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보며 음악을 떠올릴 때가 있다. 미치도록 좋아하는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1882-1967)의 그림을 보면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Gymnopedies)가 흐른다.(느껴진다) 옛 그리스어로 ‘벌거벗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인 짐노페디는 슬픈가락이나 어둡지 않고 단음 선율인데 불협화음이 느껴진다. ‘고독’만으로 말해질 수 없는 호퍼의 그림을 부연해준다. 그런데 그의 그림에서 ‘브람스 4개의 소품 op.119 중 1번 인터메조 b단조’를 듣는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브람스와 호퍼의 저주받은 사랑. 스승의 아내를 평생 짝사랑한 브람스의 사랑 이야기는 모르는 이가 드물지만, 호퍼의 사랑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살았을 때도 슬펐던 사랑이 후세에 더 슬프다. 호퍼가 살던 시대의 미국은 어떤 곳이었나. 19세기 후반의 미국은 거대한 땅덩이, 천혜의 넘쳐나는 자원, 그리고 프론티어 정신으로 거세게 용틀임했다. 유럽이 20세기 들어서면서 세계 1,2차 대전으로 망가지고 있을 때 대서양 건너편에 있던 미국은 공업국, 산업국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호퍼는 1920년대의 대공황 혼란기에서 급속도로 발전한 미국, 그것도 미국의 심장부 뉴욕에 살며 도시화 과정의 편린을 화폭에 담았다. 그의 가슴을 친 것은 도시의 발전상이 아니라 그림자들이었다. 그의 그림을 나타내는 단어, 고독, 상실, 소외등은 그가 죽을 때까지 그림의 상징으로 따라다녔다. 그의 그림은 ‘도시와 고독’ 두 단어로 설명된다. 지난 주, 뉴욕 휘트니 미술관과 공동 기획으로 전시 중인 서울 시립 미술관의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를 관람했다. 관람객들의 실망의 소리를 미리 듣고 왔다. 호퍼의 대표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1942년작/Nighthawks)’이 빠졌다느니, 호퍼 자신이 흑역사라고 한, 호구지책으로 그렸던 삽화 전시가 다수라느니, 하는 투덜거림이었다. 그러나 나는 호퍼의 1914년작, ‘푸른 저녁(Soir Blue)’을 본 것만으로 배가 불렀다. 어둠이 내리는 파리 카페의 한 쪽 귀퉁이 풍경을 그린 것으로 손님 등 7명의 사람이 나오는데 가운데 앉아있는 흰 옷의 피에로가 눈에 확 들어온다. 호퍼, 자신을 그린 것이다. 압권이다. 화장은 이목구비와 표정을 지운 게 아니라 슬픔을 덮었다. 그래서 더 슬프다. 호퍼는 청춘시절, 파리에서 만난 한 여인을 10년 넘게 짝사랑했으나 버림 받았다. 그 후 그려진 그림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고 보는 걸까. 중국영화 ‘패왕별희’에서 평생 시투를 사모했던 두지(장국영분)가 시투의 결혼 후 버림받고 지은 표정이 겹쳐지자 100년 전 그의 감정이 전이돼 심장을 누른다. 브람스는 (앞에 언급한) 음악을 1893년, 클라라 슈만에게 선물하며(그것도 자신의 생일에) 이렇게 말했다던가. ‘각 음표와 각 마디는 마치 리타르단도처럼, 각 음표에서 고독감을 이끌어내는 것처럼 가슴에 와 닿아야 합니다’ 브람스의 사랑을 모르면 '고독'이란 단어는 오독된다. 호퍼 그림을 장악하고 있는 '도시와 고독'도 마찬가지. '푸른 저녁'의 도시와 고독은 호퍼의 사랑을 알아야 읽을 수 있다.
여야 정치권이 교사의 교육권을 박탈하는 무고성 아동학대 신고를 막는 아동학대처벌법 개정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소모적 정쟁에 매몰되어 민생을 등한시 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국회가 모처럼 제 역할을 하고 있다. 향후 입법과정에 대한 기대가 크다.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 2001년 개봉된 영화 ‘친구’에서 담임 선생 역을 맡은 김광규의 명대사이다. 5공화국 시절 바닥을 기는 학생 인권, 그리고 체벌을 당연시하는 폭력교사의 모습과 불량 학생들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그 시절 학교생활을 했다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거나 목격한 한국 교육현장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어 우리들 뇌리에 각인시켰다. 1987년 6.10민주항쟁 결과물로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이에 발맞추어 교육현장에서도 무소불위에 가깝던 교권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서 학생인권..
