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하나가 하루를 점령한다. 일본 세키네 쇼지의 ‘죽음을 생각한 날’. 일본 배낭여행 중인 아들에게 남편이 SNS 가족방을 통해 보낸 글 중에 있었다. 학교를 자퇴한 열일곱 살 아들은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유럽에 이어 일본을 떠돌고 있다. 아들이 나라 밖 문화, 예술을 많이 접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남편은 거의 매일 ‘일본 예술 정보’를 보낸다. 세키네 쇼지의 그림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어두운 하늘 아래, 어두운 나무들 속,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한 사내가 고개 떨구고 걸어간다. 그 배경 모두, 남자의 등을 누르는 십자가로 보인다. 또 다른 그림, ‘신앙의 슬픔’은 어떤가. 어두운 들판을 걷는 다섯 여인, 죄지어 끌려가는 듯도 하고 순교의 길인 듯도 하다. 손에 든 꽃은 사약처럼 느껴진다. 흰옷의 여인들 사이에서 혼자 붉은 옷을 입은 여자. 고개를 유달리 모로 꺾은 그 여인에게 시선이 오래 간다. 아, 그 여인의 배경 또한 십자가로 보인다. 사내와 붉은 옷 여인의 사연이 궁금하다. 미치도록. 화가에 대해 찾아본다. 19세기 말에 태어나 스무 해를 살고 폐병으로 죽었단다. ‘죽음을 생각한 날’을 열여섯 나이에 그렸다는 것을 알고 충격받았다. 당장 그의 화집을 구입 하려 했는데, (예상대로) 화집은커녕, 책도 전무하다. 비단 세키네 쇼지 화집뿐일까. 대형서점에서도 일본 화가들의 화집을 본 기억이 없다. 아들에게 세키네 쇼지의 화집을 구해달라고 부탁해야겠다. 보름 전 일본 여행을 시작한 아들은 떠나기 전, 일본 역사책을 여러 권 읽었다. 학교 졸업한 지 까마득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 내게 일본 전사(全史)를 5분 안에 정리해주었다. 조몬인, 야요이족이 살았던 고대에 이어 ‘일본’이라는 국호를 처음 썼던 나라 시대, 사무라이 계급이 탄생한 헤이안 시대, 군사정권 시대를 연 12세기의 가라쿠라,무로마치 막무시대, 그리고 우리나라 조선 중흥기(태종, 세종, 세조, 성종)와 맞물린,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을 이룬 전국시대, 비교적 평화기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시대. 메이지 유신(1868년)으로 근대화에 뛰어든 후, 아시아 패권을 잡기 위해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4),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 전쟁(1941) 등을 차례로 일으키며 전쟁광이었던 제국주의 시기. (우리를 괴롭혔던 임진왜란과 일제 식민지 시절도 상기하자) 그 벌을 받아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이 돼 쑥대밭이 되었는데, 한국전쟁특수를 누리면서 다시 일어난 뒤, 서방과의 자유무역 교류를 하며 수출, 기술혁신 집중으로 고도성장, 오늘날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아들에게 일제 강점기는 조선 시대 임진왜란처럼 호랑이 담배 먹던 때 이야기일 것이다. 식민지 시절의 고역과 복수심에 ‘쪽발이 *들’이라며 분개하던 어른들을 보며 성장한 내게 일본 예술품들은 지금도 ‘위안부, 독도 문제’의 색안경을 통과해야만 들어온다. 작품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다. 자유롭게 문화, 예술을 만나는 아들을 부러워해야 하나. 아들이 돌아오면 격세지감의 다리를 잇기 위해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들어야겠다. 지난 3월 타계한 사카모토는 아시아인 최초로 아카데미 작곡상(영화 마지막 황제 OST)을 받았던 세계적인 작곡가, 피아니스트면서, 탈원전 및 반핵운동, 2015년 아베 정부의 ‘안보법안’반대, 한국 위안부에 대한 사과 등을 주장하며 평생 양식 있는 세계시민으로 살았다. 그의 음악이 역사 없이 들리는 이유다. 일단 마지막 황제 OST 중 ‘Rain’을 들어보시길.
