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욕하는 사람들이 흔하게 하는 푸념이다. 정치하는 놈들은 다 똑같이 제 욕심만 차리는 놈들이니 무슨 기대를 하겠는가라는 자포자기의 표현이고 요즘에는 여당도 싫지만, 야당은 더 싫다고까지 한다. 이렇게 정치를 불신하고 멀리하면 어떤 결과가 올까? 정치가 국민의 희망과 꿈을 주기보다는 허구한 날 비리와 부정만 일삼는 부패집단으로 인식된 지는 오래되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정치가 불신의 대상이 되었는가. 그러나 시대를 막론하고 정치와 정치인이 국민에게 욕 안 먹은 적이 있었던가. 정치는 늘 국민의 기대에 부응치 못하는 원망의 대상이 되는 직종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정치에 대한 불신과 비난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 원인은 정치인의 자질, 상황 등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언론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아니 어쩌면 정치불신의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언론이다. 언론은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라는 제4부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런데 과연 우리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자사의 이익에 치우치거나 당파성에 매몰되어 침소봉대하는 보도로 모두가 똑같은 놈들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기능 기관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보 오발탄으로 수도권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해도, 욱일기를 단 일본 군함이 버젓이 부산항에 입항해도, 노동자 시위를 적대시해 폭력진압을 해도, 후쿠시마 오염수가 그대로 방류된다고 해도, 여전히 도덕성이 생명이라며 조국, 김남국을 들며 야당도 똑같이 못 믿을 종자들이라고 보도한다. 둘 다 잘못이라는 양비론에는 옳고 그름이 없고, 무엇이 국익이고, 어떤 사안이 미래 사회를 좌우하게 될 것이라는 판단력이 부재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사안의 경중을 따지기보다는 누가 누가 잘못하나를 고발하니 결국은 정치 불신과 무관심층을 확대로 이어지고 있다. 욕을 하면서도 정치를 찾는 이유는 단순하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키는 최전선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정치가 실현되어야 경제도 발전할 수 있고, 사회도 건강해지고, 높은 수준의 문화도 만들어 낼 수 있고, 국격도 올라가는 것이다. 정치는 공동체를 위하여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예술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구상 어느 나라도 예술의 정치에 도달한 나라는 없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차피 최선의 정치는 불가능하고 최선의 인물도 정치판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최선을 추구하되 차악(次惡), 즉 두 번째 나쁜 놈을 선택하는 것이 선거이고 민주주의이다. 지금 당장 그놈이 그놈이라는 정치 허무주의에 빠져 정치 무관심층(apolitical man)이 늘어나면 그 혜택은 고스란히 최악의 정치인들과 그들 뒤에 숨은 기득권 수호세력들의 것이 된다. 정치인이 원하는 것은 열렬 지지층이 아니라 그저 적당히 지지만 해 주는 소수뿐이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놈이 그놈이라고. 그래서 어쩌라고? 아니 그럼 누가 좋은데?”라는 질문을 함으로써 그중에서 두 번째 악을 찾는 민주시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속가능경영은 1972년 로마클럽의 성장한계 보고서에서 거론된 이후로 사용되었으며, 기업이 경영에 미치는 경제, 사회, 환경적 이슈를 균형적으로 고려하여 기업의 경영활동이 미래에도 지속 가능한지에 관한 정도를 의미한다. 이를 바탕으로 Elkington(1997)은 기업이 지속 가능한 경영을 위해 다음의 3대 측면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기업은 지속 성장과 이익 창출을 위해 경제적으로 책임을 다하고, 둘째, 다음 세대를 위해 주어진 환경의 보존과 동시에 자원의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이용하며, 셋째, 빈곤 극복, 교육, 성평등, 인권 등 사회적으로 책임을 다하여 사회와 균형 있는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3가지 노력이 수반됨을 강조하고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었을 이야기이다. 그러나 지속 가능한 경영의 현황을 살펴보면 실상은 달라진다. ESG 행복경제연..
