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사에서 본 글이다. 쥐들의 수명이 짧은 것은 심장 박동 수에 있다. 거대한 코끼리의 경우 1분에 심장이 25번 뛰지만, 작은 생쥐는 1분에 600번이나 뛴다. 생쥐는 겨우 2~3년밖에 못 살고 코끼리는 75년까지 살지만, 평생의 심장 박동 수는 동일하게 약 15억 회라는 것이다. 이는 생명체의 심장박동수와 수명과의 관계성을 설명한 말이다. 독수리의 평균수명은 40년인데 일부는 혁신을 통해 새로운 30년의 수명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38세쯤에 결심을 하고 한겨울 설산 정상암벽에 올라가 무거워진 깃털을 뽑아내고 부리를 바위에 쪼아 빼버리며 발톱마져 벽면을 긁어 뽑아낸다는 것이다.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추위를 이겨내면 부리가 나고 발톱이 자라고 새로운 깃털이 생겨나서 제2의 생을 이어간단다. 그래서 독수리 중 일부는 70년을 산다고 강의에서 들었다. 革新(혁신)이란 가죽을 부드럽게 한다는 말이다. 혁신하려면 고통이 따르고 시간이 걸리며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한다. 요즘 자주 보는 방송 중 하나가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다. 개그맨 2명이 교대로 수일간 체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들은 대부분 사업실패, 건강악화 등 어려운 여건에서 산속에 들어
BTS의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그래미상 후보에 선정되었고 다이너마이트는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하는 등 계속 상위권에 올라있다. 명실상부한 월드 스타다. 심지어 극우적인 발언을 쏟아냈던 일본의 전 오사카 지사 하시모토는 자녀들이 하루 종일 BTS 노래를 듣는다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다. 팬덤 현상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BTS의 팬클럽인 아미(Army)는 전 세계에 조직되어 있으며 매우 활동적이다. 영국의 아미 회원들은 BTS의 웸블리 공연 때 자발적으로 홍보를 하고 질서유지에 나서는 등 헌신적인 봉사를 했다. 당연히 대중문화 평론가나 연구자들은 BTS 현상을 좇아 분석하느라 바쁘다. 현상을 분석한다는 것은 눈으로 본 것(appearance)에 대해 본대로 기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실체의 한 조각을 볼 뿐이고, 어제와 오늘이 다를 수 있다. 더구나 사람마다 다르게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직접 본 것에 대한 신뢰가 높기 때문에 그걸 실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보이는 것은 실재(實在)가 아니다.’ 라는 문제의식도 없다. 현상과 실재가 동일하다면, 사유도 분석도 연구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대중
세모(歲暮)다. 이틀 후면 미증유의 고통과 어지러움으로 점철된 경자년 한 해가 저문다. 올 한 해도 많은 시(詩)가 쏟아졌다. 시의 언어는 달리 공감의 언어다. 나 아닌 남의 처지를 살펴 아픈 이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의 언어다. 그런 측면에서 가황(歌皇) 나훈아가 작시한 ‘테스형!’이 올해의 최고의 시가 아닐까. 철학자 소크라테스(BC 470~339년)를 불러내 ‘세상이 왜 이런지. 왜 이리 힘이 드는지’를 물었다.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또 왜 이래/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나훈아가 직접 지은 테스형! 노랫말의 일부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가 대한민국 국민들 가슴팍에 대답을 새겨준 듯하다. 분열과 갈등에 모두 지쳐 있는 만큼 나훈아의 일갈(一喝)은 큰 울림을 줬다. 요즘 국민들의 눈은 ‘남의 나라 코로나 백신접종’에 쏠리고 있다. 1년 내내 엄청난 고통을 겪어 온 국민들 입장에서 이보다 더 절실한 게 없기
