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가 설립한 스페이스 X의 스타링크가 주목을 받고 있다. 스타링크는 지구 저궤도에 4만 2000개의 위성을 띄워 하늘, 육지, 바다 등 곳곳에 인터넷을 공급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으며, 저궤도 위성통신 분야에서 세계 1위의 자리를 구축하고 있다. 5G 정보통신망이 대중화되었지만, 정보통신망이 없는 사각지대에서는 인터넷을 할 수 없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스타링크가 이 문제를 해결해준다. 미래 사회는 로보택시, 도심항공교통(UAM), 자율운항선박 등 최첨단 자율주행 사회로 진화할 것이며, 달과 화성에 기지를 세워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에 도전할 것이다. 자율주행차는 미국, 중국에서 상용화되었으며, 한국에서도 시험주행 중으로 곧 인류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될 것이다. 테슬라, 구글, 현대차, 바이두, 아마존, 화웨이 등 글로벌 기업들이 자율주행차 산업에 뛰어들고 있다. 자율주행차와 UAM이 대중화되면, 새로운 정보통신망이 필요하게 될 것이며 스페이스 X의 스타링크가 세상을 더 편리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올해 3/4분기 5G 통신장비 세계시장 점유율은 에릭슨, 화웨이, 노키아, ZTE, 삼성전자 순이다. 5G 통신장비에서 에릭슨과 화
2024년이 며칠 남지 않았다. 올해도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다. 돌아보니 우리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언론산업의 위기와 저널리즘의 도전은 계속됐다.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언론 역시 올해는 인공지능(AI)으로 시작해 AI로 끝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론산업과 저널리즘에서 다른 중요한 이슈와 현상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AI가 이 모든 것을 블랙홀처럼 삼켜 버렸다. 언론을 변화시킬 AI에 대한 관심과 집중은 이해되지만 너무 과도하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지금으로서는 향후 몇 년 동안 우리 언론에 대한 화두는 AI가 중심을 이룰 것이 분명하다. 이로써 정작 다뤄야 할 그 무엇을 계속 놓쳐 우리 언론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올해 우리 언론산업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여러 경영 관련 지표가 본격적인 하락세로 돌아설 것이라는 전망이 대부분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크게 오르며 잠시 개선되는 것처럼 보였던 착시 효과가 사라졌다. 언론매체의 이용률은 팬데믹 이전 하락 추세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물가상승률, 경제성장률 등을 감안하면, 실질적 광고 수익은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하고 그 기울기는 더욱 가팔라지고 있다. 언론산업의…
나는 정치적으로 우파도 좌파도 아니다. 가톨릭교회의 수도자이며 사제이니 굳이 말한다면 “예수파” 혹은 “그리스도파”이다. 개인적 성향은 보수적이다. 글쎄 누군가 “당신은 진보요? 보수요?”라고 묻는다면 답을 하는 사람들 중 80% 이상이 “나는 보수적이다”라고 답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지구상의 물리적 법칙 중에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관성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도 그와 비슷하다. 살아온 방식대로 사는 것이 에너지가 덜들고 쉽기 때문이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내 삶에 어떤 변화가 생기면 그 변화에 적응하느라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렇게 힘을 써야 하는데 누군들 변화를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어떤 “변화”는 힘이 들어가더라도 내 삶에 신선함을 주고 재미있을 수 있기에 그나마 우리 삶의 모습이 조금씩 변화하고 발전해 나아가는 것이다.(발전이라는 단어는 다시 돌아볼 필요는 있다) 또 한 가지는 생활의 불편함을 극복하거나 혹은 좀 더 나은 생활 방식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과학적, 기술적 발전으로 급격한 변화를 일으켜 인류가 아주 크게 진보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 전기, 인터넷, 스마트 폰 등은 인류의
