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군청 본청 실내 안내판이 얼마 전 바뀌었다. 그런데 왠지 새것 같지 않고, 때가 묻은 것 같기도 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안내판 한쪽에 이런 문구가 있다. “이 안내도는 환경보호를 위해 플라스틱 폐기물을 업사이클하여 만들었습니다.” 이 문구를 보자 새 안내판이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알았고, 이어서 이전에 보도됐던 기사의 제목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한국, 플라스틱 쓰레기 배출량 세계 3위”, “1인당 섭취 미세플라스틱, 매주 신용카드 1장 분량”, “2025년 인천시 수도권 쓰레기 매립장 종료” 플라스틱으로 인한 환경 오염 문제는 이제 턱에 차 있다. 해양오염의 주범 중 한 나라로 우리나라가 거명되고, 미세 플라스틱은 우리의 생명까지도 위협하고 있다. 더구나 편하게 갖다 버리던 쓰레기장도 곧 문을 닫고 “앞으로는 너희 집 쓰레기 너희 집에서 처리하라”고 경고까지 받은 상황이다. 이런 연상 끝에 다시 안내판을 보니 재활용 판재의 오래된 듯한 느낌은 마치 고급 한지의 자연스러운 무늬같이 보이기도 했다. 평소 아름다움은 자신감에서 나온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 안내판은 그런 자신감이 깃든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이 안내판을 가평군 21개 마을이 연합해 만든 사회적협동조합과 20여 년간 플라스틱 재활용을 위해 매진해온 사단법인이 협력해 만들었기에 그런 느낌이 더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얘길 들어보니 지자체 안내판을 이렇게 플라스틱 재활용 제품으로 교체한 것은 가평군이 처음인 것 같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다. 플라스틱 재활용 판재의 색이나 재질은 기존 새 플라스틱 안내판이 보여줬을 새로 화장한 듯한 느낌은 줄 수 없으니, 업무를 담당한 공무원 입장에서는 하기 어려운 선택일 것이다. ‘새로 만든 게 왜 저 모양이냐’고 누군가 생각 없이 던진 한마디에 담당 공무원은 얼마나 상처를 받겠는가. 그런 생각이 드는데 누가 선뜻 그 일을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진된 것이기에 더욱 아름답다. 이런 용기 있는 시도는 경기도의 최고봉인 화악산을 비롯해 1천 미터 넘는 산이 즐비하고, 북한강이 흐르는 자연보전권역인 가평군이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6만3천여 명의 주민이 약 1000만 명의 관광객이 버리는 쓰레기를 감당하려면 남다른 쓰레기 재활용 대책이 필요할 것이다. 작년 선출된 서태원 가평군수는 가평군민과 함께 “자연을 경제로 꽃피우는 도시, 가평”을 새로운 군정 비전으로 정한 바 있다. 기후재앙 시대, ESG경영이 필요한 시대에 수도권의 물과 공기를 만들고 있는 가평군의 입장에서 의미 있는 군정 비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군정 비전이 공염불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믿음을 이번 안내판을 보며 갖게 됐다. 교체 비용은 몇백만 원에 불과하지만 그 상징성의 값어치는 그 수만 배에 달할 것이다. 다른 지자체에서도 이런 오래된 듯 아름다운 새 안내판들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도전을 하는 오래된 아름다운 공무원을 응원한다.
