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동전 발발 등으로 에너지 위기감이 깊어지는 가운데 자원 순환 사업을 운영 중인 재단법인 기빙플러스의 활약과 성과가 주목받고 있다. 기빙플러스는 기업의 재고·이월 상품이 단순히 폐기되는 대신 새 생명을 얻어 시장에서 유통되도록 유도하고, 이 과정에서 장애인과 취약계층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창출하는 모범적인 선순환 모델이다. ‘기빙플러스’에 대한 호응도를 더욱 높여 긍정적인 역할을 극대화하도록 하는 적극적인 성원이 필요하다. 지난 2017년 첫 매장(석계역점)을 시작한 이 사업은 선도적인 친환경 나눔스토어로서 입지를 다져왔다. 2019년 10호점, 2022년 20호점을 돌파한 데 이어 현재 전국에 28개의 매장을 운영하며 빠르게 확장 중이다. 특히 경기도와 인천 지역에는 인천갈산역점, 인천부평점, 인천논현점, 수원권선점, 성남태평점, 평택안중점 등 다수의 매장이 자리 잡고 있다. 서울 지역에서도 접근성이 좋은 지하철 인근에 매장을 열어 소비자들의 발길을 유도하고 있다. 기빙플러스의 사업 모델은 복잡하지 않지만, 그 효과는 강력하다. 기업으로부터 기증받은 재고 상품을 철저한 품질 검수 후 매장에서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한다. 이렇게 하여 발생한 수익은 전액 장애인, 다문화 여성, 이주여성 등 고용 취약계층의 일자리 창출과 지원에 재투자된다. 단순한 기부·판매를 넘어 탄소 저감형 프로젝트로 확장해 자원 순환을 통한 환경 보호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핵심이다. 사회복지법인 밀알복지재단은 지난 2017년부터 시작한 친환경 나눔 가게 사업의 사회적 경제사업으로서의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2022년 5월 재단법인 기빙플러스를 설립했다. 재단법인 기빙플러스는 친환경 나눔 가게를 기반으로 지역사회 나눔 문화를 활성화하고 국내외 취약계층의 자립을 지원하여 소외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완전한 사회통합을 지향하고 있다. 기빙플러스는 현재까지 장애인 및 취약계층 약 200여 명의 자립을 지원했으며, 6000여 가구에 생계지원 키트를 전달했다. 또한 독거노인, 저소득층 아동, 한부모 가정 등 총 2만여 가구에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했다. 현재 1974개의 기업이 후원기업으로 참여, 모두 1166만 점의 제품을 기부해 7527가정이 지원 혜택을 받았다. 탄소 절감 효과도 1167만 kg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참여기업들은 재고 폐기 비용 절감과 함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어 상생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기빙플러스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ESG 착한경영대상 환경 부문 본상을 3년 연속 수상했다. 최근에는 2025 서울특별시 환경상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에너지 위기, 환경오염 문제의 부각과 함께 지난 2008년 말 영국 웨일스에서 시작된 ‘3R 운동’ 등 물자 관리와 관련된 운동이 새삼 주목된다. ‘3R 운동’은 절약(reduce)·재사용(reuse)·재활용(recycle)의 각 첫 머리글자로서 물자를 절약하고, 재활용하자는 환경운동이다. 쓰레기를 줄이고, 버릴 물건을 다시 사용하고, 재활용 제품을 적극 사용하자는 취지의 ‘쓰레기 제로’ 운동이기도 하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당시 주부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던 물건 재활용 캠페인인 ‘아나바다 운동’이 떠오른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뜻의 줄임말인 ‘아나바다 운동’은 지구촌 환경위기가 갈수록 깊어지는 시대에 두고두고 그 가치가 빛나는 소비자 운동이다. 기업의 ESG 실천을 돕는 동시에 소비자에게는 의미 있는 소비 기회를, 취약 계층에게는 자립의 발판을 제공하는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지속 가능 모델인 ‘기빙플러스’에 대한 호응도를 더욱 넓혀야 한다. ‘전국 유통망 100개 점 확보’라는 기빙플러스의 새로운 목표가 하루빨리 달성되도록 온 국가사회의 전폭적인 관심과 성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전쟁은 당사국을 넘어 세계적 범위에서 개인의 일상을 파고들고 있다. 뉴스는 연일 공습 지점과 전쟁의 경과, 첨단 무기의 전과 등을 경쟁하듯 보도한다. 세계 지도 위에서 국가라는 장기 말을 옮기듯 중계되는 전쟁 담론 속에서, 정작 전쟁이 개인의 삶, 특히 사회적 약자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의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국제 정세를 읽는 ‘국가’적 관점도 중요하지만, 그 시선이 놓치기 쉬운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에 더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 전쟁이 과연 누구에게 가장 가혹한 무게를 지우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는 의미다. 