12.3. 계엄선포 사태 후 환율 오름세와 국내 증시의 불안정성이 지속되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의 매도세도 진정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번 정국으로 외국인 투자자들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더 높게 인식하게 된 것 같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자본시장이 개방되자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주식에 본격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들이 한국의 자본시장을 대변하는 용어로 즐겨 써 온 말이 바로 ‘코리아 디스카운트’다. 말 그대로의 뜻은 한국에 본거지를 두고 있어서 실제 기업 가치에 비해 주식 가치가 저평가되고 있다는 거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남북 간 대립이나 지나친 수출의존형 경제구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1960년대에 경제개발을 추진함으로써 비로소 빈곤에서 벗어나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그런데 한국의 경제성장은 몇몇 대기업 재벌이 주도해왔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정경유착에 의한 재벌 주도의 경제 성장은 결국 한국의 잠재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즉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남북 분단의 지정학적 리스크뿐만 아니라 취약한 기업지배구조, 그에 따른 낮은 주주환원 등으로 그 원인이 확대된다. 기업지배구조란 기업 내부의
누구나 한번, 이라고 말 할 수는 없지만 몹시 힘든 과정을 거친 후에 떠올릴 수 있는 ’죽고 싶었다’ 는 마음을 종종 만난다. 간단한 자가보고식 질문을 통해서 혹은 오래된 병을 앓게 된 과정을 토로하는 중에 불쑥 드러난다. 구토와 어지럼 등으로 잘 먹지 못하는 배우자를 간병하느라 응급실에 수차례 방문했다는 할아버지는 부인의 치료를 위해 여러 곳을 수소문하다가 내원했다. 진료의 끝에 다다를 즈음 “·많이 힘드시죠” 라고 말씀드리니 “매일 죽고 싶지만 차마 이 사람을 두고는 죽을 수 없어서 하루 하루 버티고 있는 거지요”라고 말한다. 오래도록 잘 낫지 않는 신체화 장애로 내원한 한 30대 청년은 치료를 해가던 어느날 기억을 꺼내보인다. 엄마에게 홀대했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억. 열 살때 부모님이 이혼한 후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 가난, 학창시절 왕따의 경험, 직장에서의 따돌림의 고백이 이어진다. 죽고 싶었다고 말하며 울먹인다. 한 중년의 환자는 무너져 있는 몸과 마음을 원인을 묻다가 보니 얼마 전에 딸이 자살했다 한다. 위태한 결혼생활을 견디며 열심히 하루 종일 돈을 벌기 위해 일했다. 매일이 과로였다. 딸이 죽기 전날 유독 일이 많았다. 그 고
한자 ‘우(迂)’는 평상시에는 잘 쓰지 않는 한자다. '한자 자전'에서 이 글자를 찾으면 ‘멀다’라는 뜻으로도 나오고, ‘에돌다’라는 뜻으로도 나온다. 그런데 ‘멀다’라는 뜻이나 ‘에돌다’라는 뜻은 서로 멀지 않다. 사촌쯤 되는 친밀한 뜻이다. ‘에돌다’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다시 찾아보면, ‘곧바로 나아가지 않고 멀리 피하여 돌다’로 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迂)’가 지닌 ‘멀다’라는 뜻에는 단순히 거리가 멀다는 뜻보다는 그 어떤 대상을 멀리 두고 피해 가려 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 그런 뜻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회(迂回)’라는 말이 떠오른다. 곧바로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가는 것이 ‘우회(迂回)’이다. 이 한자어에 대응하는 고유어가 ‘에돌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우(迂)’가 품고 있는 뜻, 즉 ‘곧바로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가는’에 담긴 인생론적 의미는 간단치 않다. 우리가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곧바로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가게 되는 경우는 많다. 그것이 나의 뜻이었던가. 그런 결정을 내가 확실히 내렸던가. 딱히 그렇지도 않다. 그렇게 보면 ‘우회의 인생길’은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하지 못하는 ‘운명의 길’인지도…
한 해가 저문다. 벅찬 마음으로 문을 열었던 2024년. 새해 첫날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손수 제작한 연하장(年賀狀)을 국내외 친지·선후배·동료들에게 보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시간·거리·비용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을 글로벌 IT문명의 이기(利器)인 소셜 미디어(SNS)를 통해 그리 힘들지 않게 새해 인사를 보냈던 것이다. 연하장의 배경은 재외동포재단의 제주 근무 당시 찍었던 사진들 중에서 정성껏 골랐다. ‘새로운 날의 이미지’를 물씬 느끼게 할만한 것으로 한정했다. 한라산 등정 중에 짝었던 멋진 설경(雪景) 사진과 서귀포시 법환동 해안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범섬이 담긴 제주 바다 사진이 유력 후보였다. 승자는 남쪽 바다에 은은히 담긴 아침 서광(曙光)이었다. 문제는 연하장에 어떤 문구를 담을 것인가였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가슴에서 우러나는 문장을 흰 종이 위에 자필(自筆)로 써내려갔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갑진년 새해, 자유와 평화와 번영의 선한 기운이 이 땅끝에서 저 땅끝까지 두루두루 퍼져나가 지구촌 모두가 행복하길 기원합니다”라는 인사에는 전쟁과 기근, 질병과 분쟁, 시기와 질투, 다툼과 미움, 고소와 고발,…
