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팔을 턱에 괴고 무언가 골똘히 사색에 잠긴 남자. 고뇌하는 인간의 형상이 이처럼 고귀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 오귀스트 로댕(August Rodin)의 조각상이다. 예순두 살에 완성한 작품답게 원숙미가 물씬 풍긴다. 이 유명한 작품의 제작자 로댕. 그는 신성불가침 시대 인간의 본능과 관능, 그리고 고통을 매우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한 시대의 예술을 이끈 거장이었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초라했다. 근시로 인해 학습장애를 겪고 국어도 제대로 못하는 학습 부진아였다. 이런 그가 유일하게 흥미를 갖고 즐거워 한 것은 스케치. 그의 부모님은 열네 살 된 아들을 데생과 수학을 공부할 수 있게 파리의 특수학교에 입학시켰다. ‘작은 학교(Petite École)’라 불리는 이 학교에서 로댕은 훌륭한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조각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리의 명문인 에꼴데보자르(미술대학) 콩쿠르에 세 번이나 낙방했다. 데생 점수는 넘쳤지만 조각 점수는 언제나 모자랐기 때문이다. 이런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당대 최고의 조각가 카리에-벨뢰즈를 만난 것이다. 로댕은 이 대가와 일하면서 그의 아틀리에에서 5년간 머물렀다. 이 협업이 끝나자 바로 벨기에 조각가 앙뚜안 판 라스부르와 함께 브뤼셀 왕궁에 문양을 넣어 장식하게 됐다. 서른일곱 살 때 제작한 ‘청동시대’는 그를 스타로 만들었다. 브뤼셀과 파리 살롱에 전시된 이 조각상은 대 히트를 쳤다. 프랑스 정부는 구리와 주석으로 된 이 거대한 조각상을 거금을 주고 사 들였고, 로댕에게 아틀리에까지 선물로 줬다. 사교계의 상류층은 로댕을 그들의 초상화가로 지정했다. 프랑스 정부는 높이 7미터, 무게 8톤의 거대한 ‘지옥의 문’을 주문했다. 바야흐로 로댕의 황금기가 시작됐고 주문은 쇄도했다. 성공가도를 달리는 로댕은 오드센 지방의 뫼동(Meudon)을 좋아했다. 이곳의 고요와 적막은 그에게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센 강가의 언덕들과 비탈길이 많고 강과 계곡 간 고도 차가 150미터나 돼 그림처럼 아름답다. 남쪽의 가장 높은 곳에는 뫼동 숲이 있고, 중턱에 파리가 파노라마처럼 한 눈에 들어오는 벨뷔가 자리 잡고 있다. 로댕은 여기서 애인 로즈 뵈레와 살았다. 일요일이면 그는 로즈를 ‘나의 농장주’라 불렀고, 그녀는 로댕을 ‘내 영감’이라고 짓궂게 대꾸했다. 천재 조각가가 작업을 하는 동안 그녀는 손수 요리를 했다. 뫼동은 프랑스 역사의 중심지로 시대를 막론하고 왕족과 귀족들의 로망의 땅이었다. 중세에 건축된 뫼동성에는 에땅프 공작부인, 로렌 추기경, 아벨 세르비앙과 루브아 후작 등 수 많은 귀족이 살았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 황태자 몽셰뇌르가 이곳에 오면서 뫼동은 영광의 시간을 맞이했다. 지금 그 자취들이 우아하게 남아있다. 파리의 지근거리에 있는 뫼동. 몽파르나스 역에서 기차를 타고 달리면 10분에 도착한다. 로댕을 사모한다면 파리여행 때 이곳을 잊지 말고 꼭 들러보길 권한다.