우선 전선으로 가장 먼저 투입되는 이들이 누구인지 살펴야 한다. 모병제를 시행하는 미국에서 군입대는 종종 애국심만큼이나 절박한 경제적 선택의 결과다. 학비 마련이나 의료 혜택, 혹은 안정적인 생계를 위해 제복을 입은 젊은 장병들의 상당수는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에 속해 있다. 국가의 결단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정작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들은, 역설적이게도 사회에서 충분한 삶의 기회조차 보장받지 못했던 청년들이다. 이들은 스스로 입대를 선택했을지라도, 막상 전쟁이 터진 뒤 이를 거부할 권리는 없다. 전쟁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탈영이나 명령 불복종으로 기소되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이들에게 선택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의 여파는 국경을 넘어 수많은 시민의 일상으로도 침투하고 있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 치솟은 유가는 생활 물가 전반을 압박한다. 전쟁으로 인한 물가 상승은 누군가에게는 소비를 조금 줄여야 하는 불편함 정도일지 모르나,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이들에게 고물가는 곧 생존의 위협이다. 소득의 대부분을 식비와 주거비로 지출하는 저소득 계층에게 식재료 가격과 에너지 비용의 상승은 당장의 끼니를 부실하게 만들고, 기본적인 냉난방조차 망설이게 하는 가혹한 현실로 다가온다. 위험은 무차별적으로 닥쳐오지만, 그 위험을 견뎌낼 경제적·사회적 자산이 부족한 시민들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게 타격을 입는다. 더욱 비극적인 사실은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마저 포화의 한복판에 내몰리고 있다는 점이다. 학교와 같은 민간 시설이 공격받고 어린 생명들이 희생되는 뉴스는, 전쟁이 얼마나 잔혹하게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부터 겨냥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전쟁을 결정하는 이들은 안전한 지하 벙커에 머물 수 있을지언정, 그 대가는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아이들과 일터를 지키던 평범한 시민들의 무너진 일상으로 치러지고 있다. 결국 전쟁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가장 처참한 방식으로 증명하는 현장이다. 국가 간의 관계와 전쟁의 명분을 논하기에 앞서, 그 결정이 어떤 시민들에게 어느 정도의 무게로 쏟아질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이번 전쟁을 지켜보며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승패의 결과가 아니다. 이 전쟁이 누구의 삶을 무너뜨리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피해와 희생에 무감하지 않은가.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기에 접어들었다. 정말 ‘100세 시대’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오늘날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은퇴’를 끝으로 여기는 삶의 문법에 익숙하다. 오랜 세월 직업과 역할 중심으로 달려온 우리에게 퇴직은 마침표로 느껴지기 쉽다. 그런데 그 마침표 이후의 시간이 생각보다 길다. 준비되지 않은 긴 시간은 축복이 아니라 지루한 외로움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 점에서 나는 은퇴 후의 ‘버킷리스트’가 단순한 소망을 나열한 유행어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재구성하는 중요한 도구라고 말하고 싶다. 그동안 ‘무엇을 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정의했다면, 이제는 ‘무엇을 할 사람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자존감이 흔들리고 무력감이 찾아온다. 버킷리스트는 바로 이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적극적 선언이며, 미래를 향한 능동적 설계도다. 버킷리스트의 첫째 기능은 삶의 방향성을 회복시키는 데 있다. 직업 중심의 정체성이 사라진 뒤에도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실행하는 과정은 자기 효능감과 삶의 의미를 회복시키며 자신을 다시 삶의 주체로 서게 한다. 여행지 몇 곳을 적는 단순한 목록을 넘어, 배우고 싶었던 악기, 다시 시작하고 싶은 공부, 지역사회에서 해보고 싶은 봉사활동을 구체화하는 일은 일상의 리듬을 만든다. 목표가 있는 하루와 그렇지 않은 하루의 밀도는 현격하게 다르다. 