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이주노동자는 생산인구 감소, 저임금과 열악한 환경 속에 놓인 한국의 노동 시장에서 유일한 정책적 대안이 된 지 오래다. 그들의 존재는 이제 한국경제를 뒷받침하는 상수(常數)가 됐다. 그러나 이처럼 소중한 소임을 맡은 그들의 생활환경을 비롯한 처우는 여전히 야만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일하고 있는 경기도는 앞장서서 이주노동자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할 책무가 있다. 더 집중해야 한다. 지난 2020년 비닐하우스에서 생활하던 한 외국인 노동자가 영하 20도의 강추위 속에서 사망해 외국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 주거환경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올 3월, 포천의 한 돼지농장에서 10년째 일해오던 노동자가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돼지 배설물의 악취와 유독가스가 가득한 방에서 생활..
부산에서 ‘체인지(體仁智)’라는 이름의 0교시 아침운동 프로그램이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져갈 조짐이라고 한다. 체인지는 체육(體育), 인(仁), 지육(智育)의 줄임말이면서 ‘변화’의 영어(change)겠다. 센스 만점의 언어 변주(變奏)다. 이 변화를 특히 주목하는 것은 지덕체(智德體)라는 흔히 쓰는 말의 굴레를 이제야 벗어나는가 싶은 (필자의) 설레는 마음 때문이다. 거꾸로 체덕지(體德智)다. 학교 현장이 이런 개념을 터득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점도 중요하다. 큰 박수를 보낸다. ‘체인지’라는 말로 교육을, 아이들을 ‘바꿔보자’는 뜻까지 표현하고자 덕(德)을 인(仁)으로 바꿨겠다. 德은 ‘크고 착한 마음’이다. ‘어진(仁) 마음’의 뜻과 거의 같다. (말의) 순서는 현장에서 ‘정치적’이다. ‘박정희’ 때는 군관민(軍官民)이었다. 언젠가 민관군(民..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던 우리의 지난 역사를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맞다.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당대 최강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도 한때 나라를 빼앗겼다. 중요한 것은 빼앗긴 나라를 어떻게 되찾고 다시 세웠느냐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기울인 노력은 정녕 부끄러운 것이었을까. 아니다.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이었는가는 이석영 일가의 선택과 결단 하나만 살펴보아도 잘 알 수 있다. 1855년 이조판서 이유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석영은 영의정을 지낸 종숙 이유승의 양아들이 되었다. 서른 살에 과거에 급제해 고종을 보좌하는 승지로 관직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라의 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기 시작하자 그는 미련 없이 관직을 떠났다. 고종이 중추원 의관에 임명했지만 그는 남양주로 낙향해 돌아가지 않았다.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간판마저 떼어내자 이석영의 6형제는 만주로 가 항일운동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이석영의 동생 이회영이 먼저 서간도로 가 독립군 기지를 물색하고 돌아왔다. 이석영은 양주 일대의 만 석 재산과 토지를 모두 처분했다. 이석영이 양아버지 이유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조 단위에 해당할 만큼 어마어마했다. 양주에서 서울까지 오면서 80리 길을 남의 땅을 밟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석영의 나머지 5형제도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60여 명의 가족이 함께 만주로 떠났다. 그들 형제가 소유했던 토지는 여의도 면적의 세 배가 넘었다. 이석영과 그 형제들의 자산으로 신흥무관학교가 개교했다. 이석영은 독립을 위한 일에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으면서도 어떤 자리와 영예도 사양했다. 자기를 내세우는 일을 한사코 사양한 이석영이 지녔던 직함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10여 년에 걸쳐 배출한 3500여 명의 졸업생은 대한독립군의 근간으로 항일무장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대한제국의 병력이 7000이었던 데 반해 1920년대 전후로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약한 독립군은 1만을 헤아렸다. 전재산을 아낌없이 독립군 양성에 바친 이석영은 76세에 몸져누웠다. 막냇동생 이호영이 그를 국내로 몰래 데려와 치료한 덕분에 기력을 회복한 이석영은 다시 동지들이 있는 중국으로 떠나려 했다. 