역사가 잊은 사람 중에 신동 이갑이 있다. 1877년 평안남도 숙천에서 태어난 이갑은 겨우 열두 살에 진사시험에 급제했다. 나이를 세 살 올려서 응시한 결과였다. 집안과 이웃들에게 크나큰 경사였다. 그러나 이 경사가 멸문의 화를 불러왔다. 당시 평안감사 민영준은 이갑이 나이를 속여 진사시험에 응시했다는 이유로 이갑의 아버지를 끌고 가 갖은 고문을 했다. 극에 달한 민비 일족의 위세를 등에 업은 민영준은 이갑 집안의 농토 40정과 재산을 빼앗았다. 고문후유증과 화병에 시달리던 이갑의 아버지는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며 ‘원수를 갚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부패한 세상을 바로잡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복수심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이갑은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1898년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육사 15기생으로 입학했다. 그의 동기생들은 대부분 19세 전후였는데, 그는 26세였다. 그럼에도 그는 휴식시간에도 총검술을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육사 15기 동기생 중에는 한국인도 7명이 더 있었다. 한국인 동기들은 이갑을 중심으로 뭉쳤고, 스스로 ‘8형제배’라고 부르며 결속을 다졌다. 같은 평안도 출신으로 뒷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참모총장과 군무총장을 역임한 유동열과는 특별히 가까웠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육사 15기 ‘8형제배’는 하세가와가 이끄는 근위사단과 함께 진남포를 거쳐 평양에 입성했다. 이갑에게 일본과 러시아는 다르지 않은 외세일 뿐이었다. 평안도 고향땅을 거쳐 만주 전선에 참전했던 이갑이 서울로 귀환하자 고종은 그를 무관학교 교관으로 발령했다. 무관학교는 일본육사 15기 8형제배의 집결지가 되었다. 무관학교의 실세인 노백린과 어담도 일본육사 11기였다. 러일전쟁에서 최고의 공훈을 세운 하세가와가 한국주둔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그들의 영향력은 더 강해졌다. 이갑은 정장군복을 차려입고 교동에 있는 민영준의 집으로 찾아가 빼앗아간 전답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민영준은 전답을 빼앗은 사실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욕까지 했다. “서북놈들은 할 수 없군. 군복을 벗겨야 겠어.” 이갑은 허리에 찬 군도를 빼들고 호통쳤다. “내가 그동안 살아온 것은 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소. 대감의 배에 이 칼이 들어가지 않을 줄 아오?” 이갑의 기세에 놀라 도망친 민영준은 사람을 보내 이갑에게 요구사항을 물었다. 살기등등한 이갑을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갑은 대한제국 군인들 사이에서 인기 절정이었고, 그의 옆에는 ‘8형제배’가 있었다. 이갑은 강탈한 토지를 반환하고 빼앗아간 곡물대금 전액에 이자를 붙여 상환할 것을 민영준에게 요구했다. 또한 그동안 국가와 민족에게 저지른 악행을 속죄하기 위해 육영사업을 펼칠 것을 용서의 조건으로 달았다. 민영준은 지체없이 이갑의 아버지에게 빼앗았던 전답을 모두 반환하고 15만원을 배상했다. 하지만 이갑은 민영준에게 돌려받은 거액을 교육사업과 동지들을 돌보는데 썼다. 원동에 집 한 채를 마련한 것이 그가 자신을 위해 사용한 전부였다. 원동의 집도 동지들을 재우고 대사를 도모하기 위한 공적 공간에 가까웠다. 이갑의 기개와 사람됨을 확인한 민영준도 이갑을 인정하고 휘문학교를 열어 민족교육에 기여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자 일본육사 출신들은 출세 길이 활짝 열렸다. 그러나 이갑은 망명길에 올랐고, 연해주에서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투쟁의 한 길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그가 일본육사에 들어간 것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강성한 대한의 군대를 만들어 조국을 지키려 한 것이지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기도가 오는 2026년까지 신축과 민간·가정 어린이집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으로 매년 국공립어린이집을 170곳씩 확충하겠다고 발표했다. 큰 틀에서 보면 국공립어린이집 증설은 ‘인구 절벽’ 위기시대에 필연적인 선택이다. 이런 정책이 잊을 만하면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곤 하는 어린이집 아동학대 폐해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 유아교육을 정부가 전면 책임지면서 수준을 전반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출생아 수 감소에 따른 인구 절벽 조짐은 경기도도 피해갈 수 없는 과제다. 외부전입에 의해 전체인구는 늘어나고 있지만, 경기지역 출생아 수는 2018년 8만8175명에서 2022년 7만5300명으로 5년 새 1만3000여 명(14.6%) 감소했다. 영유아 수도 같은 기간 81만6247명에서 65만4856명으로 16만1391명(20%) 줄었다..