2024년의 겨울, 대한민국 국민들은 내란 소요가 일어난 현장에서 또는 미디어를 통해 역사를 보았다. SNS와 유튜브 생중계를 통해 계엄령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잠 못 이루던 그날 밤, 미디어는 전 국민을 역사의 기록자로 만들었다. 미디어가 시민에게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는 미디어 연구자라면 그날의 현상에 관해 이런 질문들을 던질 것이다. 계엄령 관련 정보를 접하기 위해 이용한 미디어가 이용자의 정치 태도와 참여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미디어 연구는 미디어가 일반 시민의 인식과 태도에 영향을 미치며, 정치 엘리트가 전략적으로 미디어를 활용할 것이라 전제한다. 그러한 까닭에 정치 엘리트는 시민이 접하는 미디어와 정보를 통제한다. 언론 보도를 정정하려 하고, 심의를 통해 특정 정보에 대한 접근을 차단한다. 물론, 민주주의를 위해서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는 그간 주목하지 않았던 중요한 문제를 발견하였다. 당혹스럽게도 대통령과 그 주변 인물들은 계엄령이 그들이 내릴 수 있는 가장 정의롭고 ‘합리적’인 결정이라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합리성’은 도대체 어떻게 구성된 것인가? 국민에게 총구를 겨누는 극단적 결정을…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사이트를 접속하면 각양각색의 섬네일(thumbnail)이 시선을 끌며 클릭을 유도한다. 막상 섬네일을 클릭하면 기대하는 내용과는 다르다. 직설적으로 언급하면 가짜뉴스(fake news)나 거짓 내용으로 클릭 장사한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속이는 사람도 속임 당하는 사람도 익숙해져 별다른 느낌도 없다. 이미 가짜나 거짓에 대한 불감증은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민족(異民族)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민족’이라 하여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매스컴에서는 가짜뉴스가 판치는가 하면, 진실을 보도하는 미디어(media)가 오만불손한 권력자들에 의해서 반국가적 세력으로 몰려 오히려 매도당하는 요즈음이다. 그래서 국민은 언론도 정부 당국도 신뢰(trust)하지 않는다. 신뢰는 사회적 자본인데, 신뢰하지 못하고 불신함으로써 치려야 하는 사회적 비용은 클 수밖에 없는 게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풍조(不信風潮)가 난무한 작금을 살아가야 하기에 현대인이 갖춰야 하는 주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가 ‘정직’인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정직에 대한 교육부터가 문제투성이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그럴듯하게 변명하거나 정당화하고 합
같지 않습니다. 아닌 건 어떻게 해도 아닙니다. 넘나들기 쉽도록 설치한 사거리 신호등이 아닙니다. 이리저리 옮겨 가도 무방한 온탕(溫湯)과 냉탕(冷湯)이 아닙니다. 선택 장애 손님을 위한 메뉴, 이를테면 ‘양념 반 프라이드 반 치킨’은 더더욱 아니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같을 수 없습니다. 다름과 틀림 역시 그렇습니다. ‘세상’이라는 울타리 속에 존재하지만, ‘세상’이라는 울타리를 둘로 가르는 ‘낮’과 ‘밤’처럼 별개의 존재입니다. ‘세상’이라는 울타리를 ‘그릇’으로 좁히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밥그릇도 국그릇도 모두 그릇입니다. 다만 그릇 안에 담는 음식에 따라 쓰임새가 다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밥그릇과 국그릇은 생김새와 쓰임새가 서로 다를 뿐이지 틀린 게 아닙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라는 별에 사는 사람은 모두 다릅니다. 이름이 다르고, 모습이 다르고, 국적과 성별이 다르고, 말투와 성격이 다릅니다. 차이(差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게 차별(差別)입니다. 출신과 학벌과 성(性)과 인종에 대한 차별이 거기에서 싹텄습니다. 다름을 올곧게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틀림을 제대로 규정하지 못해도 심각한 문제가 일어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