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의 예비 소집이 시작됐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기대감이 교차한다. 그런데 일부지방 학교에서는 신입생이 0명이어서 입학식조차 열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저출산으로 인한 학령인구 감소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가운데 현재까지 전국 지방 소재 초등학교 수십 곳에서 입학생이 단 한명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충북의 경우 초등학교 예비 소집이 마무리됐지만 청주 내수읍 수성초 구성분교와 미원초 금관분교 등 6곳은 취학 아동이 없어 신입생을 받지 못할 것 같다. 전북에서도 신입생이 1명도 없는 초등학교가 군산 어청도초, 신시도초야미도분교, 임실 신덕초, 부안 위도초식도분교 등 4개교나 된다. 학생이 1명도 없어 현재 휴교 상태인 곳도 있다. 학교 소멸이 현실화하고 있음은 지난해에만 전국에서..
한 독일인이 있었다. 21세 약관의 나이에 베를린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명한 신학자 칼바르트는 그가 쓴 박사학위논문을 “신학적 기적”이라 평할만치 세상은 천재의 출현을 반겼다. 24살에 베를린대학 신학부 교수가 되고 25살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촉망받는 신학자이자 목사로서의 삶은 27살 나치가 집권하면서 뒤틀리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의 많은 교회들이 히틀러를 그리스도에 비유하며 우상숭배에 휩쓸리자 그는 히틀러에 반대하고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고백교회운동의 지도자로 나서게 된다. 그가 나치에 저항하는 활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던 그는 망명권유조차 거부한 채 활동을 이어가다 1943년 4월 결국 체포되어 히틀러암살모의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독일패망 한 달 전 교수..
요사이 북한 무인기의 대한민국 침투 문제로 시끄럽다. 이 사안은 크게 세 종류의 문제점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무인기를 격추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무인기의 정확한 비행 궤적을 제대로 확인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는 점이다. 세 번째 문제점으로, 비행 궤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에도, 용산 비행 금지 구역 진입 가능성을 언급한 야당 의원의 주장에, 그렇지 않다며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 세 가지 문제점은 어느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차대한 사안들이다. 더구나 국정원도 북한 무인기가 용산 대통령실을 촬영했을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심각한 상황은 앞으로 절대 반복돼서는 안 되기 때문에. 왜 이런 문제점들이 불거지게 됐는가..
“다량의 빛과 그늘을 찾아라. 나머지는 저절로 온다. 그것은 종종 별로 중요치 않다.” 별로 중요치 않은 것, 이것이 현대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예술혁명의 화신이자 현대미술의 아버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이야기다. 화폭의 새 지평을 연 그를 세기의 지성 에밀 졸라는 경탄했고, 미셸 푸코는 100쪽이 넘는 글로 분석했다. 1832년 1월 23일 파리 7구 부르주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마네. 부친 오귀스트 마네는 법무부장관의 비서실장이었고, 모친 외제니 데지레는 스톡홀름에 주재하는 외교관의 딸이었다. 근엄한 가문에서 자랐지만 상당히 엉뚱하고 왕정주의자였던 외삼촌 덕에 일찍 예술계에 눈을 떴다. 해군 함장이었던 외삼촌은 에두아르와 그의 동생 외젠을 데리고 자주 루브르 박물관을 찾았다. 그는 조카들에게 대가들의 그림을 비평했고, 특히 스페인관을 찾을 때는 더욱 열정적이었다. 해군장교에서 화가로 꿈을 돌린 마네 열두 살에 마네는 뤽상부르공원 근처 롤랭중학교에 입학했다. 공부에 흥미가 없어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 학교에서 그의 귀중한 자산이 될 앙토냉 프루스트를 만났다. 마네는 푸루스트과 함께 외삼촌을 따라 루브르 전시실을 어슬렁거렸다. 열여섯이 된 마네는 해군에 입대하고자 선발시험에 응시했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 후 견습 선원이 돼 리우데자네이루행 배를 탔다. 7개월간의 여행 속에서 팀원들과 장교들을 열심히 스케치하며 미술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여행 도중 매독에 걸려 프랑스로 돌아와야 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결국 부모님의 뜻에 따라 다시 해군사관학교 시험에 도전했다. 역시 불합격이었다. 