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친 /박일만 아파서 곧 죽겠다는 전화를 받고 서둘러 갔다 두 차례 낙상사고로 누워 계신지 몇 해 겨우 몸 추스르고 사신다 몸은 날이 갈수록 작은 점이 되고 늘어가는 약봉지가 유일한 낙이시다 낡을 대로 낡은 관절들, 숨이 턱에 차도록 도착해 보니 겨우 발목에 통증이시다 걸어서 내 집에 오실 수 있는 지척이지만, 안다, 핑계 김에 다 늙은 자식이라도 보고 싶은 것이다 발목을 문질러드리자 벌떡 일어나 밥상 차리러 가신다 ■ 박일만 1959년 전북 장수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법학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詩)을 수료했다. 2005년 『현대시』로 등단해 문화예술창작지원금 수혜(2011, 2015). 송수권 시문학상(2019)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사람의 무늬』,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 『뼈의 속도』. 현재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인협회, 전북작가회의 등을 출판했다.
내몰린 바다 /전영란 우리 동네 해남읍 복평리 바다로 달리던 유년은 어디쯤 있나 농게 집을 점령한 낙지가 평수를 늘리고 서리 내릴 때부터 봄이 필 때까지 잠자던 짱뚱어는 부드러운 바람을 감고 온몸으로 개펄에 시를 썼다 수런거리던 조개들 바스락바스락 사랑을 나누면 때에 맞춰 사람들은 바구니를 들고 바다로 나갔다 그 사랑을 먹고 우리 키는 훌쩍 자랐다 해초와 산야초가 입 맞추는 바닷가 비탈에 서서 나는 밀려갔다 밀려오는 파도의 말에 귀 기울였다 지도를 바꾸겠다고 달려든 사람들 불도저와 포클레인을 불러들여 안절부절못하던 바다는 제 몸의 무게만큼 새 땅을 머리에 얹었다 낙지 짱뚱어는 먼 곳으로 이사 가고 바지락 꼬막 석굴은 씨를 남기지 않았다 내몰린 바다, 방조제 밖으로 물러가며 내 가슴으로 가득 밀려왔다 ■ 전영란 1955년 전남 해남 출생. 방송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해 창조문학 시 부문에 등단했다.들소리 문학상, 동서 커피문학상, 이동주문학상, 청향문학상을 수상했고, 산문집 ‘사랑을 묻길래’, 시집 ‘바람소리’외 2권을 등재했다.
뿔 /박방희 내 몸에 뿔이 있다면 그건 가장 단단한 몸일 터 그러고 보니 가끔 단단해지는 게 있네 그게 뿔이라면 뿔 더러 뿔내고 진짜 뿔이 되다가 이내 순해지며 착해진다 제 안에 말랑말랑한 뿔을 감추고 신사의 나라에서는 그저 오줌이나 눈다 ■ 박방희 1946년 경북 성주 출생. 1985년부터 무크지 《일꾼의 땅》 《민의》 《실천문학》 등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동시, 동화, 소설, 수필, 시조를 쓰고 있다. 방정환문학상, 우리나라좋은동시문학상, 한국아동문학상, 금복문화상, 유심작품상 등을 수상했고, 시집 『나무 다비』, 『사람 꽃』 시조집 『꽃에 집중하다』 동시집 『판다와 사자』 등 27권의 저서가 있다. 현재 대구문협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눈 온 날 아침 /김근당 누구나 살면서 하나도 흠잡을 데 없는 순수한 사랑을 갈망할 때가 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첫사랑의 까만 눈동자 삶의 골목에서, 문득 그리움의 창문을 열면 생목(生木)의 계절에 굳은 가지 휘도록 쌓이는 감성의 숲을 헤치며 걸어오는 사람 일상의 틀을 부수고 꿈의 벽을 부수며 나를 신비로운 세상으로 데려가는 영혼의 날개가 있다 ■ 근당 김영호 1944년 충남당진 출생으로 1996년 시대문학, 문학의식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 『달빛 이야기』, 『우자의 노래』, 『물방울 공화국』, 『그대소식이 궁금합니다』, 단편소설 「불꽃놀이」, 「아리랑 랩소디」, 「매미와 바퀴벌레」, 「그림 그리는 여자」, 「뱀이 사는 집」 등을 발표했다.현재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작은 서슬이 곱다 /한분순 아스팔트 닳은 결에 눈물이 스며들어 거친 틈새 돋운 푸름 스러짐 딛은 새싹 바람에 되뇌인 속내 애틋이 흐드러져 그 서슬 곱게 피어 돌보다 굳어진다 시름이 아물어 혼자서도 틔운 잎새 눈 밝은 여린 이들을 다독이는 길 위의 꿈. ■ 한분순 1943년 충북 음성 출생. 197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저물 듯 오시는 이』 『서울 한낮』 『손톱에 달이 뜬다』 『실내악을 위한 주제』 『‘한국대표명시선100 서정의 취사』 등과 시화집 『언젠가의 연애편지』, 수필집 『어느 날 문득 사랑 앞에서』 『소박한 날의 청춘』 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화예술상, 한국문학상, 정운시조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서울신문·세계일보·스포츠투데이 편집국 문화부장·국장,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및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역임했다.현재 한국시협 이사 겸 심의의원,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중앙대문인회 회장 등을 맡고 있다.