버킷리스트는 또한 정체성의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흔히 직업적 성공을 중심으로 자아를 형성해 왔다. 그러나 은퇴 이후에는 손주를 돌보는 할아버지, 동네 도서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원봉사자, 강의실에 앉아 있는 늦깎이 학생 등 다양한 활동과 새로운 역할을 통해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버킷리스트는 이처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단일한 직업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확장시킨다. 게다가 이는 관계의 재구성을 돕는다. 은퇴 후 고립은 가장 큰 위험 요인 중 하나다. 혼자만의 버킷리스트가 아니라 배우자, 친구, 동료와 함께 공유하는 ‘걷기 모임’을 만들고, ‘여행하는 계획’을 세우고, ‘같은 책을 읽고 토론’하는 일들은 사회적 연결을 촉진하고 고립감을 예방한다. 인간은 여전히 사회적 존재이며, 의미 있는 관계 속에서 더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마지막으로, 버킷리스트는 죽음을 성찰하게 하는 역설적 기능도 가진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라는 표현에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 담겨 있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음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지금의 하루를 소중히 여긴다. 미루어 두었던 화해, 표현하지 못한 감사, 도전하지 못했던 꿈을 목록에 올리는 순간 삶은 더 진지하고 풍성해진다. 따라서 버킷리스트는 거창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지속성이다. 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하나씩 실현해 내며 지워나가는 경험은 자신감과 성취감을 고양시키고, 이는 다시 새로운 도전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든다. 은퇴는 사회가 부여한 역할의 종료일 뿐, 이후는 자신을 완성해가는 가장 성숙한 시기다. 우리는 그 시간을 준비해야 한다. 은퇴 후의 버킷리스트는 성공을 위한 도구라기보다 노년을 위한 최소한의 준비다. 오늘 종이 한 장을 꺼내 리스트를 작성하는 일, 그것은 남은 인생을 다시 출발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학교급식 ‘잔식’은 배식하지 않고 남은 음식이다.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급식을 실시하고 있다. 음식이 모자라지 않도록 넉넉하게 준비하기 때문에 항상 밥과 국, 반찬 등은 남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잔식들은 음식물 쓰레기 통으로 들어간다. ‘학교급식지침’에 의해 폐기처리 되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급식 인원이 급격히 변동하면서 잔식이 그대로 버려지는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 푸드뱅크·사회복지시설 등에 기부해 나눔을 확산하고 음식물쓰레기 처리비용을 줄이는 지방정부들이 나타나고 있다. 경기·서울·세종·충남 등의 지역에서는 잔식 기부를 지원·장려하는 조례를 제정·공포했다. 학교 역시 운영위원회 심의 및 협약 체결을 통해 기부를 진행하고 있다.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잔식 기부에 가장 적극적으로 앞장서는 지역 가운데 한곳은 수원특례시다. 시는 학교 측과 협의해 남은 학교급식을 지역 내 취약계층에게 지원하고 있다. 지난 해 8월 시는 수원교육지원청, 수원지속가능발전협의회, 수원시자원봉사센터, 8개 초중고등학교, 광교종합사회복지관·우만종합사회복지관과 ‘수원시 학교급식 잔식 기부사업’ 협약을 체결했다. 이어 학교급식 잔식 기부 시범사업을 추진했다. “급식에서 남은 음식을 먹거리 취약계층에 지원해 돌봄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식량자원을 순환”하자는 수원시의 취지에 많은 학교와 지역사회가 뜻을 함께 했다. 지난해 시범사업에는 매산·매원초등학교, 곡반·수성·망포·영복여중학교, 이의·호매실고등학교 등 8개 학교가 참여했다. 그리고 9월 2일부터 12월 12일까지 운영된 시범기간 동안 28차례에 걸쳐 밥·국·반찬 등 1만 2247팩과 후식 1600개를 취약계층 1756명에게 전달했다. 9개 봉사단체의 자원봉사자 268명(연인원)이 반찬 전달 봉사에 참여했다. 각자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수원시는 학교·기관 간 연계를 지원했고, 수원교육지원청은 ▲참여 학교 모집 ▲사업 홍보 ▲기부 관련 자료 취합 등을 담당했다. 수원지속가능발전협의회는 잔식 수집·운반, 전용 용기 등을 지원했고, 광교·우만종합사회복지관은 취약계층을 모집해 기부 받은 잔식을 배분했다. 수원시자원봉사센터는 사업을 지원할 자원봉사자(단체)를 모집했다. 잔식 기부로 인한 효과는 취약계층에게로만 간 것이 아니었다. 잔식을 기부함으로써 학교는 음식물쓰레기를 줄였고, 이에 따라 잔반 처리비용도 절감했다. 