못된 정치 쩨쩨한 속셈이 ‘과학’을 주물럭거리는 꼴, 요즘 국제정치학이다. 핵발전소가 폭발했다. ‘과학적으로’ 매만지니 오염수 1리터쯤은 마셔도 별 탈 없단다. 그 과학은 서양문명의 ‘정치’인가? 싹수없는 과학, 그대 드시게. 과학이 무엇에 입맛을 다시나? 말(언어)도 ‘과학적으로’ 마사지했다. ‘처리수’라니 애무(愛撫) 수준일세. ‘안전하다.’는 장본인들의 창작이다. ‘안전하면 자네들이 마시게나.’는 취지 중국 당국의 언급, 간명하고 적절하다. 섬이어도 그들 강산과 들판, 유유(悠悠)하더라. 부사산(富士山) 꼭대기나 상근(箱根) 온천지 호젓한 호수에 담아 오래 마시면 그 ‘안전함’과 책임감에 지구촌이 갈채 보낼 터. 복합오염이란 말은 그런 과학 판치는 서양문명에서 더 오래된 상식이다. ‘안전하다’ 강변하기 위한 의도의 실험이나 검사(檢査)의 실속, 세상이 안다. ‘과학적’ 간판 걸고 ‘눈 가리고 아웅’이면 만사 오케이? 벋서면 수사? 법치주의? 그 과학 말고 ‘진짜 과학’으로 보자. ‘먹는 것 갖고 장난치는 놈’으로 시작하는 말의 다음은 입을 열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하다. 패륜(悖倫)이다. 지들도 속으론 그리 생각할 것이다. 중국의 언급 또한 그런 생각에서 나온 것이리라. 그 생선, 다른 나라에도 팔겠단다. 누가 먹어? 긴 파이프 바다로 내려 먼 태평양 바닥에 흘려보내겠다는 것이니, 해류에 천천히 희석(稀釋)되리라고? ‘희석’은 농약 뿌리려고 물을 섞는 것 같은 방식이다. 안전한 처리수, 걱정 말라고? 그래서 하는 말일세. 한걸음 물러나 다시 생각하라, 인두겁 쓰고서 할 말인가. 자기 돈 안 쓰려고 핵 오염수로 세상을 위험에 빠뜨린다나. ‘남에게 폐를 끼치고 죽으라.’는 자폭일까? 삼도유기부(三島由紀夫)의 할복(1970년)을 상정함인지. 그게 그 무리의 길인가. 사린가스 동경 지하철 참사의 기억(1995년) 새롭다. 그들 살림의 우하향(右下向) 사정을 알기에 그들의 과장된 몸짓에 측은지심마저 느낀다. 사실상 욱일기라고 지들이 떠벌이는 그 ‘깃발’ 매고 몇 척 군함 들어와도 실은 그리 신경 안 쓴다. 이제 전쟁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듯 몸살 하는 신군국주의, 좀 성가시긴 하다. 가난은 나라님도 어쩌지 못한다는데, 오염수 파이프질로 바다의 순결(純潔)을 짓밟는 건 돈이 없어서겠다. 이웃도 수긍할 싹수 있는 바른 핵물질 해결책을 (비용 때문에) 마다하는 것이다. 불우이웃이니 도와야 하겠다. 도리다. 밉다고 방치하면 썩어 문드러지는 병으로 악취 풍기며 가라앉을 수도 있을 테니, 가까운 이웃들이 먼저 나서자. 태평양 건너 나라(들)에도 자선(慈善)의 기회를 주자. ‘과학적 말장난’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다. 핵발전소, (터지면) 나라도 세상도 다 뒤집힐 만큼 위험하구나. 그 덤터기는 후손이 뒤집어쓰는 것이니 내가 알게 뭐냐. 그런가?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하지만, 일은 바탕을 보자.
유난히 맑고 푸르른 5월의 하늘아래 다문화 한가족 축제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야외음악당 푸른 잔디위에는 인도, 네팔, 스리랑카 등 전통의상을 예쁘게 차려 입은 아이들이 비눗방울들을 뿜어내고, 하얀 몽골부스에서는 각 나라의 음식들이 붐비게 서빙되고 있고 다양한 체험 행사들이 시행되는 모습을 보며 모처럼 코로나에서 벗어난 축제의 현장들이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수원시는 외국인 주민이 6만5000여 명으로 전국에서 2위로 많으며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는 외국인이 살기 좋은 도시이다. 결혼이민자 한국어 교육 및 취업교육, 다문화 가족 동아리 모임, 다문화 서포터즈 운영, 다누리꾼 운영등 다양한 사업이 활발하게 추진 중에 있으며 더 나아가 찾아가는 문화 다양성 이해교육, 외국인주민 긴급지원사업 등 외국인과 다문화 가족이 함께 누리는 포용도..