오래 전 일이다. 강남 8학군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는 친구가 학부모 상담을 하고 나서 초등학교가 머지않은 시일 내에 보육기관으로 바뀔 것 같다고 했다. 그곳의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질 좋은 교육을 기대하지 않고 보육과 사회성 기르기만을 원한다고 했다. 필요한 교육적 부분들은 사교육에서 채우고 있으니, 그저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들하고 원만하게 지내면 족하다고 했다고. 상담의 내용들이 학교에서 교육은 필요 없고 보육이나 잘 해주면 장땡이라는 식이어서 친구가 상담 내내 자괴감이 들었다고 했다. 친구가 말했던 게 다 들어맞는 건 아니지만 초등학교가 보육기관이 될 것 같다는 예언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 되었다. 내년부터 초등학교는 아침부터 저녁 8시까지 12시간 아이를 데리고 있는 보육기관이 되었다. 공공기관 사업 특성상 한번 들어오기는 쉬워도 빼기는 어렵다. 특히 아이들 대상으로 하는 사업은 그렇다. 일단 시작되면 돌이키기 쉽지 않을 거다. 돌봄 교실 시간이 늘어난다고 해서 교사가 크게 반대할 이유는 없다. 새로운 사업도 아니고 이미 돌봄이 이루어지는 상태에서 마감이 몇 시간 연장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건 없다. 돌봄은 자리 잡은 사업이고 시간이 늘어나며 발생하는 돌봄 전담사 채용 문제는 교사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그러니 힘겨운 맞벌이 부부를 위해 학교가 공간을 내주는 걸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사들은 돌봄 교실 시간 연장을 반대한다. 이유가 뭘까. 돌봄에 주로 참여하는 1, 2학년 친구들은 하루에 4차시에서 5차시 정규 수업을 받는다. 초등학교는 1차시에 40분이니 시간으로 따지면 160분에서 200분 정도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까지 포함한 일과 시간이 끝나면 1시 10분에서 1시 50분 정도가 되는데 이때부터 저녁 8시까지는 6~7시간 정도가 남는다. 방과 후 학교에 가서 이런 저런 것들을 배워도 시간이 남아서 그때부터는 돌봄 교실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고, 영상을 봐야 한다. 매일 반복된다. 글로 쓰니 썩 나빠 보이지 않는데 한 공간에서 12시간씩 머무르는 게 아동 정서에 좋을 리 없다. 교사이자 어른인 내가 8시간 이상 학교에 앉아있는 것도 힘든데 아이가 12시간씩 같은 공간에 있는 게 과연 발달에 건강한 영향을 끼칠지 미지수다. 저녁 8시 즈음에 하교하는 아이는 집에 가서 씻고 잠들었다 다음 날 학교에 바로 와야 한다. 직장인도 8시까지 출근했다가 8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오래하면 병이 난다. 교사들이 반대해도 12시간 돌봄은 추진될 거다. 실제로 저녁 8시까지 일하는 분들은 아이가 학교에 오래 있는 게 안타깝지만 다행이라는 반응이다. 결국 부모 퇴근 시간을 앞당기지 않으면 8시 하교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부모의 직장 생활을 위해서 아이들을 학교에 잡아두는 것보다 부모와 아이를 빨리 집에 보내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근로 시간이 늘어나야 우리 모두가 잘 산다는 사회에서는 가족이 집에서 뭉치는 게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어 간다.
제42회 스승의 날이 다가온다. 우리는 조선왕조의 유교 유산인 성리학적 주류문화와 함께 역사적으로 교육열 DNA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강한 민족이며, 금융 분야 등에서 지배적 위치에 있는 유태인들과 비견될 정도이다. 교사생활을 했던 박정희대통령은 재임시절 조국근대화의 핵심기제로 교육을 선택했다. 1968년 국회 만장일치로 통과된 국민교육헌장은“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해 어떻게, 어떤 가치로 교육할 것인가를 담아 교육 지표로 삼았다. 그 시절 초등학교를 다녔던 세대는 전문을 암송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추억을 하나둘씩 가지고 있다. 문민정부 수립 후 1994년 폐기되어 역사의 유물로 남았지만, 근대화의 주요 수단이 교육이었다는 방증으로 자리했다. 20세기 초 식민통치를 겪고, 연..