포노 사피엔스 /성배순 남편과 등을 맞대고 누워 각자 지혜로운 폰을 매만진다. 자? 내 폰 갤럭시가 은하를 건너 그의 폰 갤럭시에게 묻는다. 아니 왜? 그의 갤럭시가 은하를 건너 내 갤럭시에게 대답한다. 할 껴? 몰러! 선문답이 오간다. 인류의 오랜 소통이 시작된다. 각자 잠든 뒤에도 휴대폰에 남은 신인류의 사랑법은 계속된다. ■ 성배순 1963년 충남 연기 와촌 출생. 2004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계간 《시로여는세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어미의 붉은 꽃잎을 찢고』, 『아무르 호랑이를 찾아서』, 『세상의 마루에서』 등이 있다. 제1회 삶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까치집 /이보영 삼월의 창을 열고 묵은 먼지 털어낸다 서로의 가슴에서 꽃이 되지 못하고 무거운 옹이로 남겨진 검푸른 돌멩이 고요히 몸을 눕히는 저물녘의 일기장 같은 지우지 못했던 압축된 파일이다 정수리 흔들고 가는 작은 바람 집 한 채 ■ 이보영 1953년 해남 출생으로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한국시조시인협회 중앙위원, 국제PEN광주 시조분과 위원장, 광주·전남시조시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중앙일보학생시조백일장 우수지도교사상, 국제PEN광주 문학상, 무등시조문학상, 전남예술상, 전남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사진은 왜 /서숙희 사진을 보는 건 조금 쓸쓸한 일이다 어느 먼 추억 속에 꽂혀있는 생의 한 갈피 사진은 왜 과거 속에서만 희미하게 웃을까 나비가 잠시 앉았던 것 같은 그때 거기서 젊은 한때가 젊은 채로 늙어 가는데 사진은 왜 모르는 척 모서리만 낡아갈까 ■ 서숙희 경북 포항 출생으로 매일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에 당선했다. 백수문학상, 김상옥시조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 한국시조작품상 등 수상했고, 시조선집으로 『물의 이빨』, 시조집 『아득한 중심』 『손이 작은 그 여자』 『그대 아니라도 꽃은 피어』 등이 있다.
오늘의 레시피 /김경엽 저물녘, 국수를 삶았다 맑은 노을에 헹구었다 방금 새가 날아간 가지가 흔들렸다 가느다란 새의 발가락이 떨어뜨린 몇 잎의 적막 고명 대신 적막을 주워 국수 위에 얹었다 고소한 적막과 담백한 노을 맛이 새가 떠난 허공과 잘 버무려질 때 누군가 골목길에 두고 간 자전거처럼 지상의 쓸쓸함이 환하게 켜지는 저녁 ■ 김경엽 1961년 강원 원주 출생으로 고려대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7년 <서정시학>으로 등단해, 평론집 <중국식 표정>을 출간했다.
잊는다고는 말자 /한분옥 잊는다고는 말자 만나자고는 더욱 말자 마음이 흘러간 뒤 정은 흘러 무엇하랴 아, 문득 무너져 내린 산 그림자였다 그러자 이미 한번 울고 나온 목숨의 비탈길에 설움의 돌 수레를 또 어찌 굴릴까 보냐 먼발치 신발을 끄는 다저녁때 쑥부쟁이 출렁이던 그늘마저 앙금으로 앉았던가 휘굽은 밤의 허리 훠이훠이 넘다 말고 긴 울음 가운데 앉아 성긴 모시 올을 센다 ■ 한분옥 1987년 《예술계》 문화예술비평상, 2004년 《시조문학》 신인상,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연암문학상, 한국문협작가상.한국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시조집 『꽃의 약속』. 『바람의 내력』과 산문집 『모란이 지던 날』이 있다.《시조정신》 발행인으로 외솔시조문학상 운영위영장, 울산대학교 행정학과(예술행정) 박사 수료. 한국예총울산광역시연합회회장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