윤석열 대통령 메시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자유”다. 문제는 이 자유가 어떤 의미로 해석되고, 국정운영으로 나타나느냐에 있다. 지난 1년간은 총론에 기반해 행정조직개편과 방향성을 설정하는 단계였다. 첫 인사는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대통령비서실과 사정기관, 주요 정부 부처 요직에 온통 검찰 출신들을 배치했다. 이렇게 특정세력이 과잉 대표될 경우 여타세력의 자유는 축소되어 대의제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 대의제민주주의는 각계각층의 국민을 대변하는 대리인들이 끌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조직 개편이 3차례 있었다. 먼저, 검찰조직 강화, 국방부와 통일부 대북관련 담당부서 조정,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부서 개편 등 지난 정부정책 뒤집기를 진행했다. 2차에는 51개 정부부처 행정업무를 일괄 조정했다. 3차는 지난 3월 노동, 교육..
‘달나라에 갈 수 없다면!’ 북유럽의 외딴 섬나라 아이슬란드의 관광 홍보 문구다. 아이슬란드는 거리만큼이나 상식에서 먼 일이 일어나는 나라다. 귀신 이야기부터. 아이슬란드에 건물을 세우거나 도로를 놓으려면, 예정 부지에 ‘정령이 살고 있지 않다는 증명’을 해야 한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경치 좋은 곳에 ‘땅의 신이나 땅 사람, 혹은 숨어있는 사람’이라 부르는 정령이 산다고 믿는다. (우리 식으로 바꾸면 도깨비, 터줏대감 정도가 될 듯) 2013년, 도로를 내려던 시공업체와 정령이 깃든 바위 훼손을 막는 주민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 법정까지 간 일이 있는데, 판사는 주민 편을 들어 ‘바위를 파손하지 말고 이전’하도록 했다나. 다음 이야기도 귀신 이야기급이다. 맥도널드 햄버거가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일이 있었다. 15년 전, 금융위기로 아이..
마음 정갈스럽게 하고 생각 가다듬어 글 쓸 구상을 하고자 가까운 산길로 나가다 어린이 놀이터에서 본 풍경이다. 어린 딸과 아들은 둘이 나란히 그네를 타고 있는데 앞 의자에서는 엄마 아빠가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 나도 아이들 키우며 저런 시절이 있었지. 머릿속에서는 시골에서 부모님 모시고 살며 인간답게 살았던 고향 풍경이 실타래 실 풀리듯 한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에/ 눈사람처럼 커지고 싶던 그 마음 내 마음/ 아름다운 시절은 꽃잎처럼 흩어져…’ 이용복 가수의 ‘어린 시절’ 노래가 가슴속에서 리듬을 탔다. 자기 아이들 그네 타는 모습을 보며 젊은 부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애들이 커서 검사, 의사, AI 기술자, 재벌총수-. 일류대학에 입학시키기 위해 성적 올린다며 약을 먹이는 부모, 정신병동에서 문제집을 푸는 아이, 마약 밀매 조직의 손길이 뻗는 교육열과 그 현장-. 나는 어려서부터 가난에 친숙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어렵게 살았던 때라 시기심 없이 물장구치고 다람쥐 쫓으며 살아서 다행이지 싶다. 아이들도 착하게 성장해 남 속임수로 억울하게 당했을지언정 그릇된 행동 하지 않고 독립해 잘 지내고 있다. 최소한 돈 버는 능력 기르다 사랑하는 능력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일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모든 사람은 육신을 위해 곡식으로 된 ‘밥’을 먹어야 한다. 이것을 ‘육신의 밥’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삶인가? 아니 아름다운 삶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며 어떤 영양분을 섭취해야 하는가? 를 고민하는 사람은 ‘정신의 밥’이 필수다. 또한 슬기로운 사랑과 지혜로운 죽음을 위해서는 어떤 공부를 터득해야 하며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인가를 고심하는 사람 역시 ‘정신의 밥’을 먹어야 한다. 벌 나비가 물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생명을 끊듯, 처절한 자기 관리를 위해서도 ‘정신의 밥’은 필요하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존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지만, 시와 아름다움, 낭만과 사랑은 삶의 풍요한 목적이라고.” 인문학의 목적은 인간성의 회복과 인격의 완성이요 행복한 삶이다. 