며칠 전 밤에 귀가를 위해 내리막 도로를 운전하는데 갑자기 ‘펑’하는 굉음에 차를 세웠다. 이미 차는 정상적인 주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덜컹거리고 있었다. 겨우 갓길에 주차하고 살펴보니 오른쪽 바퀴가 완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도로 이물질에 타이어가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일단 차를 옆으로 옮기고 보험사 긴급출동을 불렀다.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린 끝에 긴급출동 기사가 도착해 차를 살피고 있는데 경찰 패트롤카가 왔다. 정신없는 와중에 대뜸 음주측정기를 들이밀었다. 차가 어떤 상태인지 살핀 후에 하자고 하니 막무가내였다. 결국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공무집행 중이니깐.. 비상타이어로 교체하고 현장을 벗어난 후, 다음날 앞바퀴 두 쪽을 모두 교체한 뒤에야 상황이 종료되었다.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상황이 종료된 후 곰곰이 생각해보니 경찰의 대응이 못내 아쉬웠다.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 선후가 어긋났다는 느낌이었다. 수습을 돕고 난 이후 음주측정을 해도 될 문제였다. 화투패를 거꾸로 치는 경우가 어디 경찰 뿐이랴? 5월 10일로 취임 1년을 지난 윤석열정권. 대한민국의 지난 1년은 말 그대로 나락을 향한 폭주였다. 내리막길에서 질주하다 펑크가 났다. 일단 안전조치를 한 후 사고수습을 해야 할 상황에 음주측정기부터 들이대고 윽박지르는 꼴이다. 지난 1년 대한민국의 무역적자 600억 달러, 부자감세와 경기침체로 재정적자는 깊어지고 금융위기까지 우려되는 상황, 그런데 입만 떼면 전 정권 탓이요 야당 때문이란다. 취임 1년이 지나도록 불어대는 나팔이 똑같은 타령뿐이라면 이건 나팔수를 잘못 뽑은 것이 아닐까? 미국에서 노래 한 곡 부르고 돌아오니 길거리마다 역대급 방미외교라며 자화자찬 현수막이 나붙었다. 나가기만 하면 조마조마하며 지켜보던 어떤 분 왈, “영부인이 옆에서 탬버린까지 치지 않은게 다행스러웠다” 느닷없이 찾아온 기시다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만 남기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말 안해도 알아서 사죄로 이해해주고 난제가 생기면 먼저 해법까지 마련해주니 일본 입장에선 ‘우리 윤석열대통령’이다. 그러니 일본언론들은 “총리가 더 확실하게 사죄표명을 했어야 한다. 국내반발을 무릅쓰고 관계회복을 밀어부친 윤대통령을 배려했어야 한다”고 되려 걱정해주었다.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민주노총 강원건설지부 양양, 속초, 고성을 맡았던 3지대장 양희동 씨는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앞두고 온몸에 불을 질렀다. “먹고 살려고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습니다. 억울하고 창피합니다”라는 유서를 남긴채. 현해탄과 태평양을 넘나들며 배려가 넘치던 대통령은 건설노동자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건폭이 근절될 때까지 엄정 단속하라”는 대통령의 하명이 불러온 무리한 수사가 빚은 참사였다. 대통령은 알고 있었다. 수렁에서 헤어날줄 모르는 지지율에 특효약은 북한때리기와 노조때리기 두가지 뿐이라는 것을.. 외교가 파탄지경이 되고 나라경제가 거덜이 나면 죽어나는 것은 가장 힘없는 노동자, 서민계층일 뿐이다. 정권의 폭주가 이어지는 한 벼랑끝에 몰린 노동자의 존엄사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아. 이제 겨우 1년이 지났다니, 아니 4년이나 남았다니. 이 찬란한 봄날에 나는 절망하고 있다.
책을 쓰고 책을 만들고 책을 알리는 책문화 현장의 최전선에 있다 보니 세상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난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출판저널’ 편집부 책상에는 출판사에서 만든 새로 출판된 도서들이 쌓이는데 손님처럼 도착한 책들을 검토하다 보면 책은 시대를 기록하고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점을 실감한다. 최근 출간된 책 중에서 ‘세계를 이끈 경제사상 강의’에서 유독 눈길을 끌었던 대목은 ‘한국은 진정한 선진국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하다. 이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하기 어려우면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우리나라는 강대국인가? 우리나라는 경제강국인가? 우리나라는 선진국인가? 어려운 질문일 수 있겠다. 첫 번째 질문, 우리나라는 강대국인가? 이 책을 쓴 경제사상가 김민주 저자에..