1760년, 충청도 예산의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서녀였다. 여자아이가 공부하는 것을 금기시하던 시대에, 완숙은 그 악조건에 굴하지 않고, 남자형제들 공부할 때 옆에서 성실하게 귀동냥했다. 훗날 학자들도 놀라게 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그 총명한 딸을 특별히 사랑했다. 용하다고 소문난 점쟁이가 사나운 팔자이니 재취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 하여 부모는 결국 그 점괘를 받아들였다. 이내 향리에서 알아주는 양반집 홍씨네 며느리가 된다. 남편은 어린 아들 하나를 둔 사별한 홀아비였다. 독한 시집살이를 당연하게 여기던 시대에, 양반집 며느리로서, 또 전처소생에게는 계모로서, 완숙의 덕행은 완벽했다. 자신의 딸을 포함하여, 남편을 제외한 4인 가족은 완숙의 헌신과 지혜 덕에 참으로 좋았다. 그는 고품격이었다.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다. 행복은 짧았다. 모든 것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비극이 들이닥쳤다. 망국적인 파당정치였다. 그들은 경우에 따라 임금도 얼마든지 손을 볼 수 있었다. 노론 벽파가 자파세력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현군(賢君)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인 것이 그 한 사례다. 그와 같이, 당파싸움에 몰두한 패거리들은 정적이나 위협세력은 필요한 경우에 얼마든지 개돼지 잡듯 잡아죽였다. 그들에게 나라와 백성들은 "회쳐먹고 찜쳐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먹는" 먹거리일 뿐이었다. 안전하고 부강하고 덕이 넘치는 나라로 발전시킬 능력도 비전도 없었다. 자존심 팽개친 거지처럼, 또는 시시하고 위선적인 왈패처럼 개인의 영달과 당파의 이익을 탐할 뿐이었다. 천주교가 정치의 뜨거운 재료로 등장했다. 초기에 서학(西學)이라고 불린 데서 알 수 있듯이 서양에서 전래된 신학문으로 여겨졌다. 조정에서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서학은 천주교로 옷을 갈아입는다. 성리학의 세상에 그 대칭의 세계관이 등장한 것이다. 평등주의와 내세관이 핵심사상이었다. 임진ㆍ정유 8년 전쟁에 이어 끝도 없이 지속되는 내우외환의 조선은 "평생 백 가지 질환으로 숨을 헐떡거리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중환자"(임경업 장군 어록)였다. 지배층의 권위가 무너진 상태에서 천주교는 그 마력적인 교리로 기층민초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강완숙은 어려서부터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스무살이 되기 전에, 비구니 학승들이 사는 절에 들어가 삶의 의미를 멈춤 없이 따지며 깊이 파고 들었다. 1년 후, 만족하지 못한 채 하산했다. 그리고, 결혼하면서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의 전교능력은 탁월했다. 공맹사상에 조예가 깊은 점이 주효했다. 그는 '윤지충 패륜사건'(부모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웠음)으로 발발한 신해박해(1791년) 때 감옥에 갔던 교우들에게 음식을 해나르다가 첫번째 옥고를 치른다. 출옥 후 남편과 헤어지고 시어머니와 아들 딸과 함께 서울 회현동으로 이사하여 본격적인 전교활동을 펼친다. 조선은 2천년 천주교 역사를 통틀어 여러 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선교사가 파견되기 전에 교세를 갖추고, 그 교도들이 선교사를 갈급히 요청하여 성사된 나라라는 점이다. 1호 선교사 주문모 신부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밀입국한다. 1794년 12월이었다. 신해박해의 여파로 주신부의 선교활동은 살얼음판 행각이었다. 밀고로 통역 최인길, 측근 윤유일과 지황이 끌려가서 신부의 소재에 관한 심문에 함구하다가 장살(杖殺:매맞아 죽음) 당하자 이혼과부 완숙이 신부를 자택에 은닉했다.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물경 6년이었다. 정약용 채제공 등 남인 출신 인재들과 높은 팀웍으로 개혁정치를 펼치던 정조는 천주교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었다. 그가 죽은 것(1800년)이다. 열살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 순조다. 소년은 정순왕후(영조의 후처)의 컨트롤을 받는 꼭두각시였다. 노인은 "천주교는 사론(邪論)이다. 씨를 말리라"는 어명을 선포한다. 이것이 신유박해다. 