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지역균형 발전 사업 평가 위원으로 경기 북부 ‘삼천(동두천, 포천, 연천)’을 방문하였다. 프리미티브한 대자연이 펼쳐진 이곳에 발을 디디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손상되지 않은 자연, 신선한 공기, 풍부한 먹거리, 사람이 살기에 이 보다 좋은 곳은 없으리라. 한 가지 흠이 있다면 큰 병원과 문화시설이 빈약하다는 것. 이 점만 잘 보완하면 ‘삼천’은 지상낙원이라 할 수 있다. 부족한 의료 시설은 원격 진료센터를 설치하여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서구에서는 저밀도 지역의 부족한 의료시설을 원격 진료센터 설치로 보완 중이다. 프랑스는 2001년부터 이 방식을 추진해 왔지만 사회적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2018년 오메디스(Omedys)라는 회사가 설립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두 전직 응급의학과 의사가 원격 상담 전용 진료실 두 곳을 오픈한 것이다. 금상첨화로 이해 9월부터 원격 진료가 의료보험의 적용을 받게 되고 코로나 19가 확산되면서 바야흐로 원격 의료의 시대가 시작됐다. 원격 의료는 병원 응급실의 부담을 덜어주고 특히 시골, 교외 등 의료 인력이 부족한 지역에서 의사와 쉽게 접촉할 수 있는 접근성을 높여 준다. 또한 환자와 의사의 진료 시간을 재창조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를 통해 프랑스의 동부 샹파뉴 아르덴과 같은 의료 사막지역은 원격 상담실 수를 대폭 늘리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인구 대비 의사 밀도가 전국 평균보다 30% 낮은 지역을 의료 사막으로 간주한다. 현재 아르덴 지역에서는 보건소, 약국, 양로원, 이주민 접수 센터, 장애인 시설 등에 약 100여 개의 원격 상담실을 설치하고 있다. 한국 역시 의료 자원의 지역적 분포는 도시와 지방 간의 심각한 불평등을 야기한다. 좋은 의료 인프라와 우수한 의사는 수도권에 모두 집중되어 있다. 그 결과, 농촌 지역은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의료 사막화 현상이 일어난다. 이에 대처할 방법은 원격 진료의 활성화가 아닐까? 원격 상담 또는 원격 진료는 환자나 의료 전문가가 이동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의사가 특정 지역에 없거나 환자가 이동하기 어려운 경우에 특히 유용하다. 인터넷 연결, 마이크, 스피커, 웹캠이 장착된 컴퓨터, 디지털 태블릿 또는 스마트폰을 이용해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 의사는 환자가 제공하는 시각적 정보와 세부 정보를 통해 진단을 내리고 치료 과정을 계획할 수 있다. 원격 전문 의료의 진단 또는 치료 전략은 최소 두 명의 의사 간의 교환으로 가능하다. 이러한 형태의 원격 진료는 심장학, 산부인과, 피부과의 1차 진료 또는 응급 진료에 적합하다. 데이터(심전도, 초음파 스캔, 피부 병변 사진 등)는 전문의에게 전송되어 동료가 적절한 치료를 진단하고 실행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처럼 원격 의료는 의사 부족과 농촌 인구의 지리적 고립이라는 문제에 대응하여 하나의 해결책으로 아주 좋다. 또한 의사들의 근무 환경을 개선하여 집에 머물면서 대도시 외곽에서 진료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다만 유념할 사항이 있다.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듯이 원격 의료를 지나치게 남용하고 사업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원격 진료에는 분명 한계가 따르고, 또한 원격 의료는 비즈니스가 아닌 윤리가 핵심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바야흐로 인공지능(AI) 시대다. 모든 화두의 중심에는 AI가 있다. AI가 아닌 그 무엇을 놓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여유조차 쉽지 않다. 쏟아지는 새로운 개념, 기술, 서비스 등을 쫓아가려 하지만 변화의 방향이나 크기는 가늠조차 어렵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부문에 미칠 영향에 대한 전문가 전망이 며칠 사이 겸연쩍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최근 언급이 잦은 소버린(sovereign) AI는 한동안 우리 AI 산업 전반의 가늠자가 될 것이 분명하다. 네이버에 따르면 “소버린 AI는 각 국가가 자체 데이터와 인프라를 활용해 그 국가나 지역의 제도, 문화, 역사, 가치관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AI”다. 이를 판단하는 합리적 기준은 “기술적 자립 여부보다는 해당 국가가 사용하는 AI에 자국의 가치관과 윤리, 문화적 특성이 충분히 반영되었는지, 그리고 해당 국가의 이익과 존속을 지켜낼 수 있는지”다. 잘 알려진 것처럼 현재 AI 분야의 세계 패권은 미국과 중국이 가지고 있다. 이들의 AI 시장 점유율, 투자 및 인프라 비율, 특허 비율은 절대적이다. 