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본질 우리는 매일 뉴스를 보고 씹고 먹는다. 뉴스는 사회적 존재의 영양식이다. 곧 내 의사결정의 바탕이 된다. 오늘 뉴스를 보지 않았다면 공동체적 삶인 사회적 하루를 놓친 셈이다. 뉴스는 사회적 생활의 자양분이 되고, 감정과 정서의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기여한다. 그러니 저널리즘은 독자들이 편식하지 않고 균형식을 하도록 도와야 하고, 그 뉴스 정보는 사회적 의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야 한다. 우리 뉴스의 풍경 미국에서 신문이 대중화되기 시작할 때 신문의 상업적 경쟁은 치열하였다. 뉴욕 월드(New York World)와 뉴욕 선(New York Sun)의 격렬한 경쟁은 언론 역사와 저널리즘에서 다루는 주요 현상이 되었다.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도 이들 미디어 보도가 부추겼다는 평가도 있다. 이 때의 극단적 경쟁을 선정주의적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뉴스 풍경은 믿을만한가. 백년도 더 지난 미국의 선정주의적 뉴스 풍경을 닮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뉴스는 공론장(公論場)이다 국내에도 철학자와 사회학자로 명성이 알려진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J. Harbermas)는 전통사회에서는 주민들과 지식인들이 마을회관이
추석이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한반도가 들썩거린다. 민족대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고향방문을 위해 장을 보고 선물을 준비한다. 상인들도 이만한 대목이 없기 때문에 잔뜩 기대하기 마련이다. 방송에서는 귀향하는 사람들을 촬영하기 위해 서울역이나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찾아 행복해하는 귀성객을 인터뷰하는 것이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추석의 기원은 고려시대부터라고 한다. 원래 달을 기리는 의식이었지만 그 당시 농사를 짓던 조상들은 달을 기림과 동시에 더 먼 조상에게 감사의 예를 표현하는 의식이기도 했다. 이러한 의식은 삶의 패턴이나 사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전통으로 자리 잡으며 현대사회까지 존치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216만 6000명(농림어업조사결과, 2022년 말 현재)으로 우리나라 총인구의 4.2%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풍요를 가져다주었다고 믿는 조상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는 사람은 없다. 그저 관성적으로 한자리에 모이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이처럼 추석은 누군가에게는 설레임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부담되는 명절일 수 있다. 내가 어릴 때는 이웃집 담장이 높지 않았다. 옆집에서 일어나는 일은 소리로 들을 수 있었고 눈으로…
“특수학교를 보내든지, 아니면 외국으로 가세요.” 특수학급 교사를 아동학대 혐의로 고소한 유명 웹툰 작가에게 비난 댓글이 달렸다. 제 자식만 챙기는 이기적인 부모라는 낙인이 따라왔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처럼 쉬운 표현 같겠지만 냉담하다 못해 돌팔매에 가깝다. 처음엔 작가인 부모가 표적이 됐지만, 다음에는 그의 아들로, 그 다음에는 장애아동과 부모에게 비난이 옮겨갔다. 작가가 교사를 아동학대로 고소했다고 하니 교권 침해라고 눈총을 샀다. 특수교사에게 자녀에 관한 당부를 상당하게 전달했고, 아동에게 녹음기를 들려 보내고, 적합한 성교육 강사를 추천하겠다고 했다. 극성 부모의 모습이었다. 부모 행위에 대한 비난으로 끝나지 않았다. 작가의 자녀가 비장애아동과 수업을 듣는 통합교실에서 어떤 계기로 특수학급으로 옮겨 수업을 받게 됐는지 자세히 파헤쳤다. “본능에 충실한”, “바지 내려”, “고추‧사타구니 단어 사용”과 같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을 주로 인용했고 제목에 그대로 노출했다. 자녀의 행동에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행동을 이해시키기 위한 설명을 생략한 채 보도한 부분은 ‘문제적’이다. 비장애아동과 부모들에게 납득 여부를 묻는…