여기에 더해 음식물쓰레기가 감축됐기 때문에 탄소배출량 709CO₂eq/kg을 줄이는 효과도 얻었고 한다. 일석다조(一石多鳥)'의 효과를 얻고 있는 것이다. 이에 시는 올해 수원시 학교급식 잔식 기부사업’에 다솔·당수초등학교, 권선중학교, 망포·매향여자정보·조원·천천·한봄고등학교 등이 새로 참여, 16개로 늘린다고 발표 했다. 수요처도 기존 광교·우만종합사회복지관에서 서호·수원·우만·청솔·수원YWCA·효경의손길 등 6개 재가노인지원서비스센터가 참여 8개 기관으로 증가했다. 19일엔 신규 참여기관과 업무협약도 체결했다. 시 관계자는 “앞으로 학교는 학교급식 잔식 기부에 협력하고, 재가노인지원서비스센터는 학교급식 잔식을 기부 받아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고 밝혔다. 올해 운영기간은 3월 24일부터 12월까지 주 2회(화·목요일) 사업을 운영한다. 물론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는 방학기간은 제외된다. 거동이 불편한 홀몸 노인들에게는 식사배달 서비스도 할 계획이다. ‘학교급식 잔식 기부 시범사업’이 2025년 하반기 수원시 적극행정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상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학교급식 잔식 기부사업은 먹거리의 소중한 가치를 공동체 안에서 의미 있게 실현하는 순환과 나눔의 본보기”라는 잔식 기부사업 관계자의 말에 동의한다. 지속가능한 선순환 모델로 발전시켜 나갈 만 한 사업이다. 수원시의 학교급식 잔식 기부 사례가 전국 지방정부와 모든 학교로 확산되면 좋겠다.
얼마 전 ‘지방소멸 전문가’랍시고 ‘경북연구원 생활인구센터’ 현판식에 초대받았다. 행사는 오후 4시로 잡혀 있었기에 아침 일찍 출발해 예천 회룡포 마을을 둘러보았다. 육지의 작은 섬으로 참 아름다웠다. 은빛 백사장, 강물 위 뽕뽕 뚫린 뿅뿅다리. 산을 배경으로 한 작은 호수들. 마을 여인이 모는 빨간 스포츠카. 밭 가는 농부들의 목소리. 이색적인 정취에 젖어 이곳저곳을 거니는 데 한 여행객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정자만 가득해. 여기도 정자, 저기도 정자. 어디를 가도 정자 투성이야!” 그 말을 듣고 보니 역시 그러했다. 여느 지자체처럼 회룡포 마을도 문제가 있어 보였다. 인구감소시대, 지자체들은 마을 살리기에 고군분투라지만 정부 보조금으로 덕지덕지 건물만 세운다. 회룡포의 정자들 역시 닮은꼴이다. 영혼이 없다. 어디 그뿐인가? 아이디어를 짜내기보다 카피만 하니 전국의 봄 축제, 가을 축제가 거의 똑같다. 여기도 핑크뮬러, 저기도 핑크뮬러.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짜내야 한다. 이는 뼈를 깎는 품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창적인 개발을 해야지 그렇지 않다면 인구 유인은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핀란드의 피스카스(Fiskars)는 우리에게 상당한 울림을 준다. 피스카스, 한 번쯤 들어 본 이들이 있을 것이다. 유명한 주황색 손잡이가 달린 피스카스 가위의 산지이기 때문이다. 이 마을은 헬싱키에서 남서쪽으로 100km 지점에 위치한다. 참나무, 단풍나무, 자작나무가 늘어선 구불구불한 강변에 오래된 방앗간과 벽돌 대장간은 동화 속 마을을 연상시킨다. 17세기 초부터 약 3세기간 이곳은 핀란드의 금속 가공 단지였다. 하지만 공장 부지가 협소해지자 회사들은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동네는 곧 침체되었고 그대로 가면 죽은 마을이 될 게 뻔했다. 이를 심히 걱정한 피스카스의 부사장 잉마르 린드베리는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해 냈다. 공실인 피스카스 제철소를 예술가 공동체이자 문화 관광지로 탈바꿈시켜 시내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임대하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대성공을 거두었고, 600여 명의 예술가와 디자이너를 유치할 수 있었다. 그들은 최고급 가구, 보석, 유리 제품, 미술품, 조각품, 직물 등을 생산하고 있다. 이제 피스카스는 ‘핀란드의 그리니치빌리지’로 예술가, 상인, 관광객들이 어우러져 활기 넘친다. 피스카스의 매력은 빌라, 옛 공장, 곡물 창고 등 오래된 건물들에서 비롯된다. 이 건물들 중 일부는 상점이나 카페로 복원되었다. 카페에서는 수제 음식과 지역 맥주 및 사이다를 판매하며, 전시회와 라이브 음악을 공연한다. 다른 일부는 고전적인 건축 양식과 현대적인 편의 시설을 결합한 호텔로 개조되었다. 대표적으로 테겔 호텔은 현대적인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의 객실을 비치하고 있다. 호수와 숲으로 둘러싸인 이 건물들은 산책과 휴식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피스카스의 부활은 이처럼 창조적인 아이디어 덕분에 가능했다. 우리 지자체들도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 수 있어야 한다. 인구 선순환 구조는 너도나도 베끼는 계절 축제로는 이뤄낼 수 없다. 더욱이 축제는 소비재에 그치지 않던가! 고유 상품 개발로 일자리 창출에 매진할 때 공동체는 부활할 수 있다.