인문학은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기원전 106~43)가 교육프로그램을 짤 때 원칙으로 삼았던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유래했다. 이 말이 ‘교양 교육’의 의미로 확장된 건 2세기 무렵 로마의 수필가 겔리우스에게 와서였다고 한다. 동양에서의 인문학은 인문(人文) 즉 천문(天文)과 구분되는 개념으로 ‘사상과 문화 인간의 조건’을 탐구하는 학문이었다. 그것을 좁혀 간략하게 말한 것이 (문, 사, 철)이다. 지식(법·경제·과학·기술)은 많으나 거기에 인간이 빠지고 인격(人格)이 매몰된 현실에서, 당장 눈앞 이익만 생각하고 투기의 대상만을 찾는 분에게는 할 말이 없다. 인문학은 지하수 같은 것이어서 땅 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하수가 말라버리면 자연의 생물들은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시와 아름다움, 낭만, 사랑’은 삶의 풍요한 목적이라고 학생들에게 외치지 않고 속삭이지 않았겠는가.
얼마 전 경기도 인구가 1400만 명을 돌파했다. 4월 말 주민등록인구는 1360만7919명, 등록외국인은 39만5608명으로 총 1400만3527명이 경기도에 거주한다. 전국 최대 지방정부로서 총인구 5264만5711명 중 26.6%가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군별 인구격차가 컸다. 특례시인 수원시와 122만6735명, 용인시 109만2738명, 고양시 108만9934명이었지만 연천군은 4만2769명, 가평군 6만3005명, 과천시 7만9133명이었다. 경기연구원이 최근 ‘사라지는 지방, 지역 활력에서 답을 찾다’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에는 심각한 내용이 담겨있다. 2067년엔 도내 31개 시·군 중 30곳이 인구소멸 고위험 지역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보고서는 2013년 1223만 명에서 2022년 1358만 명으로 경기도 인구가 10년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2008년 초, 이명박정부가 들어선 직 후, 수유리 통일교육원 대강당에 통일부장관을 비롯한 전 직원이 모였었다. 청와대 안보실의 41세 김태효 비서관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다. 강의요지는 한마디로 통일부는 가만히 있으면 되고, 올 여름이 가기 전에 북한은 굴복할 것이며 핵문제도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는 것이다. ‘비핵, 개방, 3000’정책에 대한 확신이 도를 넘어 신앙으로 된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이 후 통일부 과장보직이 15개 정도 축소되고 전임 정부의 활발했던 대북사업들을 대부분 잠재워야 했던 암울한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 북한 핵문제 대두 후 지금까지 수 십 차례 가해진 UN, 미국, EU 등의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굳건히 버텨오게 했던 그 본질적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그들이 내세우는 자력갱갱, 자립적 민족경제 노선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시장경제적인 사고틀로 북한 경제를 이해하려다 보니, 조금만 압박을 지속하면 북한경제는 붕괴될 것이고 결국 굴복할 것이라는 오해 때문이다. 6.25전쟁 이후 미국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으로 북한은 폐쇄적 자립경제와 산업의 지역분산 등으로 전쟁에의 준비를 철저히 해왔다. 내핍과 자립을 내세우면서 대외의존도를 극도로 줄이고, 국방공업 위주의 자력갱생을 최고의 가치를 삼은 정책 추진은 북한의 내구성을 더욱 강화시켜 온 것이다. 또한 중국의 제재 참여가 미흡해 대북제재의 실효성이 반감했다는 주장도 국제정치 현실을 망각한 무지한 생각이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조중관계를 생각해야 한다. 둘째로 제재의 효과가 심화되면 북한 자체의 식량, 생필품 부족 등으로 북한 주민의 불만이 쌓여 체제위기로 발전되고 결국 북한이 제제에 굴복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는 경우다. 