그 조치는 다섯 집가운데 한 집에서 천주교도가 나오면 모조리 처벌하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핵심이었다. 전국을 감시와 밀고의 지옥으로 만든 것이다. 이로써 정약종 이승훈 이가환 이벽 등 선구자들 100여명이 참수되고, 평신도 400여명이 사형당했다. 주신부는 이 위험천만한 시기에 그를 최초의 여신도 회장으로 임명했다. 능지처참 당한 황사영은 백서에 "조선의 카톨릭 역사에서 강완숙의 공을 따를 사람은 없다"고 썼다. 그는 여섯 차례의 주리를 트는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의연했다. 형리들은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아들 필주도 같은 고문을 당하면서 배교의 기미를 보이자, 내세를 포기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모자는 함께 참수당했다. 주문모 신부는 국경까지 도피했으나, "네가 지금 어디로 가느냐.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한양으로 돌아가서 "내가 당신들이 찾는 그 신부다"며 자수하고 참수당했다. 이 나라의 종교단체들은 좋게 말하면 상업기관이고, 정확히 말하면 사기집단이다. 물론 소수의 예외는 있을 것이다. 천주교는 그 엄중하고 피빛 찬란한 역사의 연장선에 있는가. 강완숙 골롬바의 크기와 높이, 깊이를 기대한다.
경찰관에게 단골손님은 누가 뭐래도 주취자들이다. 코로나 방역이 완화된 후로는 치안현장에서 주취자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소식이 연일 뉴스를 장식한다. 경기남부경찰청의 경우, 올해 1분기 기준 주취자 관련 112신고는 3만 5000여 건으로 작년과 비교할 때 32% 가량 늘었다. 경제사정이 어려워서, 가정사 때문에 등등 다들 저마다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다. 잠시나마 술기운에 기대 퍽퍽한 삶의 괴로움을 달래려던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렇지만 신고를 받고 현장에 나간 경찰관들은 참을 인(忍) 자를 연신 되새기며 어려움을 참아낸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한 번 쯤은 그럴 수도 있지”라며 유난히 음주에 관대한 문화 탓일까. 사실 주취자 문제는 어제 오늘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장에서 주취자들과 줄다리기를 하듯 끝없는 실랑이를 하며 소모되..
미래는 알 수 없다. 천억 원을 넘게 들여 만든 슈퍼컴퓨터로 몇 시간 뒤의 날씨 예측하는 것을 자주 틀리고, 앞에 앉아 있는 사람과 몇 분 뒤에 영영 이별하는 일이 생기는 걸 알지 못한다. 한 치 앞을 모르고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 만들어가기 나름이다. 앞날이 정해져 있다면 지금보다 삶의 재미가 덜 할 거다. 몇 초 뒤 일어날 일조차 모르지만, 미래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릴 수 있는 분야가 존재한다. 바로 ‘인구’다. 작년에 아이가 몇 명 태어났는지는 10년, 20년 뒤 한국의 모습을 정확하게 말해준다. 최근 출생률이 1 아래였으니 당연한 수순으로 미래에는 인구가 줄어든다. 청년 비중이 적고 노인이 인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초고령화 사회 돌입은 필연적이다. 지구상에 이렇게 아이를 적게 낳는 나라는 한국뿐이라 미래 모습을 참고할 나라도 없다. 대치동에서 사교육 시장을 개척했던 메가스터디 손주은 회장은 학령인구 감소로 사교육 시장의 붕괴를 예측했다. 시기는 머지않아 10여 년 뒤쯤이다. 아이가 점차 사라져서 36년 즈음부터는 서울권 대학도 미달이 난다고 말했다. 손주은 회장이 대치동에서 이름을 날렸던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전략적 대입 지원이었다. 당시 서울 명문대 중 어느 대학이 미달 날지를 분석, 예측해서 자신의 학생들에게 전략적으로 원서를 내게 했고, 그게 적중했다. 이번에도 맞출지 궁금할 따름이다. 현재는 대학들이 벚꽃 피는 순서대로 어려움에 부닥치는 중이다. 남부 지역에 있는 대학들부터 학생 정원을 채우지 못하기 시작했다. 전통의 명문대라고 불리던 부산대, 경북대도 학생 급감에 직면했다. 아직 입학 학생이 미달되는 상황은 먼 나라 일이라고 생각하는 수도권 대학들도 머잖아 남부권역 대학들처럼 될 것이 자명하다. 서울권 대학이 학생을 다 채우지 못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대학 입시가 고등학교 입시처럼 바뀔 가능성이 생긴다. 명문이라고 불리는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어린 시절 내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이 더 많다. 공부를 좀 덜 해도 집 근처 고등학교에 가는 건 무리가 없다. 대학은 다르다. 