이들이 어떤 국가, 어떤 언어를 중심으로 데이터 학습을 했는지는 뻔하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이 자신만의 AI 기술을 개발하려는 이유는 산업이나 경제만 국한되지 않는다. 몇 개 국가가 독점하는, 한정되거나 편향된 AI가 가져올 국가 및 문화 정체성 혼란이 우려된다. 급기야 시장은 물론 문화 종속까지 걱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AI 산업에서 자주와 주권의 강조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러한 소버린 AI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뉴스라는 콘텐츠를 다시 보게 만든다. 뉴스는 한 사회의 일기다. 시시각각 일어나는 사회적 의미를 가진 이슈가 정리되고 평가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을 아우르고 장기간에 걸쳐 생산되기에 한 사회의 역사로서 축적된다. 한 이슈에 대해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 각양각색의 시각을 접할 수 있기에 사회적 다양성이 확보된다. 물론 우리 뉴스에 대한 비판과 한계는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 제도, 문화, 역사, 가치관 등을 이해하는 AI 개발을 위한 데이터의 핵심 원천 중 하나는 뉴스 콘텐츠일 수밖에 없다. 뉴스 콘텐츠는 양질의 데이터로서 AI 모델의 학습과 검증에 최적화돼 있다. 단어의 연결과 언어적 맥락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필수다. 특히 신문의 뉴스 콘텐츠는 이미 체계적이고 정제돼 있는 전형적인 정형 데이터다. 그리고 지역신문의 뉴스 콘텐츠는 AI 시대에 자칫 흔들릴 수 있는 해당 지역의 정체성과 문화를 굳건하게 만들 수 있는 근간이 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지역이 모여 우리 사회가 구축된다. 우리나라 소버린 AI 전략에서 지역신문이 빠질 수 없는 이유다. 안타까운 점은 뉴스 저작권을 둘러싼 우리 언론사와 빅테크 기업의 갈등이다. 언론사는 저작권 침해를, 빅테크 기업은 공정 이용(fair use)을 각각 주장한다. 양측이 주장이 첨예해 쉽사리 합의에 도달하기 어렵다. 현재 저작권 전반은 특정 국가에만 한정해 주장하기 어렵기에 해외 사례에 대한 관심이 높다. 뉴스 콘텐츠도 마찬가지다. 해외 판결이나 합의에 양측의 희비가 엇갈린다. 우려스러운 것은 우리 법이나 제도의 맹점을 파고드는 해외 빅테크 기업의 공세다. 법과 제도의 미비는 우리 소버린 AI 전략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을 높일 뿐이다. 이제 우리 언론사와 빅테크 기업이 머리를 맞대 합의를 도출해야 할 때다.
안타깝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은 ‘마약청정국’이 아니다. 마약 범죄가 급증하면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가 됐다. 최근에도 태국에서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25억 원 상당의 마약을 들여온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지난 16일 새벽 인천국제공항으로 필로폰 6㎏과 대마 5.2㎏을 밀반입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윤석열 정부 당시인 2023년 1월엔 말레이시아 국적 피의자들이 필로폰 약 74㎏ 밀수 범행을 저지르다가 검거됐다. 그런데 대통령실과 경찰·관세청 고위 간부 등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수사에 외압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이에 대검찰청은 지난 10일 경찰, 국세청, 금융정보분석원과 이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합동수사팀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대검찰청이 펴낸 2023년 마약류 범죄백서에 따르면, 2022년 마약류 사범 검거 인원은 1만 8395명이었는데 2023년엔 2만 7611명으로 급증했다. 특히 젊은 층에서 마약 범죄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20∼30대가 전체의 50% 이상이다. 청소년들의 마약 범죄도 심각하다. 10대 마약류사범은 2021년 450명에서 2023년 1477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무려 3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이처럼 청소년·청년층에서 마약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SNS 등을 통해 유통이 쉬워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아울러 전자담배 형태의 마약류가 증가한 것도 마약확산의 원인 중의 하나라고 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에 의뢰된 마약류 감정 건수는 6년 사이 약 3배 늘어났는데 이 가운데 눈으로 봐서는 마약임을 눈치 채기 힘든 전자담배 형태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얼마 전 국민들을 경악케 한 마약 범죄가 발생했다. 