인류가 겪는 대재난은 어떻게 나에게 전달되고 수용되는가. 매체의 발달로 자연 재앙이든 인위적 재난이든 우리는 그 현상 현실을 빠르고 여실하게 전달받는다. 재난을 어떤 언어(매체)를 통해서 전달·수용 받고 의미화하는지에 따라, 재난을 이성적·감성적으로 처리하고 소비하는 양태에 차이가 있는 듯하다. 러·우 전쟁이나, 미국·이란 전쟁의 내용을 다루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전쟁이야말로 인위적 재난의 앞순위에 놓이지 않는가. 2001년 9월 11일 아침, 알카에다 테러범들이 납치한 여객기를 빌딩에 충돌시키는 자살 공격으로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 빌딩은 폭발했다. 사망 2996명, 부상 2만 5000명의 피해 장면을 영상으로 보면서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후 사람들은 이 영상 장면으로 수없이 빠져들어 갔다. 그것은 안타까움과 분노를 공유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놀라움[驚異]에 대한 목격 욕구도 작동하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은 2011년 3월 11일 오후 일본 동북해안에서 대 쓰나미 재앙을 겪을 때도 나타난다. 40m 높이의 쓰나미가 밀려닥치고 2만 명의 사망·실종자를 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쓰나미에 파묻히는 영상은 지옥도 그 자체였다. 이 영상 또한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이런저런 심리 기제 하에서 오래도록 소비된 측면이 있다. 재난을 전하는 전통적인 언어는 문자 언어나 구두언어였다. 구두언어는 전달의 범위가 제한되고, 공신력이 떨어진다. 반면 문자 언어는 근대 이후 신문 매체에 등장하여 그 기록성과 공신력을 바탕으로 지구적 대재난을 인류가 공동으로 감지하고 서로 공유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영상 언어가 빠른 속도로 진화하면서 지구촌의 대재난은 거의 실시간으로 그 재난 현실 현상의 여실함을 보여주는 영상 언어가 지배하게 되었다. 문자 언어로 대표되는 재난의 언어는 재난에 대한 메타 진술을 응축성 있게 나타내는 장점이 있다. 재난에 대한 메타 진술은 재난의 본질을 이해하고, 재난의 총체적 의미를 설명하고 그 영향을 예측하게 하는 데에 필요하고 유리하다. 그런데 세태는 변했다. 이보다 더 수용자들에게 어필하는 것은 재난을 현상으로 증언하는 영상이다. 요즘의 대중 수용자들은 재난 현장의 여실한 모습을 직접 보기를 압도적으로 선호한다. 매체 차원에서는 영상도 언어의 일종이다. 영상 언어라는 말이 이를 입증한다. 재난 소식을 받아들이는 평균적 대중은 언어적 설명이나 언어적 분석보다는 재난의 실상 모습을 먼저 목격하고 싶어 한다. 재난이 인간과 세계의 존재론 차원에서 대단히 심오한 철학적 이슈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재난이 인류의 공존 차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류학적 문제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재난은 인문학적 성찰의 주제이다. 결코 감정적 소비의 콘텐츠로만 지나칠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재난을 눈요기처럼 소비하는 풍조는 위태롭다. 재난은 궁극으로는 문학의 이슈로, 철학의 고뇌로, 공동체의 미래 의식으로 숙고 되어야 한다. 인문학적 고뇌가 당장의 해법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다. 재난 현실 앞에서 무력해 보이는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재난의 언어를 인문의 가치로 살려내고 심화하는 일은 재난과 인간의 문제를 진지하게 파고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대전 대덕구 문평동 한 자동차부품 제조 공장에서 무려 74명이나 숨지고 다치는 인명피해를 내는 대형화재 참사가 발생해 국민의 가슴을 에게 하고 있다. 경기도에서도 의정부 섬유공장과 안성 원곡면 창고 등에서 잇따라 화재가 발생하는 등 봄철 건조기 화재 경보음이 울리고 있다. 초대형 화재가 아니었긴 해도 산불이 가장 많이 발생한 기록이 있는 지역도 경기도다. 화재 발생을 미리 방지할 수 있는 대책들이 적극적으로 강구돼야 할 시점이다. 지난 20일 오후 대전 대덕구 문평동 한 자동차부품 제조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는 사망 14명, 중상 25명, 경상 35명 등 부상자 60명을 포함해 모두 74명이 죽고 다치는 끔찍한 비극으로 귀결됐다. 화재는 공장 내부 절삭유와 기름때, 임의로 마련한 ‘2층 복층’ 구조 등 여러 요소가 작용해 급속히 확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밀 조사 결과가 나와 봐야 정확한 전말이 밝혀지겠지만 또다시 조금만 잘했으면 방지할 수 있었던 비극으로 판명될 개연성이 높다. 같은 날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 용현산업단지 내 한 섬유공장에서도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건물 2층에서 시작돼 건물 상당 부분을 태웠고, 인근 공장으로까지 불길이 번지기도 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해당 섬유공장 건물은 대부분 소실됐다. 