북한주민들은 김일성주석을 아버지, 노동당을 어머니로 여기며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수족으로 살아감을 당연히 여기는 독특한 종교집단과 같은 체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잣대로 해석해서는 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역시사지의 사고가 필요한 이유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시절 100만 명에 가까운 주민이 굶어 죽는 상황에서도 약탈이나 폭동, 반란의 조짐이 있었다는 정보를 접한 기억이 없다. ‘하나는 전체를,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집단주의적 사고, 콩깍지도 나누어 먹으면서 투쟁한 빨치산 투쟁정신이 머리속에 깊이 박힌 북한주민들의 삶의 정신이 어려운 경제상황에서도 굳건히 버티게 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통합의 원대한 꿈의 실현을 위해서는 북한의 마음을 사야한다는 철학과 정책기조 하에 혼신을 다하여 노력을 했던 수많은 인사들의 생각과 현 상황을 냉철히 분석한다면 지금과 같이 남북관계를 강변 일변도로 이끌어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제재가 오히려 북한을 핵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고 이제는 당당히 핵보유국으로 대남 압박을 가하고 있는 현실을 돌아보자. 여야를 떠나 지속적으로 동독을 포용한 서독의 동방정책이 동독주민들의 마음을 사서 종국에 그들 스스로 서독에 흡수되길 원하여 통일을 이룬 통독의 교훈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심리적 G8 국가 반열에 올랐다.” 지난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일본 히로시마에서 개최된 G7 정상회담에 참여하여 활동한 성과에 대한 여당 대변인의 평가다. “심리적”이라는 형용에서 정부·여당의 ‘G8 한국’에 대한 열망과 아쉬움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2021년 영국에서 개최된 G7 정상회의에 참석한 후에도 당시 여당은 “사실상 G8 도약”이라고 자찬한 바 있다. 왜 G8인가? G8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1976년 출범한 G7 정상회의는 냉전 시대 “자유세계의 운영위원회”로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고, 냉전 붕괴 이후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도하였다. 2008년 미국·유럽발 세계 금융위기가 발발하자 G8(당시 러시아 포함)만으로는 대처 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한국, 중국, 인도 등 중견 국가들을 포함한 G20이 대안으로 등장하여 세계 금융시장을 성공적으로 안정시켰다. 이후 세계 경제, 기후 문제 등은 G20 중심으로 운영되고, G7은 상대적으로 퇴락하였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G7은 재결집하는 반면, G20은 대러시아 경제제재에 G7을 포함한 일부 국가만 참여하는 등 분열하고 있다. G7과 G20은 향후 어떤 길을 걸을까? 첨단 기술력에서 앞서는 G7의 힘은 여전하나 글로벌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7%로 축소 추세다. 세계 경제 위기, 기후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GDP의 85%를 차지하는 G20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경제) 안보 중심의 G7과 경제 협력 및 기후 문제 중심의 G20은 상당한 기간 병존하면서 조화를 모색할 것이다. ‘G8 한국’은 주요 선진국과 교류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글로벌 영향력을 강화하는 등 현 정부의 핵심 비전인 글로벌 중추국가에 이르는 첩경으로 보인다. 하지만 G7은 더 이상 글로벌 문제의 해결을 주도하는 포럼이 아니다. 같은 가치를 지향하는 서구 중심의 선진국 그룹일 따름이다. 또 1990년대 섣부른 OECD 가입으로 외환위기를 초래한 역사를 반면교사 삼아 내적 성찰과 철저한 준비를 강조하는 보수 신문의 칼럼도 있다. ‘G8 한국’이 절대 목표일 수는 없다. ‘G8 한국’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한국 경제는 현재 수출 급감, 무역·경상수지 적자, 성장률 저하 등 위기 징후가 뚜렷하다. 외교가 지정학적 시각에 편중되어 한국 경제의 역량을 해치고 있지 않은지 우려하는 시각이 커지고 있다. 경제 안보는 협력국인 동시에 경쟁국인 행위자들 간의 게임이다. G7 회원국들도 협력자인 동시에 경쟁자이다. 경제 안보 중심의 G7과 경제 협력 중심의 G20 사이의 균형 외교가 필요하다. G8의 꼬리보다 G20의 중추가 더 나을 수도 있다. 오는 9월 개최 예정인 인도 G20 정상회의에서의 중추적 역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