유난히도 5월은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부부의 날(21일) 등 가족 구성원을 위한 날이 많다. 그래서인지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또한 1일은 근로자의 날이고, 15일은 스승의 날이어서 가족을 포함한 공동체의 행복과 안녕, 그리고 건강을 위한 기념일이 많은 달이 5월이다.1993년 UN이 가정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건전한 가정을 위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자는 취지로 5월 15일을 가정의 날로 제정했고, 이후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5월 15일을 가정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일반인들에게는 5월이 화목한 가정의 달이지만 근로소득 외의 다른 소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종합소득세의 신고 납부가 있는 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맘 때쯤이면 행복한 가정 생활을 잠시 뒤로하고 1년 중 가장 업무량이 많은 종합소득세 신고업무에 매진해야 하는 직종의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일반인들이 느끼는 가정의 달과는 사뭇 다른 의미의 한달을 보내게 되는 사람들이 세무대리 업무 종사자들인데, 이들에게 5월 한달은 야근과 주말 근무가 일상이 되고 정해진 기한내에 모든 업무를 마무리해야 하는 큰 압박감이 주어지는 시즌이기도 하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오늘의 주제인 종합소득세에 대해 알아보자. 종합소득세란 말 그대로 여러 항목에 걸친 소득들을 모두 합한 소득에 대한 세금이다. 일반적인 근로자라면 연말정산으로 소득에 대한 세금 납부가 끝나겠지만 근로소득 외에 다른 소득이 있거나 사업을 하는 개인들은 종합소득세를 납부하여야 한다. 종합소득세는 1년 동안 개개인의 사업 활동 등을 통해 본인에게 귀속된 사업소득, 근로소득, 배당소득, 이자소득, 연금소득, 기타소득을 모두 합해서 과세하는 세금이다. 그리고 종합소득세는 세무서에서 고지하는 세금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자진신고 및 납부를 해야 하는 세금이고, 그 신고 및 납부 기간은 5월 31일까지다. 기한 내에 자진신고 및 납부하지 않을 경우 다양한 세액공제 및 감면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산세까지 부담할 수 있으니 해당 사항이 있는 사람들은 꼭 유념해야 한다. 세금은 과세표준에 세율을 곱해서 산출하게 되는데 종합소득세의 경우 소득 구간별로 최소 6%에서 최고 45%의 세율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듯 종합소득세는 소득이 높으면 높을수록 세금을 더 많이 부담하는 누진세율을 적용하는 세금이다. 한편 소득세법상 동일한 종류의 과세소득이라 하더라도 과세방법에 따라 ‘종합과세’방법과 ‘분리과세’방법이 있는데 ‘종합과세’ 방법이란 원천별로 각 소득을 합산하여 소득세 과세표준과 세액을 계산하는 방식을 말한다. 따라서 같은 이자소득이라 하더라도 ‘분리과세’소득에 해당하는 이자소득은 그 이자소득을 수령할 때 원천징수를 당하게 되면 그것으로서 납세의무를 다한 것이며, 이를 다시 종합소득에 합산하여 과세되지 않는다. 그러나 종합소득에 해당하는 이자소득의 경우에는 그 이자소득을 영수할 때 원천징수 의무자로부터 원천징수를 할지라도 확정신고시 이를 다른 소득금애과 합산하여 종합소득세를 신고 납부하여야 한다. 그리고 소득세의 과세 기준으로 ‘분류과세(分類課稅, Classified Taxation)’라는 개념이 있는데 소득의 성격과 발생 원천별로 구분하여 과세하는 방식을 말한다. 퇴직 소득과 양도소득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두 소득은 성격상 장기간에 발생한 소득이어서 다른 종합과세 항목의 소득들과 합산하여 누진세율을 적용하게 되면 일시에 과도한 세율을 적용 받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두 소득은 별도로 구분하여 종합소득과 따로 과세를 한다. 가정의 달과 세금의 달이 겹치는 것은 우연일까? 굳이 가정의 달에 종합소득세를 납부하게 하는 것은 가정에도 충실하고 열심히 세금 내서 더 큰 공동체인 국가에도 충실하라는 의미일까? 오늘도 열심히 벌어서 종합소득세를 납부하는 이 땅의 선량한 납세자들에 큰 감사를 드리며, 가정의 달마저 잊고 묵묵히 종합소득세 신고 업무에 매진하는 많은 세무대리 업무 종사자들에게도 행운과 건투를 빌어본다.