중하위권 고등학생들에게 인서울 대학에 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붙여만 준다면 열심히 다니겠다던 고등학생 친구들을 여러 명 봤다. 그 친구들이 십 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바라는 대로 대학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초등학생 자녀를 키우는 친구들과 서울권 대학 미달 이야기를 나눴을 때 모두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자신이 어릴 때부터 보고 배운 게 학원에서 공부하고 학교에서 시험을 치는 것뿐이라 다른 걸 생각하기 어렵고, 미래가 불안해서 지금처럼 사교육으로 기본을 열심히 다져놔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아이들이 노는 걸 좋아하지만 마냥 놀리면 바보가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오늘날 학교 교육이 대학 입시에 맞춰서 돌아가고 있다면 10년 뒤부턴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릴 가능성이 생긴다. 학생들과 학부모의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는 장기 비전을 학교에서 제시할 수 있을까. 사교육 없이 학교에만 보내도 아이가 바보로 크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정해진 미래를 앞두고 백년지대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산림을 무단 훼손해 불법 시설물을 설치하거나 주차장이나 묘지를 불법 조성하고, 가축분뇨와 건축 폐기물을 무단 매립·투기하는 등의 환경훼손 범죄가 전국에서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환경이 훼손되면 복구에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범죄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경고와 홍보를 통해 사전에 예방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다. 특히 철저한 수사를 통해 범죄자를 반드시 찾아내고 무관용 원칙으로 죄에 상응하는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경기도에서도 산지 불법훼손 행위가 여전하다. 경기도 특사경은 최근 산지관리법 위반행위 20건을 적발했다. 도특사경이 지난 4월 10일부터 21일까지 항공사진을 통해 훼손이 의심되는 도내 산지 184필지를 현장 단속했다. 그 결과 이들이 훼손한 자연생태계·산지경관은 총 1만1050㎡나..
지난 주말 손주들과 함께 ‘제3땅굴’과 ‘도라산통일전망대’를 다녀왔다. 꽉 막힌 남북관계. 숨 막히는 현실가운데에서도 손주들과의 보람 있는 대화 속에 모처럼 소망을 꿈꾸는 아름답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북한이 파 놓은 땅굴을 보기위해 600M에 달하는 경사 길을 걸어 들어가면서 초등학교 2학년인 우리 손자 ‘준희’는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낸다. 분단의 의미가 잘 와 닫지 않는 어린 나이이다 보니 당연히 질문이 많을 수밖에...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 본 북한 땅, 개성공단에 대한 설명엔 시큰둥하다, 뒤편의 송악산을 가리키며, 여자가 누워있는 모습 같지 않느냐는 내 말엔 몹시 수긍하며, “맞아! 맞아!”를 연발한다. 분단과 DMZ에 대한 설명을 ‘네 동생과의 다툼’ 현실을 비유하며 설명을 하니 조금은 이해가 된듯하다. ‘함께 잘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내 결론적 언급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망대 교육관에서 DMZ 홍보영상에 나오는 지난 시절 남북의 정상들 만남의 모습들을 보면서, 윤대통령도 이 영상물을 꼭 한번 봤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퇴임 후 나도 저 영상물에 나와야지’ 하는 도전을 받길 바라는 마음으로... 제3의 남북연결도로가 한반도 중앙의 DMZ를 가르며 지나가고, DMZ 내에 건립된 종합경기장에서 남북의 선수들이 함께 경기하는 모습, 제2의 남북합작공단이 만들어 지는 모습 등을 상상해 보다, 허망한 마음으로 교육장을 나왔다. 사실 내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본다. 2018년으로 되돌아가서,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북미정상 합의, 그리고 9.19평양 공동선언을 뒤이어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남북관계를 정상화하여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사업을 재개하고, 싱가포르에서 북미가 약속했던 것, 북미간 평화협정 체결과 수교를 위한 협상을 시작하면 된다고 본다. 