영월 동강을 끼고 걷다 올려다 본 깎아지른 바위의 민낯이 영락없는 도깨비 얼굴이다. 도깨비 뿔 삐딱하게 박은 채 우글쭈글하게 인상을 찡그린 모습이 마치 강줄기를 호령하듯 쩌렁쩌렁 호탕한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도 보여 엉겁결에 두 손 모아 합장을 하고 말았다. ‘비록 코로나19의 기세에 눌려 도망쳐왔지만 어쨌든 힘나게 해주세요. 건강하게 해주세요. 제발 살맛나게 해주세요.’라며 빌고 또 빌어본다. 도깨비를 떠올린 순간 나는 왜 겁부터 났을까, 아니 왜 무언가를 빌어볼 생각을 했을까. 그건 아마도 어린 날의 경험과도 관계가 있을 듯 보인다. 억지떼라도 쓰는 날이면 어른들은 여지없이 ‘도깨비가 잡아간다.’라며 겁을 주기도 하고 그림책을 읽어주거나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때도 도깨비 목소리는 늘 무섭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들려주었으니 도깨비라는 존재가 무서웠을 수밖에. 또한 동화 속 도깨비는 말만 잘하면 도깨비방망이로 대궐 같은 집도 지어주고 보물도 만들어주고 부자도 되게 해주고 나쁜 사람 벌까지 줄 수 있었으니, 나에게 도깨비는 어쩌면 두려우면서도 큰 힘을 가져 신비스러운 이중적인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사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신의 것도 아니고 인간의 것도 아
구하기 어렵다는 그의 공연 표를 구해서 잠시 좋았다. 얼마 후 공연이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가요란 3분 안에 인생의 의미를 노래하는 장르이다. 인기 가수와 인기곡에는 그 이유가 분명히 있다. 나훈아는 1966년에 데뷔하여 지금도 활동하는 가수로 단연 톱클래스에 자리한 가수이다. 그의 노래는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가 않는 노래들이다. 한국의 한의 정서를 신바람 나게 풀어내는 그의 미성에는 중독성이 있다. 그의 구성지게 넘어가는 절묘한 창법은 작곡의 완성을 마감한다. 누구나 열창을 하지만 그저 부르는 노래가 아닌 노래를 음미하며 자신 및 팬들의 감정을 끌어내는 그의 능력은 탁월하기만 하다. 이른바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내가 꼽는 그의 최고의 노래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곡이다. 그러나 그 노래를 자주 부르면 눈물을 쏟을 수도 있다. <고향역>은 원곡이 <차창에 어린 눈물>인데 당시 금지곡이 되었다가 묻히기가 아까워서 고고풍으로 재편곡해서 그의 히트곡이 되었다. <두 줄기 눈물>도 자주 부르길 권하지 않는다. 분명 눈물을 흘리게 돼있다.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역시 부르다 보면 눈물을
2020년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코로나로 시작해 코로나로 마감하는 올해는 우리의 삶을 통째로 바꿔 놓았다. 그리고 더 심화된 양극화의 음지에서 한줄기 햇빛을 향한 ‘소리없는 아우성’이 곳곳에서 메아리치고 있는 세밑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우리 정치권은 ‘여의도 산성(山城)’안의 딴 세상에 살고 있다. 4.15총선에서 국민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무릅쓰고 28년만에 최고의 투표율(66.2%)로 성의를 표했지만 돌아온 것은 그저 공허함이다. 소위 ‘추-윤 갈등’(추미애 법무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은 코로나가 그나마 조금 남겨놓은 것 조차 모두 앗아간 느낌이다. 최고의 검객(율사 출신)들이 뿜어내는 장풍에다 여의도 응원단의 박수 소리에 산성 밖의 초간삼간 무너지는 소리는 떨어지는 낙엽 정도나 될까. 박수만쳐도 일자리 걱정없고 수입도 줄어들 걱정없다. 티끌이 드러나 좀 쑥스러울때 이내 상대쪽에서 대들보가 나와주고, 여하튼 좀 심하다 싶으면 꼬리자르기(탈당 등)하면 몸통을 보존하는데 문제가 없다. 때만 되면 혁신한다 물갈이한다 요란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그만이다. 우리 정치...방법은 없는 것일까. “내 기억의 용량은 무한하기 때문에 당신이 말한 것을 잊거나 말을…
코로나19와 일상의 변화 코로나19, 다시 대유행이 왔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 닥친 2월의 변화는 12월이 된 지금 창의적인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모임과 만남의 문화가 바뀌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온라인 소통과 디지털 공동체가 각광받겠지만, 그에 비례해서 작은 동아리와 사랑방의 가치 역시 부상한다. 소중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항상 누려왔던 모임과 만남은 지금 사회적 결핍이 되었다. 사이버 연결상태의 과잉은 피로를 동반한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SNS와 스마트폰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도 않고 삶을 해방시키지도 않는다. 화상회의가 늘고, 스마트폰 전화통화가 많아지고, 업무가 채팅방 대화창에서도 전개되는 것을 바라는 이는 많지 않다. 업무는 편해졌지만, 쉬는 시간까지 그 업무를 온라인으로 해서야 되겠는가, 자문들을 하게 된다. 