두 번의 고배를 마신 마네는 아버지를 설득해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미술대학 입학 대신 당대 최고의 미술교수였던 토마 꾸튀르(Thomas Couture)의 아틀리에에 들어갔다. 여기서 6년간 그림의 기초를 연마했다. 초년병시절 마네는 유명화가들의 그림을 모작했다. 친구인 외젠 들라크루아의 허락을 받아 그의 작품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즉, ‘단테의 작은배’를 카피해 그린 것은 유명하다. 한편, 마네는 파리 이탈리아가(街) 22번지에 있는 카페 토르토니(Café Tortoni)를 자주 찾았다. 19세기 대단한 인기를 누린 이 카페는 사교계의 중심지였다. 여기서 점심을 먹고 마네는 보들레르와 함께 튈르리 공원을 돌아다니며 스케치하곤 했다. 오후 5시가 되면 토르토니로 다시 돌아와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그날의 스케치를 이야기하며 찬사를 받곤 했다.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의 큰 미술관을 돌며 다양한 견문을 넓히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험은 마네 미술의 원천이 됐다. ‘튈르리의 벨라스케스’였던 마네 풍속화를 즐겨 그린 마네는 스페인왕 펠리프 4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와 리베라로부터 큰 영감을 얻었다. 벨라스케스의 도도하고 고귀한 금욕적 낭만에 취한 그는 스스로를 ‘튈르리의 벨라스케스’라고 장난스럽게 칭하곤 했다. 그가 살롱전에 출품한 첫 작품은 ‘압생트를 마시는 남자.’ 루브르 거리를 배회하는 넝마주이 알코올 중독자 코델라의 어두운 초상화였다. 1859년 살롱전에 낼 요량이었지만 들라크루아 외엔 찬성자가 없어 채택되지 않았다. 1862년에 열린 낙선전에 ‘풀밭위의 점심’을 출품했다. 주목을 크게 끌었지만 결과는 또 거부당했다. 나체의 연인과 함께 신사복을 입은 두 남자가 전원 풍경 속에서 앉아 있는 모습은 고루한 신화와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아방-가르드인 이 주제는 대중과 비평가의 호평을 받기에는 시기상조였다. 도발적인 이 작품을 어떤 이들은 중상 모략했다. 이탈리아 화가 라파엘이 그린 ‘최후의 심판’의 모작이라는 둥, 티티엥의 ‘야외콘서트’를 흉내 냈다는 둥 왈가왈부 했다. 1863년 그는 또 ‘올랭피아’를 전시했다. 티티엥의 ‘위르비노(Urbino)의 비너스’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나체 여인이었다. 올랭피아는 마네의 최애 모델 빅토린 뫼랑이었다. 럭셔리한 실크숄 위에 다리를 뻗고 어느 신사가 보낸 꽃다발을 흑인하녀로부터 전달 받는 나체의 올랭피아는 또 한 번 스캔들을 일으켰다. 실패와 구설수의 연속이었다. 뉴보이 마네를 올드한 시류가 전혀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밭을 가는 농부에게 때는 꼭 오는 법. 에밀 졸라가 지원병으로 나섰다. 대 문호의 조력과 화가 자신이 개발한 독창적 스타일은 시너지 효과를 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곧이어 발표한 ‘앙리 로슈포르의 초상화’가 아카데미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프랑스 정부는 마침내 마네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이었지만 결국 최정상 자리에 올랐다. 그의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마네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일등석은 주어지지 않는다. 잡는 것이다.” 이 말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는 일생을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안주하지 않았다. 1년 후 다시 말하면 그가 죽기 직전 ‘폴리-베르제르의 바(Un bar aux Folies-Bergere)’를 내놓아 그의 커리어에 최고점을 찍었다. 뤼에유-말메종(Rueil-Malmaison)에서 그린 이 최후의 걸작은 거울에 비치는 이미지가 많은 논란을 야기하고 지금도 그 논란은 진행 중이다. 어떤 이는 작품 속의 노신사를 마네 자신의 모습으로 해석한다. 자신이 사랑했던 파리의 삶이 폴리-베르제르 술집의 풍경에서처럼 화려하고 유쾌한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 고독하고 우울한 것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바에서 서빙하는 현대판 여성의 노예화를 풍자하고 낙원과 인류 타락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대작을 완성한 마네는 그 이듬해 쉰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뤼에유-말메종 황제가 살다간 역사의 도시 마네는 요양차 뤼에유-말메종으로 갔다. 이동성 운동실조증으로 죽어가던 마네는 치료를 위해 이곳에 정착했다. 파리 서쪽 8킬로 지점에 위치한 뤼에유-말메종은 몽 발레리앙(Mont-Valérien) 구릉과 북쪽 센 강 연안으로 이어지는 뷔장발(Buzenval) 언덕위에 있다. 센 강까지 10킬로의 자연공원 숲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강이 흐르고 햇빛이 쏟아지는 마을 입구의 풍광은 참으로 기가 막히다. 