건강을 염려한 동생이 여비를 마련해주지 않자 금강산 유람을 다녀올 여비를 달라고 해 기어이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비지로 겨우 연명하던 조선 최고의 부호 이석영은 여든 살에 상해의 빈민가에서 아사했다. 그들 6형제 중에서 살아서 조국으로 귀환한 이는 다섯째 이시영 하나였다. 세계 어느나라에서 당대 최고의 부호가 자신의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치고 아사의 길을 걸어간 애국자가 있었던가. 여섯 형제와 그 가족들이 기꺼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풍찬노숙하면서도 조금도 서로를 원망하지 않고 자존감을 지키며 끝까지 형제애를 발휘했다. 그런 위엄을 지닌 이들이 지켜낸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지금 그들의 희생과 헌신에 과연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최근 음주운전으로 인한 인명 사고가 잇따르면서 국민적 분노가 커지고 있는 중에도 지각없는 음주 운전행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경찰의 단속을 강화하고 대법원이 나서서 양형기준을 강화했다. 그러나 단속과 처벌 강화만으로 음주운전 행태가 효과적으로 개선되리라는 기대는 무리다. 음주운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풍토를 바꿔낼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음주운전은 ‘살인 범죄 행동’과 다름없다는 엄중한 인식을 확산해야 한다. 지난달 말일 오후 1시 경기남부경찰청은 수원 광교호수초등학교 앞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주간불시 음주단속을 실시했다. 이날 경찰은 불과 2시간 동안 현장에서 면허 정지 2명, 훈방 조치 4명 등 총 6명을 적발했다. 얼마 전 경찰이 전국의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과 인근 도로 431곳에서 음주단속을 실시한 결과 낮 2시간 동안 무..
“자유·평화·번영에 기여하는 글로벌 중추국가”는 윤석열 정부의 6대 국정 목표 중 하나다. “영향을 받는 나라에서 ‘영향을 주는 나라’로, 국제질서를 따라가는 나라에서 ‘이끄는 나라’로의 도약”을 추구한다. 윤석열 정부의 글로벌 중추국가론은 노무현 정부의 중추적 중견국가론과 유사한 듯하다. 그러나 외교정책에 있어서 후자가 “균형적 실용 외교”를 강조함에 비해 전자는 전략적 명확성에 기초한 ‘편승적 가치 외교’를 지향하는 점에서 전혀 다른 접근법이다. 한국은 세계 6대 군사 강국, 10대 경제 강국으로서 글로벌 중추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중국, 러시아, 일본 그리고 미국 사이에 낀 (상대적) 주변국가로 인식된다. 이러한 ‘글로벌 중추, 지역 주변’의 모순은 남북관계에도 존재한다. 북한이 핵으로 긴장을 고조시키면 글로벌 중추국가 한국은 사라지고 후진국 북한과 강대국 미국 주연의 공연이 펼쳐진다. 이는 불편하지만 진실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지 않은 채 추진하는 글로벌 중추국가 비전은 한계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이명박 정부의 “글로벌 코리아” 등 과거 정부의 유사한 정책들도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글로벌 중추, 지역 주변’의 모순을 해결하는 최소 조건은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나아가 남북이 경제통합을 이룰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남북이 통일은 아니더라도 유럽연합과 유사한 경제통합을 이룬다면, 한국이 동북아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는 국력의 격차를 현저하게 좁힘으로써 지역 중추국가로서 위상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핵보유국인 북한과 ‘강대강’으로 대립하는 것은 일시적 자존감은 높아질지 모르나 군사적 대외 의존 및 지역 주변화를 심화할 따름이다. 그 결과 글로벌 중추국가로서 위상은 오히려 저하된다. 자신이 속한 지역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은 중추국가가 가져야 할 핵심 역량 중 하나다. 정부의 대북정책과 대외정책, 즉 “담대한 구상”과 “한국형 인도-태평양전략”을 체계적으로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담대한 구상’에 비핵화 협상 재개를 유인할 수 있는 획기적 제안을 새로이 담고 ‘한국형 인도-태평양전략’에 이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대외전략을 포함하여, 양 정책이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하여야 한다. 지난 4월 26일의 워싱턴 한미정상회담은 한미동맹 7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를 겸하였다. 한미동맹은 1953년 비대칭 동맹으로 출발하여 오늘날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을 표방하면서도 ‘글로벌 중추, 지역 주변’의 모순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속 빈 강정일 따름이다. 한국이 진정한 글로벌 중추국가로 자리매김하는 데 실질적으로 공헌하는 한미동맹의 미래를 기대한다.