북쪽 고향에 있을 때 옆집으로 함흥여자가 시집왔다. 목소리도 굵고 행동도 씩씩한 그는 결혼 전까지 직장 출근하면서 단 한 번도 지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러한 성실함으로 당시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렵다는 입당도 했다. 공로가 커서인지 함흥여자는 내가 사는 동네에 시집와서도 괜찮은 직장 간부를 하게 되었다. 함흥여자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아 참으로 피곤했다. 어려웠던 1990년 고난의 행군 시기가 되자 많이 유연해졌다. 본인 자신도 아이 넷에 시부모까지 살려야 하는 생사의 기로에 있었다. 그리고는 동네에서 제일 먼저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라고 하면 부끄러워할 때 체면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나 했다. 나는 함흥에 외사촌들이 살고 있고, 친언니도 그곳으로 시집을 갔기에 함흥으로 자주 다녔다. 그때 만났던 함흥여자들은 억척스럽다. 억양이 높은 함흥 사투리로 말시비가 붙으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몸치장은 덜 하더라도 집 안에 있는 그릇은 빛이 나도록 반짝이게 닦는다. 남쪽에서 함흥 출신을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개성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함흥여자들로 어쩔 수 없는 지역 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북쪽에서는 함경도 여자를 최고의 신붓감으로 꼽는데 그 중 함흥여자들이 그렇다. 이름이 알려진 함흥 출신 여성에 대한 자료를 보면 조선 시대인 18세기 김삿갓의 일화로 유명한 가련(可憐)이라는 기녀가 있다. 가무에 능했던 가련은 시도 뛰어나게 잘 지어 당대에 그와 겨를 대상이 없었다고 한다. 지혜롭고 총명한 가련은 자신과 맞수를 할 사람이 없어 통곡을 잘했고, 84세까지 예인으로 칭송받았다. 김삿갓이 가련에게 쓴 이별 시 또한 가련해서 유명하다. 예인으로 역사에 전무후무했다는 가련이 함흥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한때는 번화했을 함흥을 상상하게 한다. 함흥 출신으로 조선희의 장편소설에 등장하는 주세죽이라는 여인이 있다. 아름다운 미모에 편안한 삶을 선택해도 되겠으나 그는 혁명이라는 회오리바람을 피하지 않았다. 상황은 운명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내쳤고, 병든 몸으로 딸을 찾아 떠났다가 타향에서 운명했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에 넋을 누가 달래줄까. 북쪽 고향인 사람에게는 누구나 친숙한 영화배우 문예봉도 함흥 출신이다. 문예봉은 북한에서 1949년 최초로 제작한 영화 ‘내 고향’에 출연하면서부터 사망하기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함흥여자에 대한 글을 쓰면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열변을 쏟던, 그리고 자식을 위해 헌신하던 함흥 출신 탈북 여성을 떠올린다. 가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억양 높은 목소리, 자신이 먹으려 준비한 쑥떡을 불쑥 내밀던 함흥여자는 지금 머나먼 타향에 있다. 그리고 삶을 풍요롭게 가꾸며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함흥 출신의 탈북 여성이 주변에 적지 않음을 보게 된다.