이 풍경을 화폭에 담고자 인상파 화가들은 화구를 매고 앞 다퉈 몰려들었다. 마네, 모네, 르누아르도 질세라 이곳의 경치를 그렸고 그 그림들은 지금까지 명화로 남아있다. 강둑 위에 즐비하게 늘어선 멋들어진 선술집에서 마네는 친구들과 풍류를 즐겼다. 그 족적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천상의 낙원인 뤼에유-말메종. 황제가 머물렀기에 역사적 귀품이 그윽하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472 ha의 평원이 펼쳐진 저택에서 살았다. 집정 스타일의 세간을 꾸리기 위해 파리 외곽에 땅을 찾던 조제핀은 1799년 말메종 성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녀는 곧바로 구입해 아름다운 말메종 궁전에서 나폴레옹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1809년 이혼함으로써 나폴레옹은 떠났고 조제핀만 여기 남아 여생을 보냈다. 그녀는 이곳에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정원을 만들었다. 200 여종이 넘는 식물을 사들여 정성들여 키우고 애정을 쏟은 결과 지금은 유럽 최고의 정원이 됐다. 말메종 성 2층 조제핀 방에 가면 그녀의 아기자기한 자취를 엿볼 수 있다. 파리 여행에서 빠트리면 절대 안 될 곳 하나는 바로 이곳이다. 자동차로 12분이면 당도한다.
한때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모범적 선진국이었다. 그 중심에는 막사이사이(Ramon Magsaysay: 1907-1957) 대통령이 있었다. 가난한 고학생 출신인 그가 하숙집 주인의 운전기사로 일하며 야간대학을 마쳤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일본의 필리핀 침략에 자원입대하여 게릴라전에 참여한 그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 명성을 쌓고 전후 지역의 군정장관을 거쳐서 국방장관에 올랐다. 국방장관 재임 시에는 부패한 군 지휘관을 숙청하고 정직한 군인을 우대하였다. 공산반군의 거점인 후크발라합 지역의 게릴라들을 진압할 때는 귀순자들에게는 토지와 농기구를 마련해주고 정부군에게는 그들을 무시하지 말고 정중하게 대하도록 명령했다. 농민의 성원 없이는 어느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이즈음이었다. 195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그는 대통령취임식에 관용차인 크라이슬러 리무진을 거절하고 중고차를 빌려 타고 입장했다. 대통령이 거처인 말라카냥궁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해 서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찾아와 어려움을 호소할 수 있게 했고 가족과 친지들에게는 어떠한 혜택도 거절하였으며 도로, 교량, 건물들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못 하게 했다. 가난한 농민 위주의 토지개혁안이 부유층의 대변자였던 의회의 반대로 무산되자 그는 반대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설득했다. 이렇게 서민을 위한 그의 행보는 끝이 없었다. 손수 차를 몰고 다니다가 눈에 띄는 시골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는 대통령의 모습은 흔히 목격되었다. 아직도 필리핀 곳곳에는 ‘막사이사이 우물’이 있는데 모두 그가 빈민가와 낙후된 지역을 다니면서 설치한 공동우물의 이름이다.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던 그가 사망한 이후 필리핀의 국격은 급전직하로 떨어졌다. 이후 정치지도자들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국민을 무시하는 행태 때문이었다. 2023년 대한민국의 앞날이 어둡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안보, 외교, 경제 등등 사회 곳곳에 암초가 깔렸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지도자의 행태이다. 그의 생각과 행동에 따라 국민의 성원과 지지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남북은 화해의 대상이지 증오의 상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진 지도자. 노동자는 우리 산업의 역군이지 결코 기득권에 안주한 세력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서민들은 따듯한 가슴으로 안아 주어야 할 대상이라고 확신하며, 자신보다 국민의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일념으로 10.29 참사의 유가족이 가장 크게 위로받아야 할 아픈 사람임을 아는 지도자. 국민을 사랑하는 지도자야말로 국민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막사이사이로부터 배울 수 있다면. 막사이사이가 1957년 사망했을 때도 한밤중에 아들이 군에서 총기사고로 사망했다는 국민의 안타까운 전화를 받고 직접 비행기 시찰을 나섰다가 당한 사고였다고 한다. 우린 이런 지도자를 가질 자격이 없는 민족인가? 우리도 이런 지도자로 바뀌는 꿈을 꾸며 대망의 2023년을 맞이해 보자.
