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후보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정치인이다. 한국 대중은 입지전적인 인간보다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자를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 국회의원이 되는 코스는 대개 이렇다. 지역 이름을 딴 고등학교를 나오고, 서울 법대나 그에 준하는 대학을 졸업해서 사시나 행시를 본다. 일단 행정부 국장급 이상, 차장검사나 부장판사급 이상으로 산다. 아니면 대학 때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다 구속돼서 징역을 산다. 그러다 지역에 다시 내려와 정당 공천을 받고 당연한 듯 당선된다. 대개 당선된 해는 나 같은 놈이 어떻게 여기에 왔나 하면서 살고, 나머지 삼 년은 저런 놈이 어떻게 여기를 왔나 하면서 산다. 정말 열심히 일하는 몇몇을 빼면 누가 되든 비슷하다. 지역 유지들 모임의 최종판이 국회다. 이재명은 이 라인에서 완벽한 열외다. 이재명을 싫어하는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은 그가 엘리트 코스를 걸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하다고 느끼는 대중들의 보수성이다. 두 번째는 노무현 콤플렉스다. 그의 죽음은 노무현과 진보진영을 지지한 지지자들에게 이명박 일당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이른바 대깨문이란 지지자들을 만들었는데, 지난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재명은…
라면 중 제일 맛없는 게 꼰대라면이라 한다. 매장에서 실제 주문하는 것을 살펴보면 젊은이들은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많다. 까페라떼는 나이 든 세대의 주문량이 훨씬 많다. 꼰대는 여자보다 남자가 많다. 아이들과 엄마, 아빠의 관계를 살펴보면 안다. 남자들이 더 공감능력이 부족하고 사회적 위치에 익숙해 고압적 말투를 사용하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가르치려는 태도가 많아서 일거다. 배움의 깊고 얕음의 문제가 아니다. 무식한 꼰대, 유식한 꼰대다. 유식한 꼰대는 가르치려 들기 때문에 더 피곤하다. 드라마 시청률은 여자가 남자보다 무조건 높다. 시청률은 30-50 대 여자가 견인한다. 젊은 여성 시청자는 드라마 속의 판타지를 꿈꾸고 중년층 이상은 현실의 자기 관여도 높은 리얼리티가 극중 어떻게 설정되고 전개되는지를 관심 있게 본다. 뉴스와 시사프로는 정보전달에 따른 확증편향의 문제가 발생한다. 생각에 따라 가치판단의 문제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드라마와 예능은 재미있냐 없냐의 문제일 뿐이다. 재미없으면 안보고 만다. 드라마와 예능에 대해 확증편향적 자세와 진영논리를 펴는 사람과는 같이 놀면 안된다.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현실의 극화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혹
바야흐로 예측의 시대이다. 코로나 판데믹 종식 시점이나 미중 무력충돌 지점과 시기, 그리고 북한과의 대화 시기 등 자칭 전문가들의 각종 예측이 넘쳐난다. 세상이 두려움으로 규정되기 시작하면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예측이 더 많아진다. 경제와 외교정책에 이런 현상이 더 두드러진다. 1989년 동독 수상 호네커는 공언했다. “베를린 장벽은 50년 이상 버티고 있을 것”이라고. 그 호언장담은 10개월 만에 장벽 붕괴라는 현실 앞에 우스개로 전락했다. 중국의 발전상과 그 여파에 대한 예측도 비슷하다. 1995년 미국 사회학자 Jack A. Goldstone은 “급속한 중국의 경제성장은 중국 공산당을 구하지 못하고, 10-15년에 중국사회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중국의 지배집단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라는 신종 개념을 창안했다. 정치는 공산당 중심의 권위주의체제를 굳건히 하는 토대에서, 경제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는 방식을 시행하여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헝가리와 같은 유럽의 일부 전체주의적 국가들마저 이런 형태의 통치체제를 모방할 정도이다. 사실 지난 50년을 통틀어보면 긍정적인 예측과 사건도 많았다. 냉전 종식, 남아공에서의 인