윤 대통령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 해법을 두고 국내가 매우 시끄럽다. 민주당의 이재명 대표는 “계묘늑약”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비난 수위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다. 우리나라 다수의 국민들은 윤 대통령의 이런 해법에 동의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필자도 이번 해법은 매우 미흡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윤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대통령 모두는 지지율에 상당히 신경을 쓴다. 자신의 지지율이 떨어지면, “지지율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 지지율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지지율은 곧 자신의 정치 행위의 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대 모든 대통령들은 지지율에 “일희 일비“했던 것이다. 윤 대통령은 더욱 그럴 것이다. 여당이 국회에서 소수당이기 때문에, 자신이 의지할 곳이란 여론의 지지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공요금 인상을 하반기로 미룬 것도 지지율 관리 측면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 해법을 발표했으니, 그 이유가 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윤 대통령의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라는 언급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언급은 윤 대통령 자신도 이런 해법이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런 논란과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한일 관계의 정상화가 절박하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 대통령은 왜 이런 절박감을 가졌을까? 일단 경제 위기와 반도체라는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이 수출규제를 한 이후부터, 이른바 소부장, 즉 반도체 관련 소재, 부품, 장비를 국산화하는 노력을 지금까지 기울이고 있지만, 이것이 이른 시일 내에 달성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다수 의견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 위기까지 닥치고, 그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는 형국이기 때문에,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가 시급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전자부품 부문의 대일 수입액은 약 96억 1,110만 달러로, 소부장 사태가 발생하기 직전인 2018년 59억 9651만 달러보다 절대적인 수입액과 전체 전자부품 부문 수입액 비중(9.6%) 모두가 늘어났다. 이런 수치만 보더라도 윤 대통령은, 경제 위기의 빠른 극복을 위해서는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가 절실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또한, 점증하는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 미국의 바람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을 수 있다. 즉,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가시화되고 있는 신 블록화 속에서, 한일 관계의 조속한 정상화를 바라는 미국의 입장을 무시하기 힘든 상황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환경을 감안하더라도, 과연 이런 ”결단“이 성과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가는 미지수라는데 문제가 있다. 비난을 무릅쓰고 한일 관계를 정상화시켰는데, 성과나 결과가 없다면 이는 ”굴복“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지켜볼 일이다.
“구급차 이동 중에도 세심하게 안 아프시냐, 조금만 참으시라고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어요. 병원 응급실 도착, 접수하는 곳이 어수선했는데 접수하시는 것도 다 해주시고...옆에 여성 구급 대원에게 정말 감사해요 말했더니, 저희가 할 일인 걸요 말씀해 주시네요. 난생처음 119에 전화해 보았는데, 우리나라 119 서비스에 정말 놀랐어요. 신속하게 처리해 주시고 정말 감사했습니다.” 한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119 구급 대원분들께 감사드립니다’라는 글이다. 이 글에서도 나타나지만 우리 국민들은 119 구급대원을 영웅이나 의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언론이나 SNS에는 국민들의 생명을 구한 장한 119 구급대원들의 활동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장래 희망으로 ‘소방관’ ‘119 구급대원’을 꼽는 어린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을 방해하는 이들도..
1894년 와카야마현에서 태어났다. 1989년에 작고했으니 100년 가까이 살았다.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오사카로 나가서 자전거 가게의 점원이 된다. 기차역에서 눈물을 훔치시던 엄마를 생각하며 밤마다 울었다. 소년에게 돈벌이 현장은 갓 입대한 신병이 투입된 전쟁터나 다름 없었다. "나는 세 가지 은혜를 받고 태어났다. 가난해서 어려서부터 온갖 힘든 일을 하며 세상살이에 필요한 경험을 쌓았다. 허약하게 태어나서 운동을 꾸준히 하여 건강하게 되었다. 무학(無學)이라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선생으로 여기며 배우고 익히는데 힘썼다." 크게 성공한 사람들의 어린 시절은 비범하다. 선생에게는 신산고초(辛酸苦楚)의 시간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매사에 정면대응하여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 어떤 난제도 포기하지 않고 궁리를 거듭했다. 심지어 경쟁사ㅡ소..