공공형(공익형) 노인 일자리는 60세 이상 노인이 공익활동에 참여하고 약간의 보수를 받는 일자리다. 보통 월 30시간동안 일하고 27만 원을 받는다. 주로 환경 미화나 도시락 배달, 시설물 점검 같은 공익활동에 투입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세금을 축낸다” “질 낮은 일자리” “취업 통계를 부풀린다”는 등의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해 5월 통계청은 ‘취업자 수가 1년 전보다 86만 명 늘어나 4월 기준으로 22년만에 최대폭으로 증가했다’는 고용동향을 발표했다. 그러나 기획재정부는 “직접 일자리와 고령자 비중이 너무 높다. 재정을 통한 일자리 창출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평가는 질 낮은 공공형 노인 일자리를 비판한 것이다. 이에 윤석열정부는 2023년부터 6만 1000개의 공공형 노인 일자리를 없애겠다고 밝힌바 있다..
전호근 교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는 『한국철학사』에서 현대철학자로 함석헌, 장일순 등 6명을 다루고 있는데 이들의 특징은 독창성에 있다. 동서양 철학의 각주가 아니라 한국적 삶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일제에서 해방되어 근대를 거치지 않고 현대로 직행한 한국은 여러 모순의 집합체다. 이 모순을 끊어내려고 줄기차게 싸워왔던 게 한국 현대사의 자기정체성이기 때문에 이에 기반한 철학이 태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눈부시게 활동하고 있는 한국 현대 철학자들 중 김상봉 교수(전남대 철학과)는 "우리의 역사에 뿌리박은 철학의 형성"을 궁극적으로 지향한다. "한국의 주류 철학계가 철학을 외부에서 얻어오는 일에 골몰하여 자기로부터 새로운 보편적 세계상을 형성해내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반성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는 철학을 "자기 속에서 세계를 만나며 세계 속에서 자기를 만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한마디로 '만남의 철학'인 것이다. 김 교수는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에서 "진리는 만남에 있다"고 선언한다. 진리하면 고차원적인데다 난해한 철학적 명제로 알고 있는 이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고작 사람과 사람의 부딪힘 속에 진리가 있다는 말은 얼마나 평범하며 비철학적인 것인가. 김 교수는 『서로주체성의 이념』과 대담집 『만남의 철학』에서 진리가 왜 만남에 있는가를 논증한다. 만남은 곧 '서로주체성'이다. 자기가 누구인가에 대한 반성적 자기인식이 주체성인데 "타자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고 자기와 치명적 단절 속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성은 다른 주체성과의 만남이 있어야 비로소 온전한 것이 된다. 이럴 때 타자 속에서 자기상실과 홀로주체성을 치유하고 극복할 수 있다. 만남의 철학은 한국 현대사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철학보다 현실적·구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김 교수는 한국 사람들이 모순과 맞서 세계사에 전례가 없을 정도로 잘 싸웠지만 민주주의를 꽃 피우지 못한 한계가 있다고 본다. 그 까닭을 생각 없음, 정신의 빈곤에서 찾는데 스스로 생각하는 일에 게으른 나머지 권력이 주어졌을 때 설계도도 없이 남이 만들어놓은 세계상에 의존해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작금의 정치를 보자. 한국 현대사의 모순에 맞서 싸웠던 당사자들과 지지자들이 적지 않은 민주당에 세계상이 과연 있는가? 세계상은 고사하고 온갖 위험한 사법 리스크를 안고 있는 당대표에게 쓴 소리 하는 사람조차 없는 상황이다. 저런 당대표 앞에서 침묵하는 것이야 말로 정신의 빈곤 아닌가. 주체성과 서로 주체성 없음 아닌가. 만남의 철학은 간단하지만 결코 만만치 않다. 나 자신이 주체성으로 서는 한편 다른 주체성과 끊임없이 만나면서 다른 차원의 주체성으로 거듭나는 지난한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집과 오만, 엘리티즘, 콤플렉스 따위 들어설 틈이 없다. 참된 희망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에도 만나야만 한다.