지난 4월 강릉 옥계항에 입항한 외국 화물선에서 마약의 한 종류인 코카인 1.7톤이 적발됐다. 이는 국내에서 적발된 역대 최대 규모로 5700만 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양이다. 마약 조직이 페루 공해 상에서 화물선에 코카인을 실은 뒤 한국과 일본, 중국 해역에서 이른바 ‘해상 던지기’ 수법으로 밀반입을 시도한 것이다. 지난달 10일에도 마약조직이 선박을 이용, 남미에서 부산항으로 코카인 720kg 밀반입을 시도하다가 적발된 바 있다. 최근 5년 사이 해경에 적발된 해상 밀수만 연평균 600건 이상이란다. 선박을 이용한 해상밀수를 선호하는 이유는 항공기보다 검색이 덜 까다롭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항공편을 이용한 마약 밀반입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경기신문(5월 30일자 7면, ‘로션 둔갑한 마약…밀반입 일당 철창 행’)에 따르면 경찰이 야산에서 마약을 던지기 수법으로 거래한다는 첩보를 입수, 현장에 잠복해 있다가 중 마약을 찾으러 온 중국인 2명을 검거해 필로폰 1kg을 압수했다고 한다. 수사를 통해 국내 판매책(태국 국적)을 검거하고, 보관 중이던 필로폰 300g과 야산에 숨긴 필로폰 3kg을 찾아냈다. 수사가 계속됐고 인천공항으로 입국하려던 밀수책을 체포했다. 일행의 수하물에서는 필로폰 15.6kg가 담긴 바디로션 통 37개가 발견됐다. 이어 태국 마약통제청 등과 공조 수사를 통해 태국 현지에서 마약 7.6kg을 추가로 압수하고 보관자를 체포했다. 경찰은 이들이 태국에서도 마약을 보관하고 있다는 진술을 확보해 현지에 파견된 경찰 협력관을 통해 태국 마약통제청 등과 공조 수사에 착수했다. 이어 태국 현지에서 마약 7.6kg을 추가로 압수하고 이를 보관하던 피의자를 붙잡았다. 압수한 필로폰은 총 27.5kg(110억 원 상당)인데 91만 7000여 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한다. 관계 당국은 전담 인력 등을 투입해 마약 밀반입 차단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마약 조직의 밀수 수법 역시 점점 더 진화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의 말처럼 “마약류 밀반입 수법에 대한 첩보 수집 활동을 강화하고 철저한 수사를 통해 마약 공급 차단에 총력 대응”해야 한다. 점점 교묘해지는 마약범죄는 보다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이재명 정부는 마약 사범에 대한 처벌을 더 강화하라. 아울러 치료와 재활을 병행할 수 있는 정책적 지원 역시 마련하기 바란다.
‘막말’이란 말의 의미 정체(正體)는 무엇일까. ‘막’이란 접두어는 ‘함부로 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 ‘막가파’, ‘막가자는 거냐?’, ‘막되어 먹은 놈’ 등의 ‘막’이 바로 그것이다. ‘막’에는 ‘거칠다’라는 뜻도 있다. 막걸리는 ‘막’(거칠게)과 ‘거르다’가 합성된 말로, ‘거칠게 걸러낸 술’이라는 뜻이다. 막말은 함부로 거칠게 해 대는 말이다. 나쁜 말, 맞다. 또 ‘막’은 ‘밑바닥’, ‘낮은’ 등의 뜻도 있다. ‘막장 인생’이 ‘밑바닥 인생’으로, ‘막노동’이 ‘별다른 기술 없이 몸으로 감당하는 밑바닥 등급의 노동’으로 통하는 데서, ‘막도장’이란 말이 ‘임시변통의 상황에서 아무렇게나 만든 값싼 도장’이었던 데서, 막말의 숨은 의미소를 볼 수 있다. 막말은 말의 품격으로서는 밑바닥 수준의 말이다. 나쁜 말, 맞다. ‘막’은 ‘끝’, ‘마지막’ 등의 뜻도 있다. ‘막차’란 말이 ‘마지막 차’를 일컫는 데서, ‘막내’가 ‘맨끝의 자식’을 뜻하는 데서, ‘막판’이 ‘마지막 판’임을 나타내는 데서, ‘막다른 길’이 ‘길이 끝나는 곳’임을 뜻하는 데서 ‘막’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막’에는 심리적으로 ‘마지막 의식’이 숨어 있다. ‘마지막 의식’이란 무엇이겠는가. 역사와 인간에 대한 특별한 성찰이 있는 사람에게는 마지막 의식이 비장한 가치로 승화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내일이 없다는 의식, 즉 허무나 퇴폐의 감정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막말은 심리적으로 마지막의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까짓것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심정으로 내지르는 말이다. 마지막이니, 지금 이후라는 것을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럴 때의 막말이란 어떤 극언도 주저할 이유가 없다. 중요한 것은 허무와 분노와 좌절감이 막말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그 반대의 생테도 엄연히 존재하고 작동한다는 점이다. 즉 별생각 없이 막말 쓰는 습관을 쌓아 나가다 보면, 나의 심리적 지향에 허무와 분노, 불만과 좌절, 원망과 저주 등의 악령이 들어어 살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급전직하(急轉直下) 추락하여 신음하고 있는 나의 불쌍한 자존감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점이야말로 우리의 가정·사회 교육이 유념해야 하는 대목이다. 