어버이들은 선조들 경험과 자신의 체험을 통해 터득한 철학을 속담이란 이름으로 보존 전수해 왔다. 서양의 이름 있는 철학자나 동양의 공자 맹자의 언어와 문장보다 더 실감적이고, 무릎을 치며 ‘옳거니’ 싶은 함축된 인문학적 도(道)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담은 평범한 사람들의 철학이요 조상의 걸러진 넋의 결정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속담을 뒤집어 재미있게 비아냥대듯 표출하면서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웃음의 미학으로 삼고 있다. 에를 들어 본다면, ‘인생을 짧고 예술은 길다’는 철학적 경구를 ‘인생은 더럽고 예술은 비싸다.’고 한다. 또한 ‘헌신하면 헌신짝 되고, 일찍 일어난 새는 늙은 새다.’라는 언어적 유희 같은 말도 등장시킨다.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하는 나는, 내 몸에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하는 편이다. 그런 나의 성깔을 스스로 미워하며 두 번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하늘을 뚫어지게 처다 보기도 했다. 무디지 못한 성깔은 타협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범하게 나서지 못하고 다가오는 사사건건이 근심스러웠다. 그러한 내가 무슨 행복과 효도와 영광의 시간이 있었겠는가! 하고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앨범을 넘겨보았다. 어머니 회갑 때 아버지와 함께 잔칫상 앞에 앉아 있는 부모님 사진이 눈앞에 펼쳐졌다. 두세 장 더 넘기니 ‘축 김경희 수필집/ 둥지 안의 까치 마음 출판기념회/ 1986. 11. 8’이라고 쓰인 큼지막한 글씨가 새겨진 현수막이 벽면에 걸려있다. 이어서 내가 평생 스승으로 모신 고하(古河) 선생님과, 재직하고 있었던 당시의 대학교 기획실장의 축사 모습, 그때 초등학교 다니던 딸아이는 색동옷에 붉은 치마를 입고 제 오빠와 나란히 서서 내가 작사하고 김성진 교수가 작곡한 ⸀우리 가정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다른 사진에는 아버지 어머니 아내와 내가 앉아 있는데, 행사가 끝나고 돌아가기 직전 김성철 박사가 부모님께 축하 인사를 건네는 모습도 정지된 영화의 장면처럼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남에게 자랑할 것도 속살일 것도 없다. 그렇지만 이때만큼은 작은 흥분이요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내 삶의 먼 풍경을 보고자 앨범을 더 넘겨보았다. 한국 땅의 이름 있는 산을 찾아 오르고 내리고 하던 시절의 내 사진이 많이 드러났다. 그리고 어머니가 적갈색 비단 두루마기를 입고 지금은 중학생이 된 유치원생 막내 손자의 손목을 잡고 있는 사진이 퍽 정답게 느껴졌다. 얼마 전에는 교수요 학자로서 고위직에 있었던 분의 북콘서트를 가보았다. 정권이 바뀐 뒤 현직에 있을 때의 일로 역풍을 맞아 힘든 세월을 보낸 사람이지만 그 힘든 세월과 바람 속을 묵묵히 걸으며 자신을 관리한 덕분에 지성적 고뇌의 세련미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앎의 넓이와 깊이만큼의 이야기가 있었다. 뒷부분으로 가서는 정치를 위한 동지들의 의지가 담긴 토크쇼가 되어 재미도 있었다. 얼마 뒤엔 선거가 있을 것이다. 그때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역할을 은유적인 메시지로 들려주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양궁선수들이 과녁 앞에서 활시위를 당기며 금메달을 따고야 말겠다는 모습에 비유되기도 했다. 행사가 끝나고 걸어오면서 나는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뜻대로 하시게, 인생은 누구나 시간이란 화살표 위에 얹혀 죽음으로 가는 것이라네.’라고.