교사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단어들 중에 하나가 ‘철밥통’이다. 교사는 공무원이라 어떤 비위를 저질러도 잘리지 않는다는 멸칭, 혹은 경기가 어려울 때는 고용 안정성의 부러움을 담은 칭찬을 담은 말이다. 여러 가지로 사용되는 거 같지만 용례를 떠올리면 대체로 멸칭에 가깝다. ‘나 때는 교사가 애들을 두드려 패도 잘리지 않았어. 그놈의 철밥통들.’ ‘교사는 철밥통이라 아무것도 안 하고 자리만 지키고 있지.’ 등등. 철밥통이란 말을 들어도 고용 안정성은 교사를 선택하는 큰 장점 중 하나였다. ‘였다’, 라는 과거형을 쓴 건 더 이상 교사는 철밥통이 아니다. 공무원이라는 직위가 사라진 건 아닌데 더 이상 고용 안정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유는 수업 중에 교사가 ‘아동학대’로 신고돼서 1원 이상의 벌금형 이상을 받게 되면 10년 동안 교사직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사가 아동 관련해서 법적 처벌을 받으면 교단을 떠나야 한다는 건 이미 정해져 있던 사실인데 새삼스럽게 철밥통이 부서질 정도인가에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교사가 범죄를 저지르면 교단을 떠나야 하는 게 맞다. 아동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르거나, 때리거나, 정서적 학대를 한 사람이 아이를 가르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여기에 대한 이견은 없다. 이 중에서 문제가 되는 건 정서적 아동학대다. 정서적 아동학대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아동이 정서적으로 압박을 받는 상황이라면 모두 아동학대가 될 수 있다. 아동학대 신고 사례 1. 복도에서 전담 수업을 들으러 가기 위해 줄을 제대로 서지 않는 문제로 교사가 전체 지도함. 다시 줄을 서게 하자 이에 불만을 품을 학생이 크게 발을 쿵쾅거림. 교사가 다른 학생들을 전담실에 보내고 아동을 교실에 남겨서 지도함. 아동을 강제로 교실에 남겨져서 압박했다는 이유로 정서적 아동학대 신고를 당함. 아동학대 신고 사례 2. 학기 말에 교육과정에 존재하는 ‘배려하는 어린이 칭찬하기’ 활동을 함. 몇몇 아이들이 배려받지 못한 사례도 이야기하고 싶다고 적극적으로 제안함. 한 해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고자 배려받지 못했던 행동과 당사자를 적어서 제출하고 교사가 이를 읽어주고 앞으로는 친구들에게 조심해서 행동하자며 수업을 마무리함. 이름이 불렸던 학생의 학부모 중 몇몇이 이의 제기를 함. 교사가 1년 무급 휴직 내용이 담긴 서면 사과함. 이후 정서적 아동학대 신고를 당함. 1심 재판 이전에 교육청에서 견책 징계가 나옴. 아동학대 신고 사례 3. A 학생이 일기장에 교사 욕을 적음. 교사가 내용을 공개한 뒤 혼내야 해, 안내야 해. 라고 말함. B 학생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급식실에 혼자 40분간 남겨 둠. C 학생이 부적절한 언행을 하자 이를 지적하기 위해 다른 학생들에게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을 반복해서 말하게 함. 아동학대 신고 후 1심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선고 나옴. 이 밖에 교사가 아동학대로 신고당한 수많은 사례가 존재한다. 지난한 법적 다툼 끝에 무죄로 끝난다고 할지라도 아동학대는 형사 사건이기 때문에 변호사 없이 경찰서에 출석하기조차 어렵다.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신고당해도 일단 변호사와 같이 출석해야 한다. 이때 발생하는 비용은 오롯이 교사가 부담해야 한다. 젊은 교사 집단의 분위기는 점점 아이들 인성 지도나 생활 지도는 포기하자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괜히 아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아동학대로 신고당하면 철밥통이 날아가기 때문이다. 누군들 위험을 떠안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교실에서는 온전히 교과목 관련 교육만 이루어지는 게 아이들과 교사에게 안전한 세상이 왔다. 이게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분투하는 이들 옆에서 일부 시민들이 구급차의 붉은 경광등을 빛 삼아 떼 춤을 췄다. 사고가 난 걸 알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유흥을 멈추지 않았다.- 한 신문에 실린 칼럼 한 대목이 끔찍한 이태원 참사를 기억 속에서 다시 소환하네요. 그때 거기에 악마들이 있었군요. 어쩌면 악마는 우리에게서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닐지도 몰라요. 흑토(黑兔) 새해가 시작됐지만, 세상이 딱히 달라질 것 같지 않은 정초예요. 이 시대 최고의 시사 논객 중 한 분인 전북대학교 강준만 교수가 지난 연말 ‘퇴마 정치’라는 제목의 새 책을 냈군요. 진보 진영에 대한 논리정연한 비판을 서슴지 않아 온 강 교수는 『윤석열 악마화에 올인한 민주당』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도 민주당에 대해서 혹독한 쓴소리들을 늘어놨네요. 강 교수는 일찍이 다른 저서에서 “문재인..