언어에는 마성(魔性)이 있다. 언어는 자신을 사용하는 주체(인간)의 의식을 잠식하듯 지배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막말은 이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어쩔 수 없이 막말을 듣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대화적 양심으로 거르지 않고 내지르는, 감정의 해방구가 된 SNS 공간이 널려있기 때문이다. 그런 SNS의 생태가 나의 일상 언어 영역으로 세차게 들어왔다. 아니, 그런 SNS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생태를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막말이 일상적 언어생태가 되어 버렸다. SNS 생태에서의 막말 현상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현실의 언어문화로 옮겨 오게 마련이다. 자기 욕망의 좌절을 남 탓으로 몰아가려는 심리가 막말을 전방위로 투사한다. 어떤 SNS에서 내 나름대로 합리적인 답글을 올려놓았는데, 누군가 무작정 나를 망가뜨리는 막말 댓글로 자기감정을 배설한다. 나는 내 답글을 조용히 내린다. 세상은 막말을 그냥 자극적으로 소비하며 즐기는 듯하다. 자극성 강한, 돌직구 막말들에 감정적 후련함을 따라가는 사이, 그 후련함의 몇 배쯤 되는 해독을 너나없이 모두 나누어 가지고 사는 세상 아닌지 모르겠다.
냉장고 속에서 사과 몇 개가 나왔다. 단단했던 사과는 쭈글쭈글 말라가고 있었다. 이렇게 될 때까지 잊고 있던 내가 한심했다. 맛보다도 붉은 빛깔을 잃어버린 것이 더 속상했다. 과일만큼 예쁜 식물이 있을까. 꽃과는 다른 차원의 얘기다. 나는 과일을 무척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과일가게 앞을 지날 때는 발걸음이 저절로 멈춰진다. 그 앞에서 과일을 구경하는 일은 소소한 행복감을 준다. 요즘에는 과일가게라고 부를만한 곳이 많지 않아서 예전처럼 그런 행복을 누리지는 못한다. 대형마트에 자리를 내 준 과일코너에서는 그런 기분이 느껴지지 않는다. 과일 앞에서는 침샘이 폭발한다. 봄이면 깨알 같은 씨앗이 톡톡 박힌 귀여운 딸기는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단내를 풍긴다. 무더운 여름의 푸른 수박과 노란 참외가 가득한 과일가게는 대지의 건강함을 한껏 보여주는 장소 같다. 철마다 다른 과일들이 진열되어 있는 과일가게 앞에서는 그것들을 지나간 햇살과 바람과 비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사람을 생각한다. 더위와 갈증을 풀어주는 한여름의 수박 같은 사람, 빼곡한 이야기를 알알이 매달고 있는 포도송이 같은 사람, 한 입 베어 물면 새콤한 과즙이 가득 고이는 여름 끝물의 풋사과 같은 사람을. 단단한 사람, 무른 사람, 속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 사람, 덤덤하지만 늘 그대로인 사람을. 과일을 좋아하지만 복숭아는 내가 먹지 못하는 과일이다. 털 알레르기 때문이다. 예민한 피부를 가진 탓에 살짝 닿기만 해도 종일 따끔거린다. 보송보송한 털이 감싸고 있는 분홍빛 복숭아는 언젠가는 극복하고 싶은 과일이다. 이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니 아름다운 당신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비와 바람을 이기고 탐스럽게 열매 맺은 과일처럼, 우리는 각자의 고난을 이기고 드러난 열매들이다. 그러니 자신만의 시선으로 다른 사람의 빛과 어둠을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고 말 건네주는 사람이면 좋겠다. 과일은 혐오 속에서 자라지 않았다. 바람과 햇살과 태풍을 오롯이 견디고 여물었다. 맛과 모양과 빛깔이 다르지만 과육에 가득 담긴 비타민. 우리는 서로의 삶에 활력을 줄 수 있는 비타민 같은 존재들이다. 과일가게를 지날 때 달콤한 향기를 풍기며 제 색을 보여주는 과일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 지 그 앞에 발걸음을 멈추어 봐도 좋겠다. 오래전 흐릿한 전구 아래 반질반질하게 닦인 사과와 탱글탱글한 귤이 반짝이던 허름한 과일가게가 있었다. 겨울을 따스하게 밝혀주던 그런 옛날이 있었다. “언니는 참 사람을 좋아해.” 오래전 친한 후배가 내게 한 말이다. 나는 정말 사람을 좋아하는가? 사는 동안 내내 혼란스러웠다. 사람은 좋아하는 것에서 상처 입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데 오래 걸렸다. 냉장고 속에서 말라가는 줄도 모르고 방치한 사과를 버리지 않고 다 먹어야겠다. 과일만큼 예쁜 식물이 있을까, 사람만큼 좋은 것이 있을까. 다시, 좋아하는 것에서 행복해지는 법을 알아가는 시간이다. 뜨거운 햇살과 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과일이 달게 익어가고 있다. 사람도 그럴 것이다. 