경기도의 미래발전 전략을 놓고 ‘경기분도론’이라는 큰 어젠다가 던져졌다. 본지는 이번 주 모두 5회에 걸쳐 경기북부특별자치도 설치 이슈를 심층기획 보도했다. 한강 수계로 구획된 경기북부지역의 상대적 저발전 문제는 여러 통계 지표들을 통해 실증되고 있었다. 경기북부지역 주민과 기업의 그간 고통과 인내에 보답해야 한다는 문제인식은 같으나 해법을 둘러싸고 중앙부처, 여야 정치권, 기초지자체 간 다양한 의견이 실타래처럼 얽혀있어 갈피를 잡지 못하는 형국으로 한 틀로 찍어내기가 어려워 보인다. 와중에 경기북부지역에 속한 고양시는 ‘경기북부경제공동체’ 제안을 하는 등 특별자치도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경기분도론은 1987년 집권 민정당이 대선공약으로 최초 제기해 지난 36년간 선거철만 되면 출몰했다가 사라지는 담론이었다. 다수..
사람들의 일상은 대체로 모르거나 아니면 모른 척 하는 삶이다. 산간 벽지에 의사들이 가지 않으려 그리 애쓰면서도 만약 그곳에 살고 있는 간호사가 일정한 법령에 의거하여 의료 활동을 하는 것(노인들 영양 주사를 놔준다든지, 감기몸살 약을 처방해 준다든지)에 대해서는 사활을 걸고 반대를 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제 그 시시비비에 둔감해 한다. 어차피 세상이 공정과 상식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진영의 싸움만이 노골화 됐는데, 그리하여 이제는 모두 북중러에 맞서는 한미일 전선에 투입돼야 할 판인데도 오로지 어떤 팝송을 불렀네, 만나서 뭘 먹었네, 어떤 여인이 뭘 입었네 하는 것만 가지고 입방아를 찧는다. 그마저도 그리 관심이 오래 가지 않는다. 잘못된 위정자는 국민의 무관심을 증폭시키고 그것으로 권력의 본래적 야욕을 감추려 한다. 역설적으로 개중 누군 가는 그러니까, 매우 정치적, 아니 권모술수적인 인간이라는 얘기이고 그런 인간이 있다는 얘기이다. 문화 쪽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가 그렇다. 여기가 대체로, 지금의 정부 마냥, 아수라장인데도 사람들은 넋 놓고 손 놓고 앉아 있다. 어쩌려고 그러는지 한숨이 나온다는 소리들이 많다. 그 이유는 생각해 보면 자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내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한다. 진작에 예상됐던 사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초반에 얘기도 많이 하고 걱정도 많이 하고 그랬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벽을 보고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정작 사태가 터지니까 뭔가 고치고 변화할 의욕마저 잃은 셈이 돼버린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는 현재 이사장과 집행위원장 모두가 공석이다. 형식적으로는 그렇다. 두 직책의 사람 모두 자진 사퇴를 했기 때문이다. 역시 형식적으로만 볼 때 시작은 허문영 집행위원장이 했다. 그가 사표를 던졌다. 그러자 부산영화제로 영화계의 비난이 쏟아졌고 이번엔 이용관 이사장이 그 책임을 진다며 사표를 던졌다. 둘의 사표가 이사회에서 수리될지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아마도 이 글이 나갈 쯤에는 이사회의 결정사항이 발표될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떻든 부산영화제는 그 초심의 생명력을 다했다. 둘이 사표가 반려되든, 두 사람 스스로 사퇴를 철회하든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영화계의 민심을 되돌리거나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초기 멤버들이 너무 ‘오래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도 18년을 했다. 부산영화제 멤버들은 다들 20년 넘게 자리를 이리저리 바꾸며 지켜 왔다. 