2년차를 맞은 우크라이나 전쟁은 푸틴의 시대착오적 고집으로 ‘전쟁의 안개(the fog of war)’가 언제 걷힐지 가늠하기 어려운 국면이 지속되고 있다. 막후에선 휴전이나 타협과 같은 외교적이고 평화적인 타협점을 모색하는 시그널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으나, 베트남전과 같은 역사적인 전쟁의 교훈에서 볼 때 시간이 걸릴 것은 확실하다. 2년차에 접어든 우크라이나전쟁은 몇 가지 교훈도 던져주었다. 지도자들이 자신의 군사력·경제력 등 능력을 과신하여 상황을 오판하기 쉽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국가 간 단결이 침략자를 분쇄하는데 매우 효험 있는 수단임을 보여주었다. 물론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 그 수면아래에는 각국 간에 미묘한 긴장도 흐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독일의 미온적 태도 등이 대표적 사례다. 한편으로 우크라이나전쟁은 디지털 폭탄시대의 서막을 열어가고 있다. 핵무기 경쟁 시대에 가장 큰 억지 용어가 MAD(Mutual Assured Destruction) 즉 상호확증파괴였다. 네가 공격하면 나도 너의 본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논리다. 이 논리 때문에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도 핵전쟁을 피하고 해군력을 통한 쿠바 봉쇄 방법을 택했다. 이제 디지털 심화시대로 접어들면서 MAD는 MAC로 대체되고 있다. MAC는 Mutual Assured Cyberdestruction을 말한다. 상호확증 사이버기반 파괴다. 백업시스템과 같은 전력기반을 파괴하고 나아가 운송수단을 정지시키는 공격도 그 공격범주에 들어간다. 재래식 폭탄이 물리적 고속도로를 파괴한다면, 디지털 폭탄은 데이터 고속도로를 파괴한다. 은행은 올스톱될 것이고, 제조업도 정지되며, 병원에 대한 약품공급도 차질을 빚을 것이다. 잡화점은 상품이 떨어져 진열하지도 못할 것이다. 판데믹 당시 도시 봉쇄를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 이런 혼란상은 천천히 터지는 중성자탄과 맞먹는다. 빌딩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사람들을 살아가게 하려고 디자인한 시스템이 역으로 위험에 빠트리는 역설적 현상이 초래되는 것이다. 이 죽음의 물결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산업화이전 방식으로 되돌아갈지 모른다. 핸드폰도 사용할 수 없는 인터넷 이전 시대로 회귀할 지도 모른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에너지, 미디어, 금융기관, 비즈니스 및 민간영역까지 공격 범위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 이런 우울한 미래의 전조다. 지금 각국은 전자기파 폭탄(electromagnetic pulse bomb)과 디지털 흐름을 마비시키는 무기 개발에 한창이다. 냉전시대와 격이 다른 새로운 무기경쟁이다. 이 경쟁이 염려스러운 것은 핵무기 사용 위협보다 사이버기반 파괴위협이 더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런 추세에 발맞추어 최근 ‘국가사이버 안보 전략’을 발표하고, 북한·중국·러시아·이란을 주요 ‘사이버적성국’으로 규정한데 이어 “미국의 국가안보나 공공안전을 위협할 수 없도록 법 집행과 군사 역량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 국가들의 관련 단체들을 파괴하고 해체할 것”을 말했다. 그간 수비위주에서 공격적인 ‘정보방위(information defense)’를 선언한 셈이다. 우리도 지난해 입법예고한 사이버안보기본법안을 조속히 마무리하는 것이 ‘정보방위’의 첫걸음이다.
국민의힘이 ‘친윤’의 김기현 대표 체제를 구축했다. 이제 여야 정치권은 내년 4월 총선을 향한 움직임을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요즘 여야 정치권의 모습을 보면 내년 총선거가 벌써부터 걱정이다. 지난해 3월9일 초박빙으로 승부가 갈린 대통령 선거 이후 여의도 정가는 하루도 바람 잘 날 없고 그 증상이 점입가경이다. 진실은 간 데 없고 거짓과 이것을 덮는 가짜뉴스로 뒤엉켜 결론없는 평행선 대치만 이어가고 있다. 사용하는 언어도 시장 싸움판 수준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메뉴도 대선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고 등장인물도 거의 마찬가지다. 더 국민들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민생을 챙긴다는 여야 각당 내부가 스스로 모래성처럼 돼 있다. 특히 집권당을 이끌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막판까지 최악의 진흙탕 선거전을 표출했다. 김기현 대..