내 삶의 풋내 나는 시간을 다녀간 그대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약 1년 전인 2024년 6월 24일 경기 화성시에 있는 일차전지 업체 아리셀 공장 3동 2층에 쌓여 있던 리튬 배터리 더미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첫 배터리 폭발 이후 동시다발적인 폭발이 발생하면서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이 사고로 23명(내국인 5명, 중국 국적 17명, 라오스 국적 1명)이 사망했고 8명이 다쳤다. 리튬 배터리의 군납 기준을 맞추려는 욕심에 근로자의 안전을 뒷전으로 두면서 불거진 총체적인 인재(人災)라는 것이 경찰의 수사결과였다. ‘군납 기준을 맞추기 위한 검사용 시료 바꿔치기’ ‘타 기관으로부터 받은 시험성적서의 데이터를 조작해 제출’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하루 평균 생산량의 두 배를 목표로 제조 공정을 무리하게 가동했다. 참사가 발생 이틀 전에도 발열전지 1개가 폭발했지만 별도의 조치를 하지 않았다. 숙련되지 않은 일용직 근로자들이 투입됐고, 공장 내 대피로를 제대로 조성하지 않았다. 1년이 지났다. 32명의 사상자가 난 참사였지만 아리셀 대표 등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유지, 유족과 피해자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이에 23일 아리셀산재피해가족협의회와 아리셀중대재해참사대책위는 수원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가족의 분노를 키우고 있다면서 “23명의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박 대표는 보석 허가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반드시 살인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관련기사: 24일자 7면, 아리셀 참사 유가족, ‘적반하장’ 박순관에 울분 토로) 사고 이후 박순관 아리셀 대표는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자신을 ‘단순 투자자’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였다’, ‘저는 경영책임자가 아니다’라고 책임을 회피하며 사고 원인이 사망한 희생자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경찰 조사 결과 ‘불량 전지의 열폭주’로 불이 났고, ‘비상구 설치와 같은 대피경로 확보미흡’이 대형 인명피해의 원인이라고 경찰이 밝혔음에도 말이다. 게다가 희생자 유가족들을 대상으로 민사소송까지 제기하려 했다니 그 후안무치에 말문이 막힌다. 당시 사고로 남편을 잃은 유가족 최현주 씨에 따르면 남편이 “계속 전지에서 미세 발열이 나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아리셀은 오히려 제 남편이 방치했고 화재로 이어졌다”고 뒤집어씌우면서 민사소송으로 위협하며 합의하자고 했단다. 합의 조건은 ‘처벌불원서’였다고 한다. 23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고 8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업체의 대표에 대한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서명해야 하는 것이 맞느냐는 최 씨의 하소연을 재판부는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사고 이후 산업안전 관리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은 고조됐다. 하지만 아리셀 측은 여전히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며 유가족들의 고통은 하루하루 심해지고 있다. 유가족들은 사고 직후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아리셀 모회사인 에스코넥 앞에서 농성도 했다. 그럼에도 사측은 진심 어린 사과나 직접적인 보상 조치 없이 사건을 덮으려 한다며 분노하고 있다. 이로 인해 깊은 상처도 받고 있다.(관련기사: 23일자 7면, 화성 아리셀 참사 후 1년…아직도 ‘책임지는 자’ 없다) 이에 유족들은 수원지법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박순관 아리셀 대표 등 책임자에 대한 엄벌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생명을 경시한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관계자들에 대한 철저한 처벌만이 또 다른 참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며 엄벌을 촉구했다. 이들은 “박순관은 법원의 보석 허가로 석방돼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면서 “참사는 끝나지 않았다. 박순관이 중대재해처벌법으로 강력한 처벌을 받도록 재판 방청, 서명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리셀 측이 책임 있는 사과와 피해 보상, 재발 방지를 위한 실질적 조치를 내놓길 바란다. 아울러 노동자의 안전을 위한 제도의 촘촘한 정비도 필요하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3년여를 우리 국민을 잠 못 이루게 하는 윤석열 정권은 마침내 끝이 났다. 