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 감독의 영화 ‘4등’은 스포츠계의 폭력문화를 소박하지만 깊이 파고든 작품이다. 두드려 맞으면서 악몽의 수영 선수생활을 한 코치 광수는 초등학생 준호를 가르치면서 똑같이 폭력수단을 동원한다. 아이가 코치에게 매를 맞는 줄 알면서도 엄마가 그것을 당연시하는 장면은 우리 주변에 흔한 극성 엄마의 모습이다. 영화 ‘4등’에서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매를 맞아야 하는 연습을 견디다 못해 도망을 치기까지 한 준호가 동생 기호에게 똑같은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다. 폭력은 그렇듯 소리 없이 대물림된다. 매번 4등밖에 못하던 준호가 광수의 혹독한 훈련으로 2등을 하자 엄마는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준호는 엄마에게 묻는다. “내가 매 맞아도 1등 하는 게 좋아?” 이 질문 한마디에 ‘엘리트 체육’ 바이러스에 속수무책 감염된 대한민국 스포츠의 병폐가 다 들어있다. 대한민국은 과연 ‘스포츠 선진국’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 아니다’다. 선진적인 ‘사회 체육’ 정책으로 온 국민이 행복해야 할 21세기에 우리는 결코 ‘스포츠 선진국’이라는 수식어를 달 자격이 없다. 우리는 몇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후진국형, 독재 국가형 스포츠 정책을 하고 있다. 온 국민이 스
"안 돼! 우리 애들 하나라도 건드리면 다 죽여버릴 거야!" 길을 막아선 데모대 앞쪽으로부터 여성의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차의 다섯 칸쯤 앞에 있던 승합차 운전자가 클랙슨을 신경질적으로 서너 번 울리면서 운전석 차창 밖으로 투실투실한 주먹을 내밀어 팔뚝질을 해대더니 이내 포기했는지 잠잠해졌다. 길은 금세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와! 저년 봐라! 홀딱 벗었네? 완전히 미친년 아냐? 개새끼들하고만 살더니 아주 개가 돼버린 모양이네! 물러가라, 이 개 같은 년아!” 데모대 안에서 누군가 걸걸한 목소리로 외치듯 욕설을 퍼대는 사이에 킥킥거리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냄새나서 못 살겠다, 똥개들을 몰아내자’ ‘주택가 한복판에 개 농장이 웬 말이냐?’ 이면으로 보이는 플래카드 글씨가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핸들을 꺾어 오른쪽 나지막한 보도블록 위로 개구리 주차를 마치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데모대는 어림하여 이백여 명쯤으로 헤아려졌다.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두 명의 정복 경찰관들이 보였다. 여성들이 대다수인 사람들을 우회하는 동안 앞쪽에서 여러 마리의 개들이 왈왈 짖어대는 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어수선한 군중 앞쪽에는 뜻밖에도 꽃무늬 비키니 차림의
인도의 경면왕이 장님(시각장애인)들을 모아 코끼리를 만져보게 했다. 그리고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각자 말해보라”고 물었다. 그러자 상아를 만져본 이는 ‘무’, 귀를 만져본 이는 ‘키(곡식 까부는 도구)’, 코를 만져본 이는 ‘절굿공이’, 배를 만져본 이는 ‘항아리’, 꼬리를 만져본 이는 ‘새끼줄’ 같다고 대답했다. 불교 경전 열반경(涅槃經)에 나오는 군맹무상(群盲撫象) 이야기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라는 말의 연원이다. 일제강점기라는 불행한 역사를 겪은 우리에게는 그 참혹한 역사를 보는 시각에 따라서 전혀 다른 관점에서 규정하고 평가하는 학설들이 있다. 그 중에도 소위 ‘학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일제의 침략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그 역사관에다가 모든 역사적 견해를 꿰맞추는 편협한 학문 양식이 존재한다. ‘식민사학(植民史學)’과 ‘식민지근대화론(植民地近代化論)’이 바로 그것이다. 식민사학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출신 친일학자들이 해방 후 주요 대학 역사학과와 역사편찬위원회 등 역사 관련 국가기관, 중등국사 교원양성소까지 독점해 장기간 축성한 망국의 친일사학이다. 이른바 ‘강단사학자’로 통칭하는 그들은 해방 후 지금까지 오랫동안 독점해온 조직과 나라