‘사언지점 불가위야 (斯言之玷 不可爲也)’라는 말이 있어요. 시경(詩經)에 나오는 이 말은 ‘내가 한 번 잘못 내뱉은 말 한마디는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지요. 요즘 여야 대선 예비후보들이 총칼 전쟁보다도 더 가혹한 선거전을 치르고 있는데, 말 한마디에서 비롯된 시비들이 정말 살벌하네요. 전자기술의 발달로 10년~20년 전에 했던 말까지 자료가 남아 있어서 무슨 말만 하면 과거의 언행들이 득달같이 소환되곤 하니 놀랍군요. 불과 몇 년 전에 했던 말과 다른 말을 하다가 딱 걸린 후보들이 곤욕 치르는 걸 바라보노라면 “저 노릇도 참 못 해먹을 짓이네”하는 딱한 마음이 먼저 드네요. 내남없이, 살아가는 일이란 그저 쓰레기를 만드는 일이 태반인데, 그렇게 수십 년을 한 점 티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도 대선전 양상은 영락없이 ‘내로남불’의 극치를 이루고 있네요. 지금 봐서는 춘풍추상(春風秋霜) 같은 좋은 명언들은 머지않아 영영 사라지게 생겼군요. ‘정치는 곧 말’이라는 속언(俗言)이 있어요. 현대정치는 철저하게 말로 하는 경쟁이니까 그 말이 아주 그르지는 않은 듯해요. 그래서 그런지 대개 말 잘하는 사람들이 정치판에 있군요. 그런데 요즘 정치권에서…
밭에 가야 맘이 편하다는 선산할매는 일이 끝나면 고추지지대로 쓰던 쇠꼬챙이에 목장갑을 걸어둔다. 굽은 손가락 굵은 손가락 모양대로 피는 목장갑은 억지수절 사십 년 선산할매 상사화.
당신에게 기도할 말이 많이 없습니다. 그냥 제 바람을 몇 가지 말씀드립니다. 그냥 제가 고기를 좀 덜 먹거나 안 먹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잘 안됩니다. 입으로는 환경과 생태를 이야기하는데, 고기를 씹으며 느끼는 맛이 참 좋고 떨쳐내기가 힘듭니다. 육식이 기후위기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데, 저는 왜 이러는 걸까요? 그 맛의 유혹에 못 이겨 봄에 올라온 냉이를 캐어 먹기보단 슈퍼에 가서 손쉬운 만두를 사다 먹습니다. 요즘은 만두가 참 잘 나와 맛이 좋습니다. 그리고 만두 포장지는 쓰레기통을 채웁니다. 밥을 안쳐 놓고 기다리기가 싫어 라면을 끓입니다. 매번 비닐봉지와 수프 봉지도 쓰레기통을 채웁니다. 하루를 지내다 보면, 이것저것 생각 없이 구매한다고 돈이 나가 있고, 쓰레기통과 재활용통엔 사흘이면 언제나 100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것들로 꽉 차있습니다. 하느님, 당신에게 어떻게 기도를 하면 이런 일상이 바뀌어지는지요. 제가 어떻게 기도를 하면 이런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요? 당신이 독생자 예수를 보낼 만큼 사랑한 이 세상은 매일 쓰레기가 매립된 산 하나가 만들어지고, 다음 매립을 위해 맑은 물이 흐르던 산 하나가 파헤쳐지는 세상입니다. 쓰레기 섬이 태
얼마 전 취재 때문에 나태주 시인을 만났는데 ‘어떤 존재가 시인이 되는가. 시 없이 무탈하게 사는 삶, 지옥을 살더라도 시 쓰는 삶 중 택하라면 기꺼이 후 선택을 하는 자’라는 말을 들었다. ‘좋은 시를 쓰려면 지옥을 살아봐야 한다’는 말로도 들렸다. 실제 문인, 예술가 중 오체투지하듯 산 이들 가운데 ‘문학과 예술의 소재, 성찰이 삶의 지옥에서 빚진 게 많아 통과의례라 생각한다’ 라거나 ‘다시 태어나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같은 길을 가겠다’고 말하는 예술가를 많이 만났다. 그들처럼 예술의 피와 끼가 없는 나는 ‘도대체 예술이 무엇이기에 지옥마저 껴안는가’라는 의문을 더하곤 했다. 스탄 게츠(Stan Gets 1927-1991)를 소개하려고 꺼낸 이야기다. 브라질 보사노바 음악을 이야기할 때 작곡자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 1927-1994)과 함께 세트로 나오는 미국의 색소폰 연주자. 그의 음악을 처음 들은 것은 20여 년 전, 친구 작업실에서였다. FM 라디오에서 재즈가 흐르고 있었는데 색소폰 소리 하나가 훅 들어왔다. 들으면 담박 아는 명곡 서머타임(Summertime). 미국 조지 거슈인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