인천시가 재외동포 지원을 위한 전담 기구인 재외동포청 유치에 성공했다. 8일 유정복 인천시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재외동포청을 인천에 유치했다고 공식 발표한 것이다. 다만 본청 소재지는 인천, 통합민원실통합민원실인 ‘재외동포 서비스지원센터’는 서울 광화문에 두는 것으로 결정됐다. 물론 인천 본청에서도 민원업무를 볼 수 있다. 인천시는 전체 직원 151명 중 서울 광화문 통합민원실에 배치될 인원이 20명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소재지가 확정된 직후 인천시는 6월 5일 인천에 들어서는 재외동포청의 차질 없는 출범과 안정적인 업무개시를 위해 적극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먼저 10일 이내로 청사가 들어설 곳을 발표할 예정이다. 현재 청사 위치로 거론되고 있는 곳은 송도 미추홀타워나 글로벌캠퍼스, 영종·청라 등지다. 시는 자체적으로 ‘웰컴센..
2012년 8월 10일,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했다. 그 이후에도 적지 않은 대한민국 정치인들이 독도를 방문했다. 이번 더불어민주당 전용기 의원의 독도 방문도 여기에 포함된다.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을 포함한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독도를 방문할 수 있고, 이것이 특별한 뉴스가 될 이유가 없다. 마치 어떤 정치인이 부산이나 제주도를 방문했다고 뉴스가 될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다. 그런데 민주당은 이번 기사다 일본 총리의 방한 때, 윤 대통령이 “일본의 독도 침탈”에 대해 한마디도 따지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민주당의 주장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민주당은 집권 경험이 있는데도, 이런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도를 “실효 지배”를 하고 있다. 우리의 경찰이 독도를 수비하고 있고, 독도에 주민등록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도 다수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일본은 안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본은 어떻게든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일본이 수시로 독도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도, 독도가 분쟁지역이라는 이미지를 세계에 심기 위해서다. 이런 차원에서 일본은 자신들의 “궤변”에 대해 우리가 반발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우리의 반발이 심할수록, 분쟁지역이라는 이미지를 전 세계에 쉽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일본은 한일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오히려 바랐을 수 있다. 이런 사실을 민주당이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당은 집권을 3차례나 했었고, 특히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일본의 이런 의도를 충분히 파악하고, 그 의도에 말리지 않기 위한 외교를 펼쳤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이런 주장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다. 현재 전 세계에는 영토 분쟁을 겪고 있는 국가들은 많다. 미국과 캐나다의 영토 분쟁을 예로 들 수 있다. 미국과 캐나다는 머차이어스 실 아일랜드(Machias Seal Island)를 두고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데, 이 지역은 해산 자원이 풍부하고 중요한 뱃길이 지나는 지역이기 때문에, 미국과 캐나다 모두 양보할 수 없는 지역이다. 현재 이 지역은 캐나다가 “실효 지배”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안달이 나는 측은 미국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캐나다가 먼저 이 문제를 거론하지는 않는다. 항상 실효 지배를 하는 국가는, 해당 지역이 분쟁지역으로 인식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지적하고자 하는 점은, 분쟁지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국가가, 전쟁과 같은 무력 분쟁을 통하지 않고, 스스로 해당 지역을 상대 국가에 넘겨 준 경우는 없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 정권이 독도 문제에 있어 일본에 양보하려 든다든가 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외교부가 일본의 독도 망언에 정식 항의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국내 정치판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는 것은, 대한민국을 위해서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2022년 2월 24일,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이 군사적 충돌로 확대되면서 대러 무역에 많은 장애 요인들이 발생하였다.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대규모 경제제재가 쏟아져 나오고, 대러 제재에 동참한 한국까지 ‘비우호국’ 명단에 포함되어 현장에서 체감하는 긴장 수위는 더욱 높아만 갔다. 미국과 유럽의 지속적인 제재 강화, SWIFT 차단 및 물류 보험 중단 등 날마다 악화되는 현지 상황을 접하면서 만일’이라는 최악의 상황인 ‘퇴로’(退路) 확보에 대한 대비까지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경기비즈니스센터(GBC) 모스크바 사무소 역시 비상근무 체제로 돌입했다. 경기도 중소기업, 현지 한국 기관 및 러시아 바이어 등 가용 네트워크를 총동원하여 6개월간의 실시간 동향 보고, 향후 대책 마련과 대응을 위해 진땀을 뺐다. 하지만 “위기는 곧..