"코스모스 /또 영 /돌아오지 않는 /소녀의 /지문(指紋)". 박용래 시인의 시 '코스모스' 일부분이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무수한 이야기가 상상의 나래를 펴고 다가오는 느낌을 받는다. 빵 한 쪽 살 수 없는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가슴이 뛰고 풍부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누구나 경험하는 첫 사랑은 이야기다. 필자에게도 첫 사랑은 이야기다. 고교시절 초등학교 동창 여자아이와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매수가 매번 10장 분량이었다. 200자 원고지로 치면 40~50장 정도였으니 그 시절 쌓았던 이야기는 공주 공산성을 구축하고도 남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편지는 돌아오지 않는 그녀의 지문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첫 사랑에만 얹혀있는 게 아니다. 목로주점에 가서 단 5분만 있어보라. 사람 수 몇 곱절 분량의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걸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라는 호모 픽투스(Homo fictus)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야기라는 거미줄을 떠나 한시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죽어서도 이야기로 남는다. 오죽했으면 조너선 갓셜이 그의 명저 『스토리텔링 애니멀』에서 "인간에게 이야기는 물고기에게 물과 같은 것, 다시 말해 어디에나 있지만 지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을까? 그러나 유발 하라리는 『호모데우스』에서 인간의 이야기도 얼마든지 인공지능(AI)이 대체 가능하다고 설파하였다. AI가 만든 곡을 청중들이 듣고 인간이 만든 곡을 들었을 때처럼 감동한 사례를 들었다. 실제 소설이나 시 창작도 너무 쉬운 일이어서 해당 프로그램에 누구나 핵심어만 입력하면 근사한 작품을 받아볼 수 있다. 자연과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인간의 생화학적 알고리즘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하라리는 전작 『사피엔스』에서 '길가메시 서사시'를 패배주의로 못 박으며 인간은 유한적 존재라는 메시지를 부정한다. "사람이 죽는 것은 기술적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연스레 알고리즘을 통해 인간이 신(데우스)으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끝내 하라리는 『호모데우스-미래의 역사』에서 "무한성장에 기반한 경제에는 끝나지 않는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불멸, 행복, 신성은 이러한 프로젝트로 안성맞춤"이라며 AI가 인간을 불멸과 행복, 신성으로 이끌 것이라고 예언한다. 하지만 유발 하라리의 주장은 "검증되지 않은 과학을 통한 미래 예언"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김동광 고려대 과학기술연구소 연구교수는 녹색평론 2020년 1-2월 호에서 "유발 하라리가 펼치는 주장의 근거는 놀랄 만큼 취약하다”며 "그는 마치 과학이 모든 것을 밝혀내기라도 한듯 죽음의 정복과 알고리즘으로의 업그레이드를 주장 한다"고 꼬집었다. 빅히스토리(거대사)를 짜기 위한 예언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AI의 유용성이 커진다하더라도 인간의 가치로 통제할 수 있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한다. 소설 등 이야기 영역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이야기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사건적 존재여야하기 때문에 AI는 보조물일 수밖에 없다. 그만큼 이야기는 인간의 자기정체성이자 인간다움이다. 지금 당신이 무심코 내뱉는 이야기는 첫사랑이 아니라하더라도 결코 단순한 게 아닌 것이다.
중년의 남자가 전시장 작품 앞에서 고개를 떨군 채 울고 있었다. 겨우 마음을 가눈 듯 다른 자리로 옮겨 전비담 시인의 ‘공무도하公務渡河’ 시를 읽다가 결국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내어 운다. 그의 여식이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별’이 되었단다. 애통하고 분통이 터져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공무원인 그는 정치적 중립 의무 때문에 유가족협의회 활동을 할 수도 없고, 영정 사진을 분향소에 올릴 수도 없단다. “아침마다 아이의 방문을 열어봅니다. 어떤 때는 평소처럼 이름을 부르기도 하지요. 늘 방을 따뜻하게 해 두지만 휑하기만 한 아이의 방을 보면서 내 아이가 죽었다는 자각이 들 때면 한참을 멍하니 서 있게 됩니다. 아침 마다요.” 다 키운 자식이 죽었는데, 왜 죽었는지 따질 수 없는 나라, 슬픔을 내비칠 수도 없고 가족끼리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 나..
머지않아 ‘이연(異緣)’이란 영화가 개봉될 것 같다. 장기봉 감독이 극본, 연출을 맡고 (사)한국시니어스타협회(이사장 김선)가 제작한 이 영화는 중장년이 된 베이비부머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지금껏 열심히 살아온 세대, 곧 노년으로 접어드는 이들의 가슴속 깊이 간직돼 있던 삶을 영상으로 표현했다는데 출연배우들도 베이붐 세대다. 꼬마신랑 김정훈, 고교얄개 이승현 그리고 명품배우 이경영과 김선 등 대부분 5060세대들이 나온다. 베이비붐 세대의 이야기를 아름답고 슬프게 그렸다는 이 영화를 기다리는 중·장년들이 많다고 한다. 6·25 전쟁 이후 신생아 출생률이 크게 증가했다. 이 시기인 1955년~1963년 사이에 태어난 이들이 베이비붐 세대다.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유신시대와 10.26, 12.12, 5·18을 겪었다. 6월 항쟁 때엔 군부독재를 종식시키..