이에 앞서 19일에는 안성시 원곡면 반제리의 한 주택 뒤편 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창고 내 화목보일러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주택에 있던 거주자 2명은 모두 대피하여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지난 21일 경기 여주시 현암동의 한 2층짜리 상가건물에서는 가스 폭발에 따른 화재가 발생했다. 1층에 식당과 미용실, 2층에 키즈카페 등이 입점해 있는 연면적 653㎡ 규모의 철골조 건물에는 당시 모두 31명이 있었으나 모두 스스로 대피해 무사했다. 해마다 해빙기 봄철 건조한 날씨가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끔찍한 화재 소식을 접하게 된다. 크고 작은 화재는 영락없이 사람의 안전의식 해이와 불법 부실 시설로 인한 인재(人災)의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다. 안전사고 중에도 화재만큼 국민의 안전의식 결핍이 문제의 소지로 파악되는 재해는 없다. 그야말로 ‘자나 깨나’ 조심하고 ‘꺼진 불도 다시 보는’ 지혜가 발휘돼야 할 재해가 화재인 셈이다. 지난해 3월 22일 의성에서 발생한 초대형 산불은 잠깐의 부주의가 얼마나 큰 피해로 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끔찍한 재해였다. 때마침 불어닥친 강풍으로 인해 산불은 경북도 내 5개 시·군을 휩쓸면서 산림 9만9417㏊를 태웠고, 183명의 인명피해와 5499명의 이재민을 낳아 역대 산불 피해 규모 1위를 기록했다. 경기도에서 발생하는 산불이 전국 시·도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를 점한다는 통계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2015년부터 2024년까지 도내에서 발생한 산불은 총 2673건이었다. 이 같은 발생 건수는 같은 기간 전국 산불 발생의 약 22%를 차지해 경기도의 산림 면적이 전국의 약 8%(51만2천㏊)에 불과한 측면을 감안하면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강풍 등 악재와 겹친다면 참으로 엄청난 재앙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경기도는 유난히 물류창고 대형화재 사고, 지난해 배터리회사 아리셀 화재 등 대형화재 참사의 아픈 기억이 많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는 지난 17일 양평군 일원에서 민간 전문기관·공공기관과 함께 ‘산림 인접 주거 취약 시설 화재안전망 구축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등 봄철 산불 예방 활동 강화에 나서고 있다. 화재 재해를 방지하는 소방 안전은 소방 당국의 노력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지자체의 적극적인 안전의식 고취를 위한 홍보활동과 민간 차원의 예방 활동, 대피 훈련 등이 체계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올봄만큼은 경기도에서 대형화재 참사 뉴스가 터져 나오지 않기를 희망한다. 취약지역을 중심으로 민관이 합심하여 ‘다시 보고 거듭 살펴보는’ 경각심을 발휘할 때다.
얼음 베개를 베고 자려느냐 완전 벗은 몸으로 거리에 서서 겨울을 입고 밤 지새는 겨울나무가 되려 하느냐 사납게 휘두르며 달겨드는 혹한에 맨살을 맡겨 마구 쳐라 해라 내 남루한 의지를 기꺼이 던져 놓으리니 허공을 헤치듯 갈겨 오는 저 하늘의 회초리 그래 나 여기 있느니 빗나가지 마라 - ‘다시 겨울이다’ 부분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신달자 선생의 시 ‘다시 겨울이다’의 두 연 중 첫째 연이다. 겨울이라는 계절을 통해 삶의 순환과 노년의 시간, 그리고 엄혹한 순간을 견디는 의지와 그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담은 시다. 이 한 부분만으로도 선생의 시가 가진 섬세하고 치열한 감성, 그 곤고한 심정적 곡절들을 균형성 있게 감당하는 내면 세계를 유추할 수 있다. 시와 에세이, 그리고 소설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문학은 여성적 감수성과 자아 성찰, 삶의 고난과 죽음의 절대성에 대한 사유(思惟), 이를 표현하는 맑고 선명하고 절제된 언어로 충일하다. 문필가로서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사랑과 인생에 대한 수발(秀拔)한 통찰을 담고 있어, 사뭇 친숙하게 독자들과 만난다. 지난해 연말, 12월 4일의 일이다. 경남 거창군 남하면에서, 이 고장 출신의 문인 신달자 선생의 문학을 기리고 이를 널리 공유하기 위해 건립된 신달자문학관 개관식이 있었다. 현존 여성 시인 가운데 그 자신의 이름을 표찰로 건 문학관은 초유의 일이다. 이날 행사에는 150여 명의 문학계 인사와 지역 인사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필자 또한 한국문학관협회 회장 자격으로 자리에 있었고, 흔연한 마음으로 축사를 했다. 전시 공간, 강의실, 북카페, 수장고, 기획전시실이 훌륭했다. 