루는 건 나쁜 일일까? 내가 생각할 때 미루기를 ‘당하는’ 할 일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첫째로,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