2023학년도 정시 모집에서 전국 13개 교육대학교(이하 교대)와 초등교육과 중 11곳이 미달 됐다. 정시 모집 때 대학 세 곳을 접수할 수 있기에 모집인원의 3배가 지원하지 않으면 미달됐다고 본다. 전국 대부분의 교대가 미달 되었고, 이는 입학 점수의 추락을 가져왔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내년에 이후에 교대 입결이 더 떨어질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지방대 인기 하락과 교사 인기 하락이 맞물려서 상위권 학생들이 교대를 선택할 요인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교대 자퇴생의 비율도 10년 전보다 20% 늘었다. 수치로 보면 2016년 102명이었던 교대 자퇴생이 2021년 426명으로 급증했다. 교대생들의 말을 들어보면 몇 년 전까지 한 과에 1~2명 있던 자퇴생이 요즘은 3~4명씩 생겼다고 한다. 교대에는 편입이 없으므로 중도 탈락자가 생기면 그대로 졸업생 수가 줄어든다. 교사라는 직업의 인기 하락을 입시생과 재학생이 보여주는 상황이다. 교대의 인기가 떨어지는 건 예견된 일이었다. 인기 하락에는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는데 첫 번째 이유로 교사의 급여를 꼽을 수 있다. 처음 교사가 되고 나서 놀랐던 점은 월급이 200만 원이 채 안 된다는 점이었다. 지금이야 인터넷에서 직업별 연봉을 자세하게 찾아볼 수 있지만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달랐다. 교대를 다니는 동안 주변에서 아무도 급여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고, 4년 내내 실습 나갔던 학교에서도 교사들이 연봉이나 급여를 대화의 주제로 올린 적이 없었다. 요즘은 어떤가, 인터넷을 켜면 누가 누가 월급을 더 많이 받았는지 자랑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회사에서 상여를 연봉의 200%로 받았다, 이직해서 연봉이 많이 뛰었다, 하는 모습을 보면 나조차도 직업 선택할 때 급여를 너무 고려 안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학생들이라고 다를까 싶다. 학생 때 공부하면 어떤 식으로든 보상받을 수 있다고 배워왔는데 교사는 보상 측면에서 매력이 없다. 교대의 인기가 하락한 두 번째 이유는 무너지는 교권이다. 비단 교사뿐만 아니라 아이를 만나는 모든 직업의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충원율이 급감해서 대형 병원에서 소아과 전공의 지원이 0명인 곳이 속출하고, 어린이집 교사 지원자도 10년 사이에 95% 줄었다. 출생률이 하락했으니 아동 관련 직업 인구가 줄어드는 게 당연하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현실은 신생아 하락 수보다 더 빠르게 아동 관련 직업 종사자 수가 줄어들고 있다. 공통적으로 부모의 폭언이나 갑질, 툭하면 걸리는 소송 때문에 병원에서는 소아과 기피, 학교에서는 담임 기피 현상이 생겼다. 교대 인기 하락의 마지막 이유로 꼽을 수 있는 건 임용고시가 예전만큼 녹록하지 않다는 점이다. 교대를 졸업하면 일반 기업에 취직하기 어렵다는 게 정설이라 교대 졸업생들은 임용고시에 합격해야 정규직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예전에는 교대 졸업생 수보다 더 많은 숫자를 교사로 뽑아서 교사 되기가 수월했다. 언제부턴가 임용 선발 인원과 교대 졸업생의 비율이 미스 매치 되면서 임용 재수생이 생겼고, 매년 적체된 인원 때문에 교사 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특수목적대학이 가진 장점인 학교 입학이 곧 직업 합격이라는 공식이 깨지면서 교대에 오려는 인원이 줄고 있다. 교대에 입학하려는 인원이 줄어드는 게 뭐 어떤가 싶을 수도 있다. 미국과 일본의 공교육이 어떤 상황인지 보면 한국의 공교육의 질적 저하를 우려하는 게 앞서나가는 걱정이 아닐 수 있다. 교사가 다시 매력적인 직업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데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