미국 서부영화는 대개 한 명의 빠른 총잡이가 다수의 악당과 싸워 이기는 구조로 돼 있다. 한두 번 보면 식상할 만도 한 단순한 패턴인 이 서부극은 오랫동안 세계를 열광시킨 미국 영화산업의 총아였다. 뻔한 결말에도 관객들이 연속해서 찾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존 웨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걸출한 주연 배우들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악당들을 시원하게 물리쳐주는 주인공에게서 느끼는 ‘대리만족’일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참모로서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지낸 존 볼턴의 ‘그 일이 일어났던 방’이라는 자서전 한 권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볼턴은 코로나19 창궐 이후 가뜩이나 코너에 몰리고 있는 트럼프에게 연일 직격탄을 날리고 있고, 트럼프 역시 카운터펀치를 노리며 전전긍긍이다. 볼턴은 그동안의 백악관 경험담을 토대로 트럼프가 얼마나 엉터리 지도자인지를 까발리는 데 열중하고 있다. 사적인 가치 기준과 개별적인 오감을 기반으로 작성하는 게 회고록인 까닭에 볼턴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볼턴의 폭로나, 트럼프의 반격에서 우리를 짜증스럽게 하는 것은 세계정세의 엄중함에 걸맞지 않은 정책 결정
새끼를 낳고 기르기 위한 남극의 황제펭귄 부부의 노력은 눈물겹다. 암컷이 알을 낳고 몸에 먹이를 비축하기 위해 바다로 떠나면 수컷은 발 위에 있는 주머니에 알을 넣고 품는다. 알을 품고 있는 기간이 무려 64일 안팎이다. 그동안 수컷은 수분 보충을 위해 눈(雪)을 먹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섭취하지 않는다. 워낙 혹독한 날씨여서 잠시만 자리를 벗어나도 알이 얼어 터지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 때문에 수컷 황제펭귄은 부성애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진다. 새끼가 부화하면 수컷 펭귄은 자신의 위 속에 있는 소화된 먹이를 토해서 먹인다. 새끼가 부화한 지 열흘 정도 후에 암컷이 돌아와 같은 방식으로 먹이를 주고, 이후로 수컷과 암컷은 번갈아 가며 하나는 새끼를 품고 다른 하나는 바다로 나가 먹이를 비축해 돌아온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속담이 있다. ‘자식 둔 부모는 알 둔 새 같다’는 말도 있다. 오랫동안 익히 들어온 이런 말들을 우리는 굳건히 믿고 살아왔다. 대개의 부모가 그 이치에 딱 맞는 따사로운 모습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귀한 상식이 가차 없이 무너지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비극들이 연거푸 일어났다. 여행용 캐리어에 의붓아들을 가
여우가 두루미를 자신의 식사에 초대했을 때, 자기만 생각하고 음식을 접시에 담아 내오자 부리가 긴 두루미는 그것을 먹을 수가 없었다. 두루미는 그 일을 마음속에 새겼고, 여우를 식사에 초대해 일부러 호리병에 음식을 담아 내와 여우가 음식을 먹지 못하게 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유명한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다. 요즘 21대 국회 상임위원회 구성을 놓고 여당 더불어민주당과 제1야당 미래통합당이 벌이는 하염없는 샅바 싸움을 보노라면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가 떠오른다. 여야가 상대방에게 못 먹을 조건을 서로 내놓고 레코드판 틀어놓은 듯 딴 주장만 거듭한다. 여야 정치권의 가없는 드잡이질은 가뜩이나 힘든 국민에게 짜증을 부른다. 여당은 야당 시절 기억 안 하고, 야당은 여당 시절 망각한 척 철면피 치매 놀음들을 벌이니 시쳇말로 웃프기 짝이 없다. 고려대 철학과 조성택 교수의 말을 빌리면 “대화란 ‘나의 옳음’을 잠시 유보하고 ‘타인의 옳음’에 대해 숙고하는 과정이며, 질문을 통해 차이의 본질을 이해하고 더 큰 ‘옳음’을 모색하는 과정”이라는데, 우리 정치판에선 씨도 안 먹힐 공자님 말씀이다. 이처럼 여야 정치권 인사들을 허구한 날 우습고도 슬픈 앵무새 흉내에다가