이제 얼마 있으면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이라 할 수 있는 추석이다. 명절이 되면 그 동안 떨어져 지내던 일가 친척들을 만난다는 기쁨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기쁨만큼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현대인에게 있어 스트레스는 일상적인 일이라고도 하지만 명절에 받는 스트레스는 특히나 큰 것 같다. 흔히들 스트레스는 만병의 원인이라고 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 몸 안에 있는 균들도 변하게 될까?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 안의 유익균들도 그 스트레스를 같이 받고 변화가 일어날까? 스트레스는 진짜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까?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양한 증상들이 나타난다. 집중력 약화, 주의 산만, 기억력 감소, 공허감, 혼란, 불안, 우울 등과 같은 정신적 변화가 가장 대표적이고 난폭한 행동을 하거나 손톱 깨물기, 다리 떨기, 폭식 등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왜 이런 증상들이 나타나게 되는 걸까? 스트레스를 받으면 시상하부의 바소프레신과 부신피질 자극 호르몬 방출로 뇌하수체를 자극하여 코티솔(COTISOL) 분비를 촉진한다. 스트레스로 증가한 코티솔은 혈당을 높이고, 신경세포를 제어하여 우울, 불안, 인지 기능 저하 등을 유발하고 면역력을
색소폰 아티스트,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소울 아이즈(Soul EYES)’. 제이비엘 4344(JBL Model 4344) 스피커로 듣는 음악은 사물과 현상을 관조케 하는 마력이 있다. 평소엔 감정의 편이 되다가도 재즈를 들으면 이성(理性)의 편에 서게 된다. 영혼의 눈으로 사건과 사물을 보면 미래는 긍정적이다. 반전 있는 미래를 그려보게 된다. 지난 21일, 민주당 국회의원 최소 30명이 단식 중인 이재명 대표에 대한 체포 동의안에 찬성했다. 마치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300명 국회의원 중 234명의 찬성으로 가결됐던 장면과 겹쳐진다. 빌어먹을… 기성 프로페셔널 정치인, 직업 정치인들에게 국민이 농락당했다. 윤석열과 이준석에게 젊은 청년들이 이용당했듯, ‘개딸’들도 노회한 문파 정치인들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무대 위 적막. 감정적으로 격분할 일 아니다. 철학으로 분해하면 간단하다. 칸트와 쌍벽을 이뤘던 독일 철학자 헤겔은 “현실적인 모든 것은 이성적이며, 이성적인 모든 것은 현실적”이라고 했다. 배신과 잇속의 정치는 현실이다. 따져보면 이성의 정치다. 인간의 이성은 그게 선이든, 악이든, 현실로 나타
눈 먼 자만이 될 수 있었다. 현악기를 들고 마을을 돌며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다. 서사시를 읊고 옛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대부분 문맹이었고 통신수단이 없었던 옛날, 사람들은 이들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전쟁이 났다더라. 왕이 바뀌었다더라. 역병이 돈다더라...... 집시들의 삶만큼 원시적이고 낯설고 매혹적인 사람들. 그들끼리만 비밀리에 주고받던 언어가 있어 신비를 더하는 존재들. 이들은 우크라이나의 맹인 유랑 예술가로, ‘콥자’라 불렸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세월의 격변 속에서도 콥자를 예우하고 사랑했다. 글 배운 이들이 늘고 통신수단이 생기고 놀거리, 볼거리 넘치는 세상이 되어도 콥자를 기다렸다. ‘오직 사람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가 있기에. 그렇게 수 천 년 역사와 함께 해온 콥자들이 20세기를 만나면서 씨가 마르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기원 전후, 이란 계통의 스키타이인과 로마제국을 뒤흔든 고트족, 훈족이 잠시 살았던 이 땅에 뿌리내린 이들은 서기 6세기경에 나타난 슬라브인들이었다. 이들은 (오늘날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우’라는 도시를 세워 우크라이나 역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13세기 침입한 몽골의 2세기에
1. 페이스북(facebook)은 마크 주커버그가 약관의 나이였던 2004년에 창업한 SNS 플랫폼이다. 이후 월간 활성 사용자(MAU), 즉 30일 동안 접속한 사용자 합계 기준으로 30억 명을 넘어서는 명실공히 세계 최대의 소셜미디어로 성장했다. 이 온라인 공간에서 표현자유 탄압 논란이 불붙고 있다. 도화선이 된 것은 지난 9월 2일 이었다. ‘개밥풀’과 ‘물의 노래’등으로 널리 알려진 이동순 시인의 시작품 ‘홍범도 장군의 절규’를 혐오표현이란 낙인을 찍어 무단 삭제한 것이다.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를 개탄한 이 시의 삭제 이후, 현재까지 이동순 시인이 올리는 작품에 대한 집요한 삭제가 반복되고 있다. 그의 시를 옮겨 적은 일반 게시물에 대해서도 대대적 삭제 열풍이 불고 있다. 문학으로서 저항시에 담긴 비판과 풍자는 작품의 생명이요 존재 이유 자체다. 그러한 ‘인간 정신’에 대한 무도한 검열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작가와 문학작품에 대한 이 같은 직접적 탄압은 박정희의 유신시대에나 있던 정치적, 문화적 만행이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은 명실공히 세계적 선진국으로 자리잡은 민주주의 공화국 아닌가. 이런 공동체에서 일개 외산(外産) 상업적 온라인 기업