도시공간이 흥미로워 관련된 도서를 읽기 시작한 계기가 있다. 2012년 경기남부지역 통일교육센터 상근직 강사로 2년간 활동했다. 통일교육강의를 하면서 살아온 고향에 대해 무지함을 느꼈다. 경험으로 강의를 이어가기에는 지식이 한참 부족했다. 무지함을 벗어나고자 북한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관련 수업을 듣으며 내가 살았던 공간이 궁금해졌다. 함경남도 고원군 수동구는 시골답지 않는 도시다. 석탄이 식량만큼이나 중요해 탄맥 있는곳에 인력을 집중했다. 그러다보니 1980년대까지 고층건물이 희소하고, 하모니카로 부르는 급조된 단층집이 많았다. 생산에 집중했기에 서비스업이 부족하고 문화생활이 자유롭지 않다. 새로 나온 영화는 명절시즌에 맞추어 방영되는데, 그걸 보려고 사람들이 빼곡하게 늘어섰다. 뒷거래로 뭉치표를 구매해 야매로 파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유행되었던 음악, 무용, 영화가 흑백화면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도시연구는 평양위주로 많았고 지역도시 함흥관련 선행연구가 적었다. 중요하게 식민도시에서 사회주의도시이행 관련 연구가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석박사 논문을 함흥으로 준비했다. 함흥을 읽다보니 내가 살았던 고원군 수동구보다 훨씬 이야기가 많았다. 함흥은 외사촌형제들이 살고 있고 친언니가 함흥 주변으로 시집가는 바람에 닳도록 드나들었던 지역이다. 함흥에 있는 ‘도지방총국기능공학교’에서 직업교육도 받았다. 함흥역전과 동흥산구역, 회상구역으로부터 장진, 부전으로 가는 신흥선 기차를 타고 다녔다. 함흥냉면에 원조 ‘신흥관’에서 농마국수도 먹었다. 1984년에 지어진 함흥대극장 앞으로 수 없이 지나다녔다. 함흥에 얽힌 이야기를 담으니 살아온 생애처럼 사람들이 도시를 만들어온 흔적이 보였다. 아득한 옛날부터 길이 생기고 사람이 모여 도시를 만들어왔다. 사람이 도시를 만들고 도시가 사람을 만들듯 도시생애를 통해 사람과 사회가 변화해온 과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떠한 이유로 도로가 생기고, 건물을 올리고,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흔적을 남겨놓았다. 도시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린다. 그래서 도시를 변압기에 비유한다. 도시는 새롭게 태어나 성장하기도 하지만 쇠퇴하고 몰락하면서 사라지기도 한다.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회가 연결되어 도시 성격을 만든다. 사람이 모여 있는 만큼 정치적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인 것이 공간을 지배하고 도시문화를 만든다. 도시와 도시는 비교 가능하다. 개발된 지역과 덜 개발된 지역을 살펴보면 사람과 사회를 알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시간에 도시가 있다. 공간은 영원한데 사람과 사회는 시대에 따라 모습을 달리해왔다. 색바랜 기억과 지식으로 도시에 얽힌 이야기를 꺼낸다. 자연, 사람, 사회 요소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는다. 북한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북한 사회에 대한 이해를 돕고,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도시기행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