박근혜 정권과 윤석열 정권, 시퍼렇게 살아있는 두 권력을 촛불과 응원봉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갈아치웠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실제로 보면 민주 시민들의 불의에 대한 단호한 의분과 민주제도에 대한 실천적 의지로 가능했다고 본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정권 이재명 대통령의 국민주권 정부가 탄생했고 많은 시민의 환호와 희망 안에서 출범했다. 그동안 답답한 여러 사안에 대해, 특별히 새로운 정부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함께 일할 사람들을 추천하거나 정책 제안을 자유롭게 추천하고 제안하도록 국민을 독려하고 있다. 정말 상쾌한 분위기로 새 정부가 출범하여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다. 그런데 한쪽에서 통합정치를 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예수의 가장 유명한 말씀 중의 하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어떤 이들은 이러한 논리로 그동안 “상대 당의 주요 인물들을 박해한 자들을 용서하고 통합적 정치를 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물론 겸연쩍은 표정으로 해야 할 말을 너무도 당당하게 외친다. 이재명 정권도 출범할 때부터 통합정치를 확실하게 표명했다. 복수의 정치를 해서는 국민통합을 이룰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복수(revenge)는 항상 또 복수를 부른다. 하여, 보복의 정치는 낮은 수준의 정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정법을 어긴 사람들을 없던 일로 무마하고 좋은 게 좋다고 그냥 덮어두고 넘어가기를 원하는가? 모든 국민의 상식에 이 질문을 던지면 거의 99.999%는 슬그머니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는 것에 반대할 것이다. 그러니, 통합과 용서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고 나라를 이끌어 가는,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실정법을 어긴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에 맞는 적절한 처벌을 해야 한다. 이를 보복 정치네 통합의 정치를 왜 안 하냐 등의 어리석은 말로 공정과 정의를 이뤄야 하는 새 정부의 발목을 잡는다면 우리는 앞으로 또 다른 내란을 보게 될 것이다. 하여, 이번 국민주권 정부는 투명하고 단호하게 법을 어긴 사람들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처벌해야 한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미군정과 리승만 정권에 의해 우리 국민을 탄압한 친일 인사들을 무죄 방면하고 오히려 권력을 쥐여 줬기에(일본 순사가 그대로 경찰이 되는 둥) 지금까지 그 자손들이 그 기득권으로 힘을 휘두르며 주권자를 무시하고 있다. 하여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하루빨리 범법자들을 수사하고 재판하여 마땅한 처벌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내란 우두머리를 “즉시항고”도 하지 않아 반바지 입고 돌아다니게 하는 검찰, 청문회 전에 총리 후보자의 이야기도 들어보지도 않고 일개 시의원의 고발에 “즉시수사” 배당하는 검찰은 하루빨리 해체되어야 한다. 검찰 개혁법안은 국회에서 통과되면 유예기간 없이 “즉시 실행”해야 한다. 덧붙여 독일 나찌 시절의 “히틀러 유겐트(히틀러 소년단)”처럼 아이들에게 편향되고 거짓된 선전을 가르치고 가스라이팅 시키는 리박스쿨(리승만, 박정히 스쿨)도 엄밀하게 수사해야 한다!
인공지능의 성능이 발전하면서 진실과 허위의 경계는 한층 더 허물어졌다. BBC는 인공지능으로 제작된 아동 성착취물의 증가로 인해 실제 위험에 빠진 아동을 구하는 데 쓰여야 할 시간이 낭비되고 있는 현실을 보도했다. 관련 기관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아동이 혹여나 진짜 사람일까 우려하며 확인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대로라면 실제 위험에 처한 아동을 ‘가짜’라고 잘못 판단하여 구조에 나서지 않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니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만들어진 성착취물에는 실제 피해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허위다.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유통되고 있는 성착취물이 실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로부터 생존의 기회를 앗아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혹자는 인공지능이 생성한 성착취물을 또 다른 인공지능으로 식별해내면 되는 문제가 아니겠느냐고 주장한다. 