“새누리당의 대선 공약이었던 134조 원의 공약 가계부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다는 점을 반성한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임이 입증되고 있다” 2015년 4월 8일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울려 퍼진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은 이 나라 정치사에 새로운 변곡점을 잉태한 역사적 장면이었다. 유 원내대표는 나아가 “현재 우리의 복지는 ‘저부담-저복지’여서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고 공동체의 붕괴를 막기에 크게 부족하다”고 진단하고 “국내총생산(GDP)에서 국민 부담과 복지 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수준이 되는 것을 장기 목표로 정하자”고 제안했다. 연설이 끝나자 야당 의석에서도 많은 박수가 나왔다. 현재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으로 있는 새정치민주연합 유은혜 대변인은 “우리나라의 보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준 명연설”이라고 이례적인 호평을 내놨다. 그러나 그날의 연설이 유승민의 운명을 가르고, 나아가 박근혜 정권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분기점이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유승민은 그날 ‘진실’을 말한 죗값을 혹독하게 치르게 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정책전환의 도구로 활용해야 할 원내대표 유승민에게 터
사람이 얼마나 양심적인지를 측정하는 지수인 ‘도덕지능(MQ:Moral Quotient)’이라는 개념을 맨 처음 사용한 학자는 미국 하버드대학교 정신의학 교수인 로버트 콜스였다. 그는 저서 ‘아이들의 도덕지능’에서 MQ가 지능지수(IQ), 감성지수(EQ)와 더불어 인간의 성장에 또 하나의 중요한 지수라고 밝혔다. 콜스에 따르면 MQ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정보에 따라서 계속 변한다.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추가 기자회견을 바라보는 심사가 한없이 착잡하다. 마음고생이 역력히 드러나는 아흔두 살 할머니의 표정에는 짙은 슬픔마저 배어 나왔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일본군에 끌려가 형언하기 힘든 학대를 당하면서 시작됐을 한 여성의 참혹한 일생에 어찌하여 또다시 저런 억울한 일이 또 일어날까 싶은 안타까움이 말문을 막는다. 죽을 힘을 다해 거듭하고 있는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과 언론에 통해서 새롭게 밝혀지는 한국정신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불의·부도덕·불합리 의혹들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공룡처럼 권력화한 시민운동 단체가 그들 존립의 근거인 피해 할머니들에게 인간적 대우마저 하지 않았다는 절규는 참담하기 짝이 없다. 기부금을 거두는 모습을
계모 왕비가 마법의 거울에 묻는다.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아름답지?” 그러자 마법의 거울은 “왕비님도 아름다우시지만, 백설공주가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분노한 왕비는 사냥꾼을 시켜 공주를 죽이고 증거물로 심장을 가져오도록 명령한다. …1937년 미국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만든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라는 애니메이션 도입부의 한 대목이다. ‘볼록거울’이 문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실패도 그렇고, 미래통합당(새누리당)의 잇따른 선거패배도 마찬가지다. 최근 민심을 들쑤시고 있는 정의기억연대(정의연) 논란의 파장에도 ‘볼록거울’의 저주가 스친다. 아이러니하게도, 세력을 장악했다고 생각하는 인사나 집단은 어김없이 오만방자(傲慢放恣)의 역병에 걸린다. 그들에게 되돌아오는 죗값 또한 반드시 가혹하다. 아파트 경비원으로 살던 예순 살의 한 남자가 막냇동생뻘 되는 입주민 남자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해 억울하다며 목숨을 끊었다. ‘아파트 입주자’가 무슨 대단한 권력이라고 가해자는 힘없는 경비원에게 그런 고약한 슈퍼 갑질 행패를 저질렀을까. 고인이 남긴 육성 녹음 내용으로 유추하자면, 가해자는 최소한 방자한 가치관의 노예임이 분명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