당연히 새로워지지 않았으며 배가 산으로 갔다. ‘사이즈의 미학’ ‘레드 카펫의 사치스러움’ ‘스타 시스템의 행사’로만 치중됐다. 영화제는 20억원에서 시작해 140억원까지(코로나 이전) 예산을 키웠지만 정작 사무국 직원들의 복지는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모두 한국 최고의 영화제를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의 강제성이 횡행했다. 실로 전근대적이었다. 아는 사람들은 알지만 부산시에서 교부되는 지원예산은 경상비로 전환되지 못하는 시스템으로 돼있다. 직원들 월급과 경상비는 모두 기업의 후원협찬비로 충당해야 하는데 이게 ‘쥐약’인 것이 코로나로 모든 행사가 중단됐을 때 이 협찬금은들어 올 수가 없는 것이 돼버렸으며 따라서 직원 월급은 고스란히 은행 빚으로 남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쌓인 게 십수억원이다. 반면 지방자치단체 교부금을 경상비로 전환시키도록 시행령을 바꾼 곳은 전주와 부천, 제천영화제 등이다. 부산영화제는 그들처럼 되기 위하여 그간 부산시를 향해 정치적 법적 요구를 줄기차게 해왔어야 했다. 투쟁이라도 했어야 옳았다. 그런데 그 방향으로 가는 건 일찌감치 포기하고(시장과 싸우려 하지 않으려 했는지, 잘 보이려 했는지) 기업 마케팅을 강화하는 쪽으로 갔다. 그러니 당연히 영화제 운영에 있어 기업경영 논리가 우세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조직 내부의 갈등으로 비화할 소지를 키운 셈이 됐다 십여년전, 부산영화제가 승승장구할 때 미국 독립영화계의 태두 선댄스영화제의 존 쿠퍼 집행위원장이 온 적이 있다. 쿠퍼 위원장이 부산영화제를 둘러본 후 한 말은 지금 와서 보니 꽤나 선견지명이 있는 얘기였다. 그는 ‘영화제가 너무 크다’고 했다. ‘내실에 더 힘을 기울이는 게 좋다’고도 했다. 맞는 얘기다. 영화제는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상영관을 더 늘리고 영화를 2회, 3회 틀게 함으로써 관객들에게 관람 기회를 더 주고, 영화에 대해 사고하고, 또 그럼으로써 세상에 대해 보다 진실되게 걱정하게 하는 것, 그래서 정치적 문화적으로 연대하게 하는 것, 그것을 제1의 목표로 해야 한다. 부산영화제가 돌아가야 할 곳은 바로 영화 그 자체, 그 본질이다. 이용관 이사장은 과거 날카로운 평론가 출신의 대학교수였다. 그는 200자 원고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 써가며 평론을 썼다. 그는 멋있는 상남자였다. 영화제가 변질된 것은 어쩌면 그런 그가 평론을 쓰지 않고 글을 멀리 하면서부터일 수 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영화적 공과(功過)는 분명하다. 공만 있고 과는 없거나 과만 있고 공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 공과가 있는 법이다. 그건 박정희도 그랬고 문재인도 그랬다. 다만 질서 있는 퇴진을 계획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렸다. 이건 부산영화제 초기 멤버 모두에 해당하는 말이다. 세상사는 늘 그런 법이다.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오염수 대 처리수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 방류 계획과 관련된 뉴스가 연일 보도 되고 있다. 일본이 오염수 방류 계획을 실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정부의 시찰단이 방일 길에 올랐다. 그저 견학 수준이어서 들러리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도 있고, 오염수를 처리하는 과정에 대해 꼼꼼히 살펴볼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어서 시찰단이 어떤 역할을 할지 국민적 관심이 쏠려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처리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우리 언론들은 ‘오염수’로 부르고 있다. 