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달 /안준하 당신이기에 시리도록 사랑하고 가슴 아파했다 하얗게 살아 동심원처럼 퍼져 가는 인연 질기고도 길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빛바랜 낮달 참 곱기도 하다 ■ 안준하 1966년 강원도 평창 출생. 전 강원관광대학교 겸임교수, 현 세경대, 문경대 겸임교수로 있다. 1996년 월간 『한국시』로 등단해 한국문인협회 충주지부, 한국자유시인 협회, 한국시인협회 회원으로 있다.
지금 세계는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본래 보이지 않는 존재물에 공포를 느껴왔다. 예를 들어 잡귀 잡신이 그러했다. 귀신은 보이지 않으니 조금만 부정한 일을 저지르면 재앙을 불러온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귀신을 몰아내는 온갖 비방술에 애를 썼다. 문명이 발전하고 첨단기술이 만연한 오늘날에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앞에 국력을 소모하고 있다. 정체는 알고 있으나 그걸 막을 방도가 없다. 기껏 할 수 있는 게 마스크를 쓰고 바깥출입을 삼가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도 거리를 두고 만나야 한다. 이 고약한 질병 앞엔 강대국도 맥을 못 쓴다. 어떤 강대국의 지도자도 이번 사태를 잠재울 수 없었다. 영웅이 필요한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똑똑하고 영리하며 유능한 사람이 우매한 민중들을 인도하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지금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이다. 가장 안전한 길은 자신이 자기를 지키는 길밖에 없다. 기업도 나라도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 이럴 때 생각나는 우화가 있다. 어느 왕국에 나이 많은 임금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임금은 한 신하를 거느리고 정원을 걷고
새끼를 낳고 기르기 위한 남극의 황제펭귄 부부의 노력은 눈물겹다. 암컷이 알을 낳고 몸에 먹이를 비축하기 위해 바다로 떠나면 수컷은 발 위에 있는 주머니에 알을 넣고 품는다. 알을 품고 있는 기간이 무려 64일 안팎이다. 그동안 수컷은 수분 보충을 위해 눈(雪)을 먹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섭취하지 않는다. 워낙 혹독한 날씨여서 잠시만 자리를 벗어나도 알이 얼어 터지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 때문에 수컷 황제펭귄은 부성애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진다. 새끼가 부화하면 수컷 펭귄은 자신의 위 속에 있는 소화된 먹이를 토해서 먹인다. 새끼가 부화한 지 열흘 정도 후에 암컷이 돌아와 같은 방식으로 먹이를 주고, 이후로 수컷과 암컷은 번갈아 가며 하나는 새끼를 품고 다른 하나는 바다로 나가 먹이를 비축해 돌아온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속담이 있다. ‘자식 둔 부모는 알 둔 새 같다’는 말도 있다. 오랫동안 익히 들어온 이런 말들을 우리는 굳건히 믿고 살아왔다. 대개의 부모가 그 이치에 딱 맞는 따사로운 모습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귀한 상식이 가차 없이 무너지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비극들이 연거푸 일어났다. 여행용 캐리어에 의붓아들을 가
공무원을 향한 민원인의 폭언·폭행 범죄가 매년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경기도가 18일 도청 민원실에서 이른바 ‘특이민원’ 발생상황을 대비한 모의훈련을 실시한다. 이번 훈련은 상황이 발생하면 청원경찰이 현장 대처를 하고, 비상벨을 호출하면 경찰관이 출동해 가해 민원인을 신속히 제압하는 등 실제상황을 연출할 예정이다. 비상벨 호출 등 초기상황 대처반과 다른 민원인 2차 피해예방을 위한 민원인 대피유도반 등으로 구성된 비상상황대응 전담반도 운영한다. 모의 훈련 내용을 보면 느낄 수 있겠지만 민원 공무원들은 막무가내 민원인들의 폭력으로부터 노출돼있다. 지난 2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사회복지과에서 남성 민원인이 사회복지 담당 여성 공무원의 얼굴을 때려 기절시키는 영상을 본 국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해자는 “긴급생계지원금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으니 당장 내놓으라”며 여성 담당자에게 욕설과 함께 행패를 부리다가 주먹질을 했고 이를 맞은 여성공무원은 실신한 상태로 넘어져 머리를 바닥에 부딪혔다. 단지 담당자 안내를 따라달라고 말했을 뿐인데 말이다. 자신이 때린 여성공무원이 실신해 있는 상황에서도 가해자는 태연하게 아이스크림을 먹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국민들을 분노케…