거창군은 앞으로 이 문학관에서 지역 문인 창작 및 낭송 프로그램, 주민 대상 문학 강좌와 글쓰기 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그런가 하면 신달자 선생은 지난해 6월 19일, 필자가 촌장으로 있는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의 문학교실에서 ‘인생에는 쓴맛은 없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선생은 인생에서 겪는 고통과 상처를 ‘쓴맛’으로 표현하면서도, 그것을 감당하고 시간이 지나면 성숙과 깊이를 만들어주는 자양분이 된다고 말했다. 더불어 시는 ‘잘 쓰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진실하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여성 시인으로서의 삶과 문학에 대해 진솔하게 토로하면서, 고통도 결국은 삶의 자산이라고 결론지었다. 삶과 문학의 핵심을 관통하는 문학적 대가의 논리였다. 선생은 지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서, 문학에 있어 국가 원로의 지위에 있다. 필자는 젊은 대학교수 시절,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김재홍·김종철 등 선배 문인들과 함께 선생을 자주 뵈었다. 언제나 활력에 차 있고 유머와 위트에 넘치던 선생이, 삶의 여러 어려움을 견디고 있었음을 그때는 몰랐다. 그러므로 선생은 참된 문학의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 남모르는 질곡을 통과하는 사람들, 특히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야 하는 여성 문인들에게는 하나의 귀감이요, 나침반이요 청신호다. 선생과 함께 한 지난날들이 귀하고 소중한 만큼, 남아 있는 날들에도 아름답고 좋은 마음의 후진으로 그 곁에 남아 있으려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1950년대. 미국의 과학자들 사이에는 공통된 두려움이 흐르고 있었다. ‘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의 저자 새뮤얼 W. 프랭클린은 전후 심리학자들이 마주했던 고민의 흔적을 추적한다. 전쟁은 과학기술이 어떻게 반인권적 살상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지 처절히 보여주었고, 과학자들은 그들의 연구가 또다시 전체주의와 독재정권을 위해 쓰이지 않을지 극도로 경계했다. 과학자들에게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했다. 당대 심리학자들은 사회의 발전 동력이 국가가 아닌 개인에게 있으며,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진보를 일굴 수 있는 능력이 내재해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과학자들은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특정 인종이나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전체주의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창의성 연구는 그 고뇌의 결과였다. 심리학자들은 창의성이 교육과 훈련을 통해 누구나 계발할 수 있다고 찬양했다. 창의성은 자유롭고 자율적인 개인에 의한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미국적인 개념이자 국가적 방어 기제였다. 창의성에 대한 예찬은 산업계로까지 확장되었다. 혁신적인 기업은 창의적 인재를 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광고 업계는 영감과 신선함이 넘치는 예술적 집단으로 탈바꿈했다. 소비 행위조차 기존의 소비문화에 매몰된 ‘대중’의 선택이 아니라, 창의적 개인의 개성적 표현으로 그려졌다. 혁신은 창의적 개인에 의해 가능했다. 개인은 얽매임 없이 자유로워야 했고, 새로운 시도는 장려되었다. 이러한 서사의 정점에는 실리콘밸리가 있었다. 실리콘밸리는 엔지니어를 구속하는 모든 관습을 타파하려 했다. 근무 방식은 자율적이었고, 직원의 창의성을 높일 수 있는 경영 방식이 활발히 논의되었으며, 참신한 아이디어를 가진 전 세계 인재들을 끌어당겼다. 창의성은 당대 국가와 과학기술의 관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였다. 과학자들은 개인을 강조함으로써 과학기술이 국가의 쓸모에 종속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인가. 한때 창의성을 예찬했던 미국의 과학기술 생태계에 최근 새로운 국가주의 담론이 무섭게 파고들고 있다. 팔란티어의 공동 창업자인 알렉스 C. 카프와 최고 업무 책임자인 니콜라스 W. 자미스카는 저서 ‘기술공화국 선언’에서 실리콘밸리가 공동체적 가치를 잊어버렸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미국과 체제 경쟁 중인 ‘적국’들이 국가 안보를 위해 과학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동안 미국은 고작 소비자를 위한 안락한 서비스를 만드는 데 급급하다며 한탄한다. 이들은 기술 ‘엘리트’들에게 도덕을 호소한다. 미국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과학기술이 국가의 전략적 목표에 맞게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과학기술 패권을 적국에 빼앗길 것이라는 공포와 함께 인공지능 방산 기업의 대표주자 팔란티어를 위한 ‘도덕적’ 서사가 완성된다. 