오염수일까, 처리수일까. ‘처리수’ 명명의 효과 언어는 프레임(frame)이다. 프레임 안에서 사고하도록 하는 영향력이 있다는 의미이다. 일본에서는 다핵종제거설비(ALPS)를 통해 오염수에서 방사성 물질을 기술적으로 제거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이를 통해 방사성 물질을 제거했으므로 처리수라고 사용한다. ALPS를 통해 처리가 되었으므로 이후의 오염수 농도가 낮아져 처리수로 부른다는 주장이다. ‘처리수’로 명명함으로써 과학적으로 처리되어 바다로 방류하더라도 듣는 청중에게는 안전하다고 인식되는 심리적 효과가 있다. ‘처리수’와 ‘오염수’에는 과학이 있고, 국제 정치가 작동하며, 이웃 국가 국민들의 심리가 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이나 현상에 대해 이름을 붙여 부른다. 명명(命名)이다. 사회문화적 변화 가운데 언어는 그 인식을 보여준다. 영어권에서 의장을 의미하는 어휘로 남성적 의미가 강한 chairman을 보다 중립적인 chairperson으로 바꿔 사용하는 것은 남녀 성평등이라는 사회문화적 인식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인종, 성별(젠더), 계층, 지역, 국제관계 등의 편견을 제거하고 보다 인간다운 언어 사용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80년대 미국에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사회 운동이 대두되었다. PC주의는 언어 표현이나 용어 사용에 있어서 편견과 차별을 배제하자는 의미에서 평등과 인권주의라고 하겠다. 정치적 올바름의 조건 과학은 객관성을 지닌다. 공개적으로 검증 가능해야 한다. 현재의 이론은 후속 연구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수정된다. 사회과학에서 연구하는 기본 철학이다. 일방적으로 ‘처리수’라고 명명한다고 해서 ‘오염수’가 ‘처리수’가 되지는 않는다. 국제기구와 전문 과학자들이 중립적으로 독립적으로 공개적으로 검증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결과로 확인 가능할 때 ‘처리수’가 될 수 있다. 방류가 현실화된다면 생선회나 수산물은 이제 못 먹게 되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런 불안이 고조된 가운데, 일본은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을 재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설령 과학적으로 오염수가 처리수가 된다고 해서 불안감이 바로 해소되는가. 국민 심리적으로 또 실제적으로 안전에 대한 확신이 설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과학의 장기적 결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다.
코로나19로 인한 여행 제약이 풀리면서 외국인 관광객이 증가하고 있다. 정부는 물론 각 지방정부들이 해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경기도 역시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관광자원 개발과 홍보, 해외마케팅과 팸투어 등에 나섰다. 지난 22일에도 도는 한국관광공사와 함께 일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JTB, HIS, 라쿠텐트래블 등 일본 주요 여행사 관계자를 초청해 수원에서 팸투어(홍보 목적 답사)를 실시했다. 참가자들은 수원화성과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그해 우리는’ 촬영지인 수원 장안공원 일대, 지동벽화마을, 행궁동 카페거리 등을 방문하고 화성어차 탑승, 한복 착용 등의 체험을 했다고 한다. 도 관계자는 최근 대일관계가 개선되면서 이론 관광객 수가 많아졌다면서 도내 한류관광 콘텐츠를 활용한..