21대 국회가 또다시 ‘정치력 부재’의 초라한 현주소를 드러냈다. 설마 이렇게까지 할까 싶었는데, 더불어민주당이 15일 국회 본회의에서 18개 상임위원회 중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등 6개 상임위 위원장을 단독으로 선출했다. 시급한 국정과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여당의 조급증이나 절대 소수인 통합당의 막막한 처지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런 시작이라니 참담한 일이다. 제1야당을 배제한 단독 원(院) 구성은 1987년 이후 약 33년 만에 처음이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15일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서 “21대 국회의 원 구성에 대해 민주당의 뜻은 분명하다. 단독으로라도 21대 국회를 일하는 국회로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정권이 바뀐 다음의 여야 행태는 ‘개구리가 올챙이 적 기억 못 한다’는 말을 새록새록 떠오르게 한다. 그 이중 논리는 그릇된 관행을 고친다거나, 법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는 명분론을 앞선 고질적 모순이다. 민주당이 야당이었던 시절을 회고해 보자. 지난 2009년 당시 노영민(현 대통령 비서실장) 대변인은 이명박 정부를 향해 “몇 되지도 않은 야당 몫의 상임위원장까지 독식해 의회 독재를 꿈꾸는 것인가”라고 비판했었다. 2012년에도 당시 우원식 대변인
한동안 신조어 중에 ‘샐러던트(Saladent)’ (샐러리맨 + 스튜던트)라는 게 있다. 공부하는 직장인 이라는 의미의 합성어로, 출·퇴근 시간 등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휴대전화로 영어공부를 하는 ‘모잉족’ (모바일잉글리시족)과 ‘직터디족(직장인 재테크 스터디족)’들이 급증하고 있다.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직장인들 중 리스크 관리를 위해 그동안 관심을 두고 있던 분야나 장래를 위한 투자의 방법으로 공부를 선택하는 샐러던트를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다. IMF 이후에 우리의 40대에겐 ‘사오정’ 을 비롯하여 ‘낀 세대’, ‘이름 없는 40대’, ‘철도 들기 전 망령 난 세대’ 등 패배적이고 자조적인 명칭이 부여되어 왔다. X세대, N세대와 발맞추어 한때나마 중년의 샌드위치 성격을 표현하는‘H세대’ 라는 명칭 역시 우리 사오십 대들의 자화상을 잘 설명하고 있다. H세대란 지금껏 살아 온 날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추 비슷한 인생의 중간에 서 있는 세대이자, 보릿고개, IMF 위기의 어려움을 어느 누구보다도 제대로 겪어낸 세대, 더불어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는 세대이다. 컴퓨터, 외국어 회화 등을 뒤늦게 익히느라 복잡하고 분주한 머리로 무
1975년 초여름날에 시골마을에 쇳소리가 울려퍼진다. “신 이장님께 알립니다. 내일 오전 11시에 면사무소에서 이장 회의가 있다고 면사무소 담당서기의 연락이 왔습니다.” 잠시후에 다시 울려퍼지는 스피커 소리. “네네, 이장님 잘 알겠습니다.” 이 소리는 화성시 어느 시골마을 구 이장장님과 신 이장님이 면사무소 긴급 연락사항을 주고받는 동네 마이크 대화다. 고향마을에 우체국 교환전화기 한대가 배정되었다. 당연히 동네 이장님 댁에 설치되었고 동네 사람들의 바깥세상 연락처가 되었다. 도시로 나간 큰 아들이 시골집 막내에게 연락을 하고 시골에 사시는 어머니가 도시로 나간 아들딸에게 할 말이 있으면 이장님댁에 간다. 이장님이 우체국으로 연결해서 시외전화를 신청해준다. 그런데 이처럼 소중한 역할을 하시던 이장님이 사직했다. 당연히 동네 마이크는 신 이장님댁으로 이전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전화기는 먼저 구 이장님의 개인소유였다. 그래서 구 이장님 댁에 동네 마이크를 하나 더 놓기로 했다. 소나무에 매달린 스피커는 4개 그대로인채 마이크시스템을 하나를 더 들인 것이다. 그래서 동네로 걸려오는 전화는 먼저 이장님이 받아서 동네에 알려주는 역할을 하면서 그중에 신임 이장님께 오
시간은 나의 생을 자꾸 갉아먹는다. 잠자리에 들어서 하루의 일이 정리되지 않아 뒤챌 적에 뜨악 뜨악 소리를 내는 벽시계는 어둠 속으로 수명을 자꾸만 끌고 간다. 시계가 없으면 시간관념이 덜할 터인데 금전을 들여 사다 놓고 생이 짧아지는 소리를 태연히 듣고 있으니 아직은 나이에 대한 의미를 따질 때가 안 되었나 보다. 생명도 없는 시곗바늘의 방향에 따라 분주히 움직이는 나의 생활이 실속을 차릴 때도 있지만, 대개는 안갯속을 허우적거리다가 빈손만 쥐고 만다. 어느 회화전 초대에 기꺼이 응했다. 그림에 문외한이라서 걸려있는 작품이 어마어마한 가치가 부여되었으리라 여기면서도 나와는 동떨어진 세계로 느껴진다. 그림 중에 새장 밖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새는 눈동자가 죽어있어서 날아갈 곳을 찾지 못하는 모습으로 보이고, 반원의 철제 위에서 꼬챙이에 꽂혀있는 생선 뼈의 조각은 주제인 「슬픈 잠」이 아닌 고철 그 자체로만 보인다. 꾀나 심각한 표정으로 감상하는 무리 속에서 나는 공간 속에 떠 있는 이방인이 되었다. 그림을 볼 줄 모르는 부끄러움보다는 현대에서 소외되는 지독한 외로움이다. 외로움을 감추며 휘적휘적 걷는데 붉게 타는 화폭 앞에 걸음이 멈추어졌다. 온통 붉은 바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