무릇 참다운 사상, 살아있는 사상은, 기르는 힘과 변화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서서히 나무처럼 변하는 것이지 구름처럼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다. (존 러스킨) 진정으로 위대한 사업은 모두 서서히 눈에 띄지 않게 달성된다. (세네카) 인생은 영혼의 탄생이어야 한다. 동물적인 것이 인간화되고, 육체가 정신으로 거듭나고, 양초가 빛과 열로 바뀌듯 육체적 활동이 정신적 활동으로, 의식으로, 이성으로, 정의로, 관용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숭고한 연금술은 지상에서의 우리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여기에 우리의 사명이 있고 우리의 존엄성이 있다. (아미엘) 병아리가 웅크리고 있는 달걀을 깰 때, 병아리의 목숨에 미치는 위태로움을 감수해야 하듯, 사람도 다른 사람의 영혼에 미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그를 자유롭게 할 수 없다. 모든 영혼은 일정한 단계까지 성장하면 스스로 자신의 쇠사슬을 끊는다. (류시 말로리) 생명은 끊임없는 기적이다. 생명의 성장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자연계의 가장 신비로운 비밀을 아는 것이다. (류시 말로리) 자신은 성공했다는 생각만큼 도덕적 완성에 해로운 것은 없다. 다행히도 진정한 도덕적 성장의 길은 눈에…
긴 진화의 상호 적응과정이 생략된 채 인간 문명에 의해 발생한 코로나 19는 창궐한 지 20개월 정도 되는 지금, 변이를 계속하며 전세계적으로 2억 이상의 사람을 감염시켜 사망자는 400만 명을 넘어섰다. 이 바이러스가 만든 지옥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경제 활동은 물론 생활양식마저 바꾸며 대응하고 있다. 코로나 19로 고통받는 상황 속에 우리는 부동산 투기라는 또 다른 전염병을 경험한다. 통계청이 지난 7월 말 내놓은 ‘2020년 국민대차대조표’만 보아도 주택 시가총액은 현 정부 출범 이전인 2016년 말 4000조 원 정도에서 4년 만에 1700조 원 넘게 불어나 폭등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희생자가 고령층인 코로나 19와는 달리 2030대 계층이 주요 대상이다. 살아남기 위해 2030대는 삶의 방식을 바꾸어 영끌로 버텨야 했고, 이마저 어려운 부동산 난민들은 더 이상 무너지지 않기 위해 빚투라는 처절한 방식으로 대응한다. 이런 생물학적, 문화적 전염병 창궐 속에 놓쳤던 전염병의 존재를 확인한다. 이재용 재벌 총수의 가석방. 그는 박근혜와 함께 국정 농단에 관여했던 기업인이다. 국정 농단은 물론 각종 범죄 혐의로 재판 중인 그의 가석방이란 탄핵된…
창을 열면 물안개가 짙다. 늘 그렇다. 강(江)에 기대 사는 마을의 아침은 물안개로 시작된다. 안개는 강과 산과 들의 경계를 지우고 기억에 박힌 익숙함 마저 지운다. 물까마귀 울음이 안개 너머에서 날아와 단풍나무 이파리를 흔든다. 안개에 갇힌 까마귀 울음은 반듯하게 착지하지 못하고 마당에 나뒹군다. 강을 건너온 까마귀 울음에 잣나무 숲에 사는 딱따구리가 화답한다. ‘까악’은 애달프고 ‘딱딱’은 절박하다. 둘의 울음은, 전선(戰線)을 사이에 두고 암호를 주고받는 스파이들의 교신 같다. 강을 덮은 물안개는 전쟁의 참상을 덮는 연기(煙氣) 같다. 물안개를 따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미얀마 로힝야족 마을이 흘러간다. 물안개의 발걸음은 강물의 흐름만큼이나 더디다. 물안개의 느린 발걸음은, 링거에 의지하고 숨을 뱉는 다섯 살 아이의 맥박 같다. 강을 덮은 물안개가 강을 거슬러 나아간다. 강도 따라 거꾸로 흘러가는 것 같다. 죽임으로 역사를 거스르는 반역의 걸음걸이도 저러할까. 비틀거리려는 아침, 창틀에 손을 짚고 거꾸로 흐르는 물안개를 바라본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 물안개가 자욱하기는 인터넷 세상도 마찬가지다. 새벽 내내, 인터넷 창(MS Windows)을 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