2023년 봄 대한민국은 정치 현수막으로 거리 곳곳이 더러워지고 있다. 정치라는 이름 아래 용산에서, 여의도에서 평행선을 그으며 극단으로 치닫는 이전투구식 싸움판이 시민의 생활공간 속으로 파고들어 적나라하게 재연되어 펼쳐진다. 현수막이 차지한 곳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나 국민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자리를 잡을 공간이 없다. 독선과 아집, 공격만이 우뚝 서있어 타협과 양보를 뿌리로 하는 민주주의는 위태롭다. 가끔식 정제된 표현도 보이나 아주 적은 숫자에 불과하다. 현직 대통령은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이고, 야당은 ‘돈봉투에 쩐’당이다. 적과 아군으로 구분하는 군사문화적 잔재와 선과 악으로 세상을 보는 이분법적 사고에 기반한 ‘낙인찍기’식 프로파간다 전술이다. 현수막 홍수 속 시민들은 눈에 강제로 들어온 문구를 수동적으로 읽고 화가..
개전 2년째를 맞이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소모전으로 이어지며 ‘인내심 싸움’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배후지원 세력인 서유럽은 단일대오 실종으로 ‘반러연대’가 흔들리고 있는데다, 전쟁장기화로 인한 탄약· 미사일 등이 고갈 상태에 이르러 전쟁양상은 미국 등 서방이 원하는 방향대로 굴러갈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동시에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뜻밖의 수혜(미국의 동북아 집중도 저하, 러시아의 중국 의존 제고)를 입고 있는 중국이 종전 내지 휴전을 위한 중재 의사를 비추고 있는 것은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으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전황과 정세 변화는 서방의 입장에서 ‘플랜B’ 준비와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미국은 먼저 희망적 사고를 버리고 냉혹한 실상을 깨닫는 것이 우선이다. 아무리 우크라이나가 발버둥을 쳐도 러시아군을 패퇴시키거나 극적인 돌파구를 만들 수 없는 중과부적의 실상이다. 미국의 희망은 우크라이나 군이 푸틴을 밀어붙여 푸틴으로 하여금 평화협상무대로 나오도록 하는 것이지만, ‘반러연대’의 흔들거림 등으로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전략적 중립화란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기 전에는 협상장에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중국의 역할이 주목받는다. 전쟁 수혜국인 중국은 유럽과 드리워진 펜스를 고치려고 노력해왔다. 무역, 투자, 첨단기술 습득을 위해서는 유럽과의 일정한 관계유지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약점을 가진 중국이 오랜 앙숙이던 사우디와 이란을 성공적으로 중재하듯 우크라이나전 마저 독자적으로 중재에 성공한다면, 중국은 평화와 하모니에 헌신하는 이미지를 휘날리게 되고, 미국은 ‘쇠퇴 국가’ 이미지를 심어주게 될 것이다. 이에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미국은 냉전이 절정을 이루던 시기에 벌어졌던 1967년 6일 전쟁과 1973년 중동전을 구소련과 합동으로 종전시켰던 전례를 다시 들추어낼 필요가 있다. 지금의 상황이 그때와 비슷한 만큼 러시아의 자리에 중국을 집어넣으면 그림이 그려진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종전을 위해 일시적으로 나마 중국에 손을 내밀어 공동중재자 역할에 나서는 것이다. 중국을 미국과 대등한 지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중국 견제에 주력해온 미국 정책당국자들의 입장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전쟁 장기화로 인한 손실보다 이득이라고 본다. 동시에 우크라이나도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국가적 자존심이 상하지만 ‘밀리언 다이얼로그(Meliandialogue)’의 교훈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밀리언 다이얼로그는 부상하는 아테네가 약소국가 밀로스 섬에 장군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밀로스 섬 주민 1500여명을 몰살시킨, 가슴 아픈 약소국의 설움을 상징하는 단어다. 국제 사회에서 힘이 판치는 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보면, 러시아의 현 점령지를 인정하는 선에서 휴전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이다. 아울러 우리가 우크라이나를 보다 적극 지원하는 것은 고심의 한 수다. 올해 안으로 종전 노력이 배가된다면 우크라이나 재건문제가 숨은 이슈가 될 것이고, 우크라이나 재건 시장 참여를 위해서는 일정한 기여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군사적 지원은 불가피한 조치이다. 전후 재건 시장 참여는 반도체 수출 저조로 힘들어진 우리 경제를 또 다른 차원에서 일으킬 수 있는 영양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