지난 5월 10일은 윤석열 정부 출범 1주년이었다. 언론 지상에 그러한 1년의 성과와 과오를 분석하는 특집 기사들이 넘쳤다. 기사마다 빠지지 않은 것은 정치, 사회, 경제 전반의 심각한 퇴행 상황이었다. 1주년 당일, 보수의 아성이라 불리는 대구에서 터져 나온 시국선언은 정부에 대한 시민사회의 총체적 평가라 불러야 마땅하다. 이 도시의 25개 시민단체는 이렇게 단언했다. “민생을 파탄시키고, 민주주의를 짓밟고, 평화를 파괴하는 윤석열 정권을 심판하는 투쟁에 모두가 나서야 한다”. 왜 이토록 혹독한 평가가 나올까. 3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불통(不通)이다. 필수적 대화 상대와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취임 1년이 지났는데도 제 1야당 대표와 공식 회담을 갖지 않은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상 윤석열 대통령 밖에 없다. 서열과 관례 상 하위에 있는 야당 원내 대표 혹은 국회 상임위원장들과 만남은 적극 제안하면서도 정작 당 대표는 제외한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당시 야당 총재는 집권 기간 내내 격렬히 충돌했다. 그럼에도 무려 7차례나 공식 회동을 했다. 삼권 분립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소통과 타협은 대통령의 절대 의무다. 안 하고 싶다고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란 뜻이다. 그럼에도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질까. 자기주장만 설파하고 남 의견을 듣기 싫어하는 일방주의 때문이다. 바다 건너 일본 총리와도 공식적으로 2번이나 회담을 가지지 않았는가. 좁쌀 같은 포용력에 대한 비판이 여기에서 나온다. 감정적 대응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정책 협력 대상인 야당을 무시하는 행태가 곧 민주주의 본질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불안(不安)이다. 이태원 참사로 대변되는 사회 안전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외교 안보 영역이 불안하다. 2000년대 초반 영국 수상 토니 블레어는 국제사회에서 ‘부시의 푸들’이란 별명을 얻었다. 윤석열 정부의 대외정책은 어떤가. 가히‘미국과 일본의 푸들’로 불러도 과언이 아닌 1년이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전략의 총대를 매고 스스로 한미일 삼각동맹의 첨병이 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갈등이 격화되고 한반도가 급속히 충돌과 균열의 신냉전 국면으로 내몰리는 중이다. 문제는 이러한 편향 외교와 맞바꾸어 일본의 고의적 역사책임 망각과 회피를 대통령이 앞장서서 용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100년 전 일로 일본이 무릎을 꿇어야 한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문제적 발언이 이를 상징한다. 가해자의 논리에 오히려 힘을 보태고, 역사적 피해국가의 수장으로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언사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태도는 곧 미래 행동의 예고다. 이러한 역사인식이 어찌 불안하지 않으랴. 셋째는 불신(不信)이다. 4월 말의 워싱턴 국빈 방문에서 희대의 해프닝이 벌어졌다. 정상회담 후 대통령실 핵심 책임자가 미국과 한국이 ‘사실상의 핵공유’를 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그러자 미국이 바로 그것을 받아서 부인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가관인 것은 이러한 미국의 반박이 나오자 “(핵공유) 용어에 대해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어이없는 견강부회를 내놓았다는 점이다. 백보를 양보하여 대통령실의 해명을 믿는다 해도, 이 같은 기괴한 논란이 나라 바깥에만 나가면 터져 나오는 것을 도대체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언론과의 관계도 상호불신으로 가득하다. 대통령 후보자 신분으로 참석한 2022년 4월 신문의 날 축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언론과의 소통이 국민과의 소통”이라 강조했다. 하지만 1년 동안 그의 실천은 정반대를 향해 달렸다. 비판적 언론에 대해서는 불신을 넘어 적대적 태도까지 취하고 있다. 이른바 “바이든 날리면” 사건과 관련하여, mbc 기자들에 대한 대통령 전용기 동승 불허가 이를 표상한다. 목하 외교부와 mbc 사이에 소송이 진행 중일 정도다. 대통령은 왕이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언명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그저 5년 간 행정부 수반으로서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지난 1년간 윤석열 정부의 3가지 불(不)이 이끌어낸 재앙적 결과를 생생히 목도하고 있다. 비 선출 검찰권력이 무소불위 핵심 통치 수단으로 등장했다. 노동, 문화, 표현자유 등 시민사회 전 영역에서 저항을 억누르고 비판의식을 위축시키기 위한 광범위한 공격이 본격화되고 있다. 패션쇼를 방불케 하는 과시적 행정의 커튼 뒤에서 (낡은 레코드판을 돌리는) 신자유주의 양극화와 인구 소멸이 가속화 중이다. 대중국 수출 격감을 필두로 하는 무역수지 악화와 경기 후퇴의 악몽이 눈앞에 닥쳐왔다. 하지만 지난 1년과 같은 불통, 불안, 불신이 계속되는 한 위기 극복의 기대는 난망(難望)일 수밖에 없다. 브레이크 없는 폭주를 멈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정권의 패배를 넘어 국민 모두의 패배라는 비극이 눈앞에 펼쳐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