기술 잡는 기술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기술의 문제를 다른 기술로 막고, 이를 우회하는 다른 기술이 등장하며, 서로의 꽁무니를 쫓는 추격전이 과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근본적인 해결책은 단연 기업과 이용자 모두의 기술 윤리 회복이다. 표현의 자유가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지는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주지하는 것 말이다. 표현의 자유가 갖는 의의를 조롱이라도 하듯, ‘자유로운’ 온라인 플랫폼 텔래그램이 성착취물 유통의 온상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의 내부고발을 통해 9.11 테러 이후 국가와 기업이 결탁하여 전 세계인을 감시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텔레그램은 표현의 자유가 사라졌다는 세계적인 두려움 속에서 혜성같이 등장했다. 텔레그램은 ‘지구상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라는 아이디어 그 자체였다. 그러나 출시 12년여가 지난 지금, 텔레그램은 딥페이크 성착취물 문제를 증폭한 기업이 되었다. 텔레그램이 약속한 ‘통신의 자유’는 비밀 채널에서 아동성착취물(Child Sexual Abuse Material, CSAM)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성착취를 사실상 방조했다. 스탠포드 인터넷 감시소(Stanford Internet Observatory, SIO)는 텔레그램이 사적 채널에서의 아동성착취물 거래 행위를 암묵적으로 허용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인 간 통신에 대한 텔레그램의 정책은 다른 빅테크 플랫폼에 비해 너무도 자유로워서, 아동성착취물 유통과 어린이에 대한 성애화, 그루밍 등에 대해 아무런 제재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은 인간의 행위를 유도한다. 텔레그램의 익명성과 보안, 사법 공백은 자극적인 ‘표현’을 통해 수익을 좇는 이용자를 만들어냈다. 국가의 감시에서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이상은 인권을 적극적으로 희롱하는 이용자들의 피난처로 전락했다. 그렇게 텔레그램은 자유의 이름으로 세탁된 부를 축적했다. 산적한 정치 현안과 복잡하게 전개되는 해외 정세 속에서도 성착취물 유통 문제는 멈추지 않았다. 딥페이크 성착취물 산업은 자유를 앞세워 유지되고 있다. 누구의 자유이고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누구를 침묵시키고 있는가.
경기도가 ‘아리셀 참사(화성 전지공장 화재사고)’ 1주기를 맞아 참사의 원인부터 대응책까지 담은 종합보고서 ‘눈물까지 통역해 달라–경기도 전지공장 화재사고, 그 기록과 과제’를 발간한다고 밝혔다. 도의 자기성찰 기록이자 지방정부가 피해자 목소리로 완성한 국내 최초 ‘피해자 중심’ 종합보고서라는 설명이다. 기억하기조차 두려운 ‘아리셀 참사’의 희생을 교훈 삼을 특별한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다시는 이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예방·대응 지침서로 활용되어 기록물의 효용성을 더욱 넓혀나가길 기대한다. 보고서는 1부 경기도의 대응, 2부 자문위원회의 분석과 권고로 구성됐다. 1부는 CCTV 분석, 화재 진압과 소방본부의 재현 실험, 긴급생계비·통역·의료·심리지원 등 도의 대응을 시간순으로 정리했다. 보고서에는 특히 김동연 경기도지사의 ‘이주노동자도 경기도민’이라는 선언 아래 법적 지원체계가 불명확한 외국인 유가족까지 차별 없이 지원한 전국 최초 사회적 재난 지원, 재난안전대책본부의 현장 설치, 솔루션회의 등 새로운 대응 체계에 대한 논의 과정과 성과가 포함됐다. 현장 관계자들의 발언을 구술형 기록으로 재구성해 기존 행정 백서와는 다른 ‘기억 중심의 기록물’로 완성됐다. 2부에는 ‘경기도 전지공장 화재 조사 및 회복 자문위원회’ 제언을 중심으로 이민 사회, 노동, 안전정책 전환, 위로금 제도화 등 실제 정책 수용 내용과 향후 과제가 담겼다. 도는 화재 당시 ‘리튬전지 화재에 물을 이용한 소화 방식이 옳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대응 매뉴얼의 적절성을 되짚고 반성과 성찰을 통해 실질적인 정책 변화를 이끌어 냈다. 경기도는 우선 ‘이주노동자 보호정책’을 ‘이민사회 정책’으로 확장했다. 지난해 7월 전국 최초로 이민사회국을 신설했으며 다음 달에는 이민사회통합지원센터를 개소한다. 이를 통해 노동, 안전, 정착지원, 차별 예방 등 4개 분야 33개 과제를 추진 중이다. 사회적 재난 대응 방식도 손봤다. 법의 사각지대를 넘어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피해자, 유가족들에게 긴급생계비를 지급했고 이후에는 전국 최초로 중경상 피해자까지 지원하는 ‘경기도형 재난위로금’을 정착시켰다. 이밖에 산업 안전정책도 구조적 전환을 모색 중이다. 전국 최초로 주 4.5일제 시범사업을 도입해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산재 예방을 도모하고 노동안전지킴이 인력을 확대하고 산재율을 반영한 정책 인센티브제도 마련할 방침이다. 