당연히 북한은 핵미사일개발 중단과 NPT체제에의 복귀를 선언하며 핵폐기 로드맵 의제를 협상테이블에 함께 올리면 될 것이다. 물론 트럼프대통령이 약속했던 한미연합훈련의 중단을 우선적으로 지키겠다고 선언하면서 말이다. 문제는 미국의 실행 의지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난제를 안고 있다. 미국측이 스스로 결단하여 우리의 희망대로 움직여 주리란 기대를 갖기가 매우 어려운 현실! 그러나 누워서 감이 떨어지길 바랄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을 생각하자. 남북 우리가 함께 같은 생각으로 ‘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미국측을 설득한다면 미국도 어쩔 수 없이 수용할 것이 아닌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도도히 흐르는 임진강 물결을 바라보다 보니, 과거 평양에서 북한 동무들과 함께 불렀던 ‘임진강’ 노랫말이 생각나 중얼중얼 콧노래를 한다.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내 고향 남쪽땅 가고파도 못가니/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실성한 듯한 할비의 모습을 야릇하게 쳐다보는 손주들의 눈과 마주쳐 노래를 얼른 멈추었다.
어떤 사람이 지혜 높은 스님을 찾아가 털어놓았대요. “스님. 제가 한동안 마약에 손을 댔다가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껄껄 웃으며 “그걸 왜 들키고 그래요?” 하는 바람에 찾아간 사람이 어안이 벙벙해졌대요. 스님은 “석가모니도 비틀즈도 다 마약하면서 새로운 경지를 연 사람들이에요. 다만 국가가 언제부터인가 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게 죄가 되었던 것뿐이죠”라고 말하더래요. 스님의 마지막 말이 걸작이었다네요. “이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은 없어요. 다만 두 부류가 있지요. 자신의 죄를 ‘들킨 죄인’, 자신의 죄를 ‘들키지 않은 죄인’이 있을 따름이지요.” …언젠가 신문에서 이 글을 읽다가 무릎을 친 적이 있어요. 엉뚱하게도, “누구든 죄 없는 자 있다면 나서서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외쳐서 위기에 처한 간음 여인을 구했다는 예수님 생애 일화가 생각났죠. 요즘 언론을 장식하고 있는 사건들을 보면서 문득 ‘들킨 죄(罪)’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우리 사회에는 이미 만연돼 있는데, 아닌 척 살아가는 비리들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그중에 ‘뇌물’보다 더 끈질기고 고약한 풍습은 없는 것 같아요. 거액의 경제 문란 사건을 필두로, 모든 사건 뒤에는 ‘금품수수’라는 점잖은 표현의 ‘뇌물’이 존재하지요. 하긴 끔찍한 강력 사건 뒤에도 늘 ‘여자’와 ‘돈’ 문제는 따라다니기 마련이죠. 최근의 사건들을 바라보는 정치권 인사들은 물론, 일반 국민도 혹시나 ‘들킨 죄’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범죄가 발각되어 뉴스를 장식할 때, 그 사건을 바라보는 구성원들의 내심이 “참 나쁜 사람들이네”가 아니라 “재수 없게 걸렸구먼”의 수준이라면 이미 그 사회는 심각한 가치관 혼돈에 빠졌다는 증거예요. 그래 지금 우리는 어떤 형편인가요? 역사적으로 세상에는 ‘들킨 죄’보다도 ‘들키지 않은 죄’가 더, 심지어는 압도적으로 더 많을 것이라는 추론은 얼마든지 가능해요.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는 명시적으로, 또는 풍문으로 그런 이야기는 흐드러졌잖아요. 그런데도 불과 몇 퍼센트도 안 되는 ‘들킨 죄’ 소란을 놓고 흥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정서는 그런대로 괜찮은 건가요? 어떻게 해야 진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가 될까요. 머지않아, ‘배신 손실’이나, ‘처벌’, ‘보상’보다도 더 큰 ‘배신 이득’ 때문에 일어나는 고전적인 ‘죄수의 딜레마’ 현상을 숱하게 보게 될지도 모를 것 같네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실제 현상의 100분의 일, 1000분의 일에 불과할지라도 그 긍정적인 효과가 파탄보다도 크다면 집행해야 한다는 법(法)의 논리를 추월할 다른 묘방이 없는 한 ‘들킨 죄’를 정죄하는 일이라도 멈출 수는 없겠군요.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재수 없다’고만 여길 그네들 속마음을 생각하면 그저 씁쓸할 따름이네요.