스마트폰으로 이동 중에 영화를 즐기고 인기 드라마를 시청하는 횟수를 늘이고 싶어 하지만, 인터넷으로 효율적인 일처리를 하고 대소사를 피곤하게 챙기는 것에 대해서는 복잡한 심경을 토로한다. 우리가 디지털 소통장비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일을 할 자유를 얻었다고는 생각하지만 일상 속에서 구속되지 않을 자유는 놓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석탄발전소의 문제는 연료가 석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석탄 발전소의 진짜 문제는 발전 시스템이 너무 비효율적인데서 비롯된다. 발전 시스템의 속을 들여다 보면 4 단계 에너지 변환 과정을 거쳐 연료인 석탄으로부터 전기가 생산된다. 첫 번째는 석탄을 산소와 결합시키는 화학 과정을 거쳐 열을 발생 시키는 화학 에너지 변환이다. 두 번째는 이렇게 만들어진 열을 물에 가열하여 물의 상태를 압력이 높은 증기로 만들어내는 열 에너지 변환이다. 세 번째는 이 고압의 증기를 이용하여 터바인을 돌리게 하는 운동 에너지 변환이다. 네 번째는 터바인에서 생성한 운동 에너지를 전자기 유도 장치를 돌려서 전기를 만들어내는 전기 에너지 변환이다. 연료인 석탄의 고유의 에너지는 최종 생산물인 전기로 변환 되는 과정에서 손실이 발생한다. 대부분은 열에너지에서 운동에너지로 바뀌는 과정에서 손실이 발생하는데 그 양이 약 65%정도이다. 즉, 오직 35%의 석탄의 원래 에너지만이 전기로 변환된다는 것이다. 석탄의 연소과정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량의 65%는 어디에도 사용되지 않는 상태의 에너지 때문이라는 것이다. 석탄 발전소뿐만 아니라 모든 대형 발전소는 열에너지에서 운동에너지로 바뀔 때 이러
1만시간의 법칙이 있다. 한 가지 일에 1만시간을 투자하면 무엇인가를 이룩하게 된다, 일을 마스터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1만시간을 8시간으로 나누면 1250일, 42개월, 해수로는 3년반쯤 된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3년공부’라고 말하나보다. 3년간은 노력해야 이룩한다는 말로 풀어본다. 용인시 명소 두 곳을 다녀왔다. 백암면에 가서 순대를 샀다. 아이들 입맛에 맞는단다. 평소 아파트 토요장에서 사 먹는 순대와는 크게 다르다. 명함을 보니 70년 전통의 원조 백암순대란다. 70년이면 이 식당에서 1950년부터 순대를 팔았다는 말이다. 그간 여러명의 딸과 며느리와 아들과 사위가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재료를 썰고 삶고 손질한 순대에 적당량을 넣어서 제대로 삶아야 이 제품이 나오는 것이리라. 순대에 소를 넣는 그 예민한 감각은 시어머니에서 며느리와 딸에게 십수년 단위로 전해졌을 것이다. 강하면 불량김밥처럼 옆구리가 터지고 소(재료)의 양이 부족하면 삶내어 썰었을때 제 모양이 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간 곳은 현대적인 빵집이다. 그냥 10평짜리 매장이 아니라 200평이 넘어보이는 건물 1층에 제과공장, 매장, 식탁이 있고 중앙계단으로 올라가
수많은 데이터가 차곡차곡 축적되고 그 정보의 유통도 빛의 속도처럼 빨라지는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들처럼 노출이 많은 경우 자신의 언행으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는 사례가 많다. 최근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새로 입각하려는 장관 후보자가 과거 발언이 문제가 돼 곤욕을 치르고 있다. 우리는 흔히 “없는 데서는 무슨 말을 못하냐”는 말을 하곤 한다. 인간의 본성이 어느 정도는 그렇게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문제는 비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공인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 누리는 힘이나 영향력만큼 일거수일투족이 역풍으로 돌아올 때가 있다. 정치권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사자성어를 꼽으라고 하면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을 빼놓을 수 없다. 뜻하지 않게 과거의 부적절한 행적이 드러나면 피해나가는 전가의 보도다. 왜 우리 사회에 이런 일이 전통처럼 반복되는 것일까. 동양의 고전인 ‘대학’에 신독(愼獨)이란 말이 있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언행을 조심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보통 공개된 장소에서는 주위를 의식해 가능하면 조심하고 법과 원칙을 지키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