백령도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군사적 요충지여서 외부와 고립된 섬이지만 많은 이들이 방문하고 싶어 하는 매력적인 섬이다.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펼쳐진 두무진은 ‘서해의 해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는데 10억 년 전 퇴적된 사암층이 규암으로 변하면서 생긴 곳이다. 규암이 콩알처럼 잘게 부스러져 깔려있는 콩돌해안은 쪽빛 바다와 환상의 풍경을 보여준다. 용트림바위와 진촌리 현무암, 사곶해변 등도 백령도가 자랑하는 관광자원이다. 백령도는 세계적으로 희귀하고 학술 가치가 높은 여러 생물이 서식하고 있는 국가생태관광지역이다. 독특한 섬 문화가 발달해 있는데 관광객들의 관심을 끄는 다양한 토속음식들도 있다. 메밀·쌀·밀가루를 혼합 반죽해 굴과 김치소를 넣고 만두처럼 빚어 찌는 음식인 짠지떡, 백령도에서 재배..
함흥 사람들은 유별나게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함흥 사람들은 평양과는 라이벌 관계라고 생각한다. 1980년대 건설된 함흥시 중심에 있는 함흥대극장은 평양대극장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건설해 비판을 받았다. ‘함흥얄개’ 또는 ‘함흥내기’로 부르는 함흥사람들은 군 생활이나 공동체 생활을 할 때에도 우두머리를 하는 경우가 많고, 나약함을 보이면 함흥사람이 맞냐는 의심을 받는다. 최고의 신부감으로 함경남도 지역 여성을 꼽으며 알뜰하고 생활력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함흥하면 지역주의가 강하고 생활력 강한 여성들이 살고 있다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지방주의 온상’이라는 말은 해방이후 생겨났다. 함흥-흥남지역은 산업시설이 많은 관계로 일제시기 노동운동이 활발했다. 1930년 흥남질소비료공장에서 저임금과 학대로 인한 최초 파업은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화학공장에서 생산하던 질소는 전시에는 폭탄이 된다. 군수품을 생산하는 이곳에 사회운동가들과 문학가들이 거쳐 갔다. 해방 후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국한 김일성은 각계정파들과 권력을 다투어야 했는데, 그 중 국내공산주의자였던 오기섭과의 노선투쟁은 이후 북한의 정치사에 영향을 주었다. 오기섭은 1903년 5월 1일 함경남도 홍원에서 출생했다. 근로자의 날에 태어난 그는 출생일에 걸맞게 함남등지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13년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해방당시 연설가인 오기섭의 인기는 김일성을 넘었다. 해방 후 첫 공산당조직인 북조선분국이 만들어질 때 오기섭은 제2비서로 선출되었다. 반면 김일성은 1945년 12월에 책임비서가 되었다. 오기섭은 북조선분국을 반대했을 뿐 아니라, 이후 노동의 성격문제로 김일성과 갈등을 겪었다. 해방 후 노동운동의 성격을 규정하는 문제는 중요했다. 김일성은 노동조합이 국가와 기업에 적극 협조해야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반면, 오기섭은 노동조합이 국가를 상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쟁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오기섭의 주장은 대중운동에 대한 가장 해로운 정치적 오류라는 지적을 받고 중앙상무위원이라는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그리고 김일성과 갈등을 겪었던 정치세력은 이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가끔 북한에 어째서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가는 질문을 받게 되는데 그 줄거리를 찾다보면 ‘지방주의 온상’으로 거론된 함흥-흥남에 있다. 이로부터 북쪽은 노동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가를 상대로 싸우기보다 국가정책에 적극 협조하는 남쪽과 전혀 다른 정치문화가 시작되었다. 북한문헌에도 자주 등장하는 함흥의 지역주의는 자연스럽게 함흥을 대표하는 표상이 되었다.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면서 생겨난 용어인 ‘지방할거주의’ ‘지방주의 온상’은 함흥지역의 정서가 되었다. 함흥 사람들은 어디가서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함흥얄개’라고 한다.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랑림산맥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 거세다는 의미에 ‘함흥내기’라고도 한다.