팔란티어가 미국의 이란 공습에 깊숙이 관여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카프가 주장하는 도덕의 실체는 미국의 존속이며, 이는 곧 군사기술 분야에서의 압도적인 우위와 동의어다. 2020년대의 과학기술은 1950년대 과학기술이 그토록 경계했던 지점, 즉 과학기술이 국가적 목적 아래 도구화되는 지점으로 다시금 회귀하고 있는 듯 보인다. 전후 과학자들이 품었던 두려움은 이제 국가를 위한 혁신이라는 깃발 아래 우리 눈앞에 당도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가 6·3 지방선거에 적용할 선거구 획정 등을 4월 16일까지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하겠다고 21일 밝혔다. 송기헌 정개특위 위원장은 “시일이 촉박한 만큼 심사에 속도를 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정개특위는 1월 13일 첫 회의를 열었지만, 그동안 공전을 이어갔다. 이날 정개특위는 진보 4당이 요구하는 3~5인 중대선거구제 확대, 비례대표 정수 확대, 통합특별시의회 중대선거구제 도입 등과 관련한 법안도 함께 상정했다. 국회의 ‘직무 유기’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제9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일인 6·3지방선거가 70여 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선거구획정안을 내놓지 않아 소수당 및 예비후보들은 냉가슴만 앓고 있다. 공직선거법상 선거구 획정은 선거일로부터 180일 전인 작년 12월 5일까지 이뤄져야 했다. 정개특위는 여야 간 이견차로 실질적 논의를 못했다. 통상 선거구 획정은 국회에서 광역의원 선거구에 대한 안이 정해지면, 이를 기반으로 지역별 선거구획정위원회가 가동돼 기초의원 선거구를 정하게 된다. 그러나 제때 이뤄지지 않이 폐해가 일파만파다. 경기도의 경우 정당별로 수백 명에 달하는 광역·기초의원 후보들을 검증해야 하지만, 선거구 변동을 우려해 이 같은 절차는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경기도는 신도시 개발 사업이 곳곳에서 이뤄지면서 인구 변화의 폭이 크고, 도농 복합 지역으로 인구 소멸 지역도 포함하고 있어 선거구 조정이 불가피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각 정당에서는 종전 선거구에 맞춰 후보자 신청 등을 받고 있긴 하지만, 기초단체장 면접 등의 실무 절차는 계획조차 세우지 못한 채 발만 구르는 중이다. 선거구 획정과 관련해 22대 국회 정개특위 출발점은 분명하다. ‘인구 5만 미만 자치구·시·군 최소 1석, 5만 이상 최소 2석’ 규정과 ‘각 시·도의 평균 인구 대비 상하 50% 편차 기준’을 동시에 맞추는 것이다. 선거구 간 인구 편차의 헌법 기준 준수로 농·산·어촌의 지역구 축소와 도시 지역구 확대의 선거구 재배분, 소선거구냐 중대선거구냐 또는 비례대표제 확대냐 등의 선거구제가 쟁점이다. 2018년 헌법재판소는 지방선거의 인구 편차 기준을 4:1에서 3:1로 낮췄고 ‘자치단체별 최소 1인 보장’을 이유로 인구 편차 기준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인구 편차의 국제 기준은 더 엄격하다. ‘선거구 인구는 가능한 한 같게 하고 허용 편차는 ±10%를 넘기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며 특수한 경우에도 15%를 넘지 않도록 하라’는 게 기본 원칙이다. ‘1인 1표(one man + one vote)와 1표 가치의 평등(one vote + one value)’의 실현이다. 여하튼 정개특위 활동이 늦어지면서 기존 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에 비해 새 후보자와 입지자는 선거구도 모른 채 활동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에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이전 지방선거보다 공천 시계를 최대한 앞당겨 선거에 전력하겠다는 내부 방침을 세웠지만, 선거구 획정이 이뤄지지 않은 탓에 광역 및 기초의원 후보자 선정은 뒤로 미루고 경기도지사와 기초단체장에 대한 절차만 우선 진행한다는 내부 방침을 세웠다. 이는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공천관리위원회가 꾸려지고 후보자 신청을 받은 후부터 속도전을 펼치면서 최대한 빠르게 관련 절차를 진행하기로 한 국힘 역시 광역 및 기초의원에 대한 절차는 선거구 획정으로 인해 언제 이뤄질지 예상할 수 없는 상태다. 아무튼 선거구 획정 지연은 매 선거마다 반복되는 고질적인 문제다. 무엇보다 거대정당 간 이해관계에 따른 협상 지연이 가장 큰 원인이기에 당리당략이 아닌 선진정치 구현 차원에서 노력해야 한다. 선거구 획정이 지연되면 후보자들의 공약 준비와 선거 전략 수립에 차질이 생길 뿐더러, 유권자들의 알 권리와 선거권도 침해하게 된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선거구 획정을 빠르게 마무리해 후보자들과 유권자들의 혼란을 잠재우길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