최근 경기 용인시에서 응급 이송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중상을 입은 70대 남성이 원거리 병원까지 이송되다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잊을만하면 일어나는 이런 후진국형 비극이 이 나라에서 도대체 왜 그치지 않는 것인가. 정부 당국은 탁상행정 결과만 앵무새처럼 반복 발표하지 말고 의료계와 머리를 맞대고 현장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응급의사를 더 확보하여 배치하고, 각급 병원의 병상 데이터를 통합하여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지난달 30일 새벽 경기도 용인에서 70대 남성 중환자가 받아줄 수 있다는 응급실이 없어 병원을 전전하다가 결국 사망했다. 지난 2월엔 대구에서 10대 여성이 추락사고로 중상을 입었지만, 응급 수술을 감당할 병원을 찾지 못해 결국 응급차 안에서 숨졌다. ‘응급실 뺑뺑이’ 사례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지..
지난 1일 경기도 김포시와 파주시에 올해 처음으로 지역사회 내 유행을 차단하기 위한 ‘말라리아 경보’가 발령됐다. 이 지역에서 각각 3명의 ‘군집 추정사례’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군집 추정사례란 말라리아 위험지역 1km 이내에서 30일 이내에 2명 이상 환자 증상이 발생할 경우다. 올해부터는 3명 이상일 경우 해당 지역에 경보가 발령된다. 이에 따라 도는 경보 발령지역에 사는 주민·방문객들에게 주의를 요청했다. 말라리아는 아프리카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연간 수백 명씩 발생하고 있다. 1970년대에 사라져 한때 퇴치 선언까지 했지만 1993년 이후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국내 말라리아 환자 수는 500명대였지만 2020년 385명, 2021년 294명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된 지난해 다시 420명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우리와 상황이 달랐다. 코로나19에 대응하느라 말라리아가 지속 확산되어 환자와 사망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전 세계 말라리아 감염 건수는 2억3200만 건이었다가 코로나19 유행이 본격화한 2020년 2억4500만 건으로 5.6% 증가했다. 말라리아로 인한 전세계 사망자 수는 2019년 56만8999명에서 2020년 62만5000명까지 크게 늘었다. 10%나 증가한 것이다. 6월 1일 기준 국내 말라리아 환자는 120명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 44명과 비교하면 3배 정도 크게 늘어난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경기도와 인천시에서 발생했다. 경기도 환자는 69명(전국의 57.5%)이나 된다. 인천시도 말라리아 감염자 발생 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지난해 인천의 말라리아 감염자 발생수가 전국 지자체 중 2위였다. 말라리아 감염자가 지난해에 비해 크게 늘고 있는 것은 올해 늦봄부터 이상고온 현상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때 이르게 모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는데다가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면서 인구 이동이 활발해진 탓이라고 한다. 말라리아는 모기를 통해 전파되는 감염병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질병 부담이 큰 질환 중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삼일열 말라리아는 그나마 치사율이 낮아 다행이다. 말라리아 원충에 감염된 모기에게 물리면 오한, 발열, 발한의 전형적인 감염 증상이 나타난다. 이밖에도 빈혈, 두통, 혈소판 감소, 비장이 비정상적으로 커지는 등의 증세를 보인다. 감염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는 2주~수개월의 시간이 소요된다. 잠복기가 없는 경우도 있지만, 잠복기가 최대 1년에 달하기도 한다. 이에 경기도와 인천시는 매개 모기 유충이 서식할 수 있는 웅덩이에 대한 방제활동과 말라리아 예방 수칙 홍보를 강화하는 등 말라리아 감염 차단에 나섰다. 해당 지역 모기 서식 환경 조사, 거주지 점검, 위험 요인 확인 등 현장을 조사를 할 예정이다. 시·군에도 집중 홍보, 매개 모기 집중 방제, 조기 발견을 위한 신속 진단검사와 예방약 제공 등을 적극 수행하라고 당부했다. 도 관계자의 말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모기가 활동하는 야간에 외출을 가능한 삼가하는 등 말라리아 매개 모기에게 물리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