책 한 권을 만들려면, 5m 높이의 나무 한그루가 필요합니다. 그 나무가 온전히 자라는데 걸리는 시간은 30~60년입니다. 나무의 전 생애를 바쳐야 책 한 권이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노르웨이에서 가문비나무 묘목 천 그루를 심었습니다. 2014년에 심어진 이 나무들은 백 년 동안 베지 않습니다. 나무를 심은 사람들은 그때부터 작품을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해마다 한 사람의 작가에게 한 편의 작품을 부탁했습니다. ‘마가렛 앳우드’, ‘데이빗 미첼’ 등이 요청에 응했습니다. 요청에 응한 작가 중에는 우리나라 소설가 ‘한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꺼이 내놓았지만 작품은 누구도 읽을 수 없습니다. 모아진 작품들은 단단히 봉인되어 오슬로 공공도서관 ‘침묵의 방’에 백 년 동안 보관됩니다. 봉인된 작품을 읽으려면 백 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봉인은, 가문비나무 천 그루를 심었던 2014년부터 정확히 백 년 뒤인 2114년에 풀립니다. 봉인이 풀린 작품을 책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2014년에 심은 천 그루의 가문비나무입니다. 백 년 전에 심었던 가문비나무 천 그루로 백 편의 작품을 책으로 묶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래도서관’이라…
젊은 세대가 정치나 통일에 무관심한 것을 단지 풍요로운 시절 태어나 그런 것이라 말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과도한 정치 냉담이나 지극히 외골수적인 정치 편향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도 많다는 것은 그런 설명만으로 부족하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지금의 젊은 세대가 성장하면서 체험하는 정치 현실을 보면 이들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을까 한다. 그동안 우리 정치 현실을 잘 대변하는 말로써, ‘정치란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표현이다. 이 말로 상징되는 우리의 그동안 정치 현실이 지금의 젊은 세대를 만든 것일 수 있다. 이 표현이 담고 있는 것은 결국 상대 정당이나 정치인을 비난하고 문제점를 들춰내면 내가 부족해도 차악으로 선택됨을 의미한다. 이런 식으로 선택된 과정을 반복하는 정치 문화에서는 굳이 희망과 발전의 가치와 정책 제시로 선택되기보다는 그저 상대방 비난만 한다. 진영 논리와 뺄셈 정치 속에 갇히는 것이다. 정치는 언제나 부정적인 갈등과 싸움의 현장이 되고, 결국 그런 정치가 펼쳐지는 사회는 긍정적으로 발전하고 나아가는 사회가 아니라 언제나 차악 사회로 전락한다. 이렇게 정치인들이 희망과 가치를 말하는 덧셈 정치보다는 자신들의 지지와 선택을 위해…
캠핑의 계절이 돌아왔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지면서 주말마다 짐을 꾸리는 캠퍼들도 늘었다. 코로나 시대 차박과 캠핑은 급속히 증가했고, 자유를 되찾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가을에 캠핑을 향한 열정은 점점 더 커져간다. 그러나 떠날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다. 소규모로 타인과 섞이지 않는 언택트 여행을 추구하던 시기,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닌 지역들은 몸살을 앓았다. 숙박의 추세가 펜션보다 캠핑으로 기울었어도 지역주민들은 캠핑장 설치를 반대하고 곳곳에 차박 금지 현수막을 걸어둔다. 사람이 많이 오면 지역에도 도움이 될 거란 말은 옛말이라며 고개를 내젓는다. 겨우 찾아내 방문한 아름다운 지역, 내년에도 머무를 수는 없을까? 집 앞 마트에서 식재료를 잔뜩 사서 떠나 야외에서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떠들고, 음악을 듣다가 머무른 곳에 쓰레기를 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자연 속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차박이나 캠핑이라 생각해왔다면 이제 다시 배워야 한다. 요즘은 캠핑장도 10-11시 이후엔 매너타임으로 조명을 낮추고 말소리와 음악을 줄여달라고 요청하는데 노지라면 어떨까. 아무데나 물이 있는 곳에서 샴푸나 비누를 이용해 씻고, 세제를 사용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