채영신은 교회당을 빌려 야학을 개설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나오는 내용이다. 문맹퇴치를 위해 한글을 가르치는 것은 민족의식의 고취와 함께 최소한의 근대적 삶의 무기를 확보하는 것이다. 1930년대 브나르도 운동은 “민중속으로”라는 러시아어로서 일제 강점기 시절 근대화를 위한 농촌계몽운동이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곳은 현재의 안산시로 이를 기리기 위해 안산엔 상록수역이 있다 사회가 발전하여 지역공동체를 벗어난 삶이 만들어지면서 신문을 통하여 외부세계와 소통하였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미디어 리터러시는 신문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했다. 대중사회와 함께 TV 의 등장 후 폭력, 모방범죄 등으로 TV 를 비판적으로 시청할 필요가 제기되었다. 인터넷이 보급되고 디지털 미디어가 확산된 정보사회로 들어가면서 문제는 복잡해진다.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의 등장, 소셜 미디어의 활성화는 너무 많은 정보를 쏟아내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선택,판단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 미디어 리터러시가 디지털 리터러시로 확대된 것이다. 유튜브의 확산과 함께 가짜뉴스,필터버블(사용자가 자기의 관심에 맞춰 필터링된 정보 안에 갇히는 현상)등에 의해 현명한 판단 보다는 확증편향이 증가하는 추세다. 디지털이 시대의 특징이 되면서 정보격차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세대와 계층 간의 정보격차가 존재한다. 특히 디지털 능력에 따른 세대격차는 노년의 삶을 위협한다. 반면 청년층은 접근과 사용에 익숙하지만 거기서 쏟아지는 정보를 비판적으로 판단하는데 취약점을 보인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이 사회가 건전한 방향으로 진보하는데 꼭 필요한 이용자의 의식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미국이나 서구에 비해 국내상황은 떨어진다.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사회적 공유가 덜 되어있고 교육기능과 제도도 초보단계이다. 지금은 정보사회를 넘어서 초연결 사회다. 이 시대를 살면서 소셜 미디어에 연결되지 않은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디어 리터러시는 디지털 리터러시를 넘어서 소셜 리터러시 까지 급진전되었다. 빠른 사회변화가 미디어를 통해 매개되기 때문이다. 고도대중사회의 특징인 프로슈머(prosumer)의 특징을 보인다. 생산자가 곧 소비자임을 의미한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우리의 삶과 연결된 메시지의 생산과 자기표현이 지배적 문화현상이 되고 소셜 미디어가 사회 참여 및 정치 참여의 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학교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커리큘럼 안에 녹여낼 제도적 틀은 없지만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미디어리터러시 교육은 절실하다. 청소년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시민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때 꼭 필요한 지식과 품성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디지털 시민성을 함양해야 한다. 시민사회의 구성요건에 변화가 온거다. 사이버 폭력, 온라인 성범죄, 과도한 혐오표현 등의 문제는 디지털 시민의식이란 시각에서 바라보면 문제의 해결점을 찾아낼 수 있다. 디지털 미디어 문화와 윤리에 대한 비판적 교육이 필요하단 말이다. 디지털 미디어의 보급, 소셜 미디어의 확산은 과거보다 권력감시 기능을 강화시키고 참여민주주의의 통로 역할을 하는 인프라지만 그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비판의식을 가진 디지털 시민교육이 전제되야 한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중요한 건 바로 이 지점에서다.
세계 경제 안보 흐름이 요동치고 있는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가졌다. 윤 대통령은 이번 방미를 통해 70주년을 맞는 한미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고 글로벌 차원의 양국간 협력 방안을 긴밀히 논의했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고 있다. 현 정부는 앞으로 강화된 한미동맹을 토대로 급속도로 분절화하는 글로벌 흐름에서 한국의 국익적 진로를 더욱 정교하게 이끌어가야 한다. 따라서 귀국후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행보는 비장해야 한다. 무역적자 등 경제 위기 경보는 갈수록 국가와 민생을 옥죄는 쪽으로 가시화되고 있지만 당장에 이렇다할 출구가 보이지 않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게다가 정치권은 여야간 극한 대치도 모자라 각당 내부적으로 잇따른 실언과 갈등, 특히 더불어민주당 대표 경선의 돈봉투 파문까지 끝모를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