특히 근로감독 권한 일부를 지방정부가 공유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무려 32명의 사상자를 낸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는 소름 끼치는 악몽이다. 발생한 지 한 해가 지났지만, 유가족들의 고통은 날로 깊어지고 있다. 사고 이후 박순관 아리셀 대표는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법정에서는 “나는 단순 투자자”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현장은 복구 없이 방치돼 참사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사고 현장은 말이 안 될 정도로 허점투성이였고, 허술한 안전의식이 얼마나 참혹한 재난을 불러오는지를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다시는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국가사회를 건설해나가는 것이 희생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아리셀 참사’ 1년이 지난 지금도 그런 교훈이 제대로 실천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사회적 재난의 예방과 대응 매뉴얼로 쓰이길 간절히 바란다”는 김동연 경기도지사의 당부처럼 경기도가 발간한 이번 종합보고서 ‘눈물까지 통역해 달라–경기도 전지공장 화재사고, 그 기록과 과제’가 재난을 예방하고, 사고 발생에 대응하는 유용한 지침서로 발전돼가길 기대한다. 절대로 사고가 나지 않는 사회는 무결점 안전시스템의 구축을 통한 철저한 예방과 허점 없는 대응 매뉴얼의 완성만이 견인한다. 다시 한번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나처럼 몰랐을까. 몰라서, 신神은 죽었다고 말했을까. 어떤 사람은, 그의 말을 선언이 아니라 절규라고 해석했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목격한 자의 고백이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신은 사랑이고 정의이며 자비라고 했다. 그런 해석을 두 귀로 똑똑히 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정말 신은 그 해석대로인가. 그러하다면, 신의 이름 아래 벌어지고 있는 온갖 죄악은 무엇인가. 전쟁과 차별과 혐오는 무엇인가. 그것도 사랑인가. 사랑이라면, 피난민의 천막을 조준하는 총구는 정의이고, 어린 학생의 교실을 관통하는 미사일은 자비인가.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인간은 끝없이 신을 부르짖으며 살아가는데, 정작 인간의 부름에 답하는 신을 나는 아직껏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묻는다. 내 안의 나에게 내가 묻는다. 신은 존재하는가. 거룩하게 살아서 임하는가. 거룩하게 임한다면, 왜 말이 없는가. 도대체 왜, 사랑은 보이지 않고 정의는 부러지고 자비는 도망치는가. 도대체 어느 구석 어떤 경계에 존재하기에 빌고 또 빌어도 대답이 없는가. 혹시, 신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게 아닐까. ‘of our own making.’ 그렇게 태어난 게 종교가 아닐까.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이 빚어낸 그림자의 형상처럼. 중요한 건, 오늘도 누군가는 그 그림자를 향해 기도를 올린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발사한 미사일이 적국의 하늘에 심판의 불비를 내리게 하소서. 우리의 믿음을 따르지 않는 자들의 앞날에 은혜가 아닌 재앙이 임하게 하소서. 도대체 어떤 신의 가르침이 이리도 폭력적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하기 싫다. 이해하는 순간, 나도 그 폭력에 동의하게 될까 두렵다. 그들은 신을 말하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인간의 욕망을 본다. 신의 뜻이라 외치는 입에서 나오는 건 끝없는 분열과 증오, 그리고 돈이다. 당연히 믿음은 숫자로 계산되고 교단은 재벌이 된 지 오래다. 그러니 그럴 수밖에. 당신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가. 낮은 곳에 임해야 할 십자가는 세상 꼭대기에서 날마다 당당하다. 중생의 눈물을 외면한 자비는 불단 앞에 쌓이는 공양물의 공덕과 찬탄 속에 거룩하다. 기도는 값비싼 음향기기 속에서 흩어지고, 신의 메시지는 편집되어 자막으로 나붙는다. 녹음되고 편집된 메시지에도 사랑과 헌신은 존재할까. 있다면, 어디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지금의 종교는 정말 신을 섬기고 있는 건지. 아니면 신의 이름을 빌려서, 인간 자신의 욕망을 섬기고 있지는 않은지. 그럼에도 나는 신을 믿는다. 무너지고 삐뚤어진 종교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신이니까. 신의 이름을 팔아 치부하고 득세하는 무리를 단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역시 그분이니까. 내가 신을 우러름도 그래서다. 나는 신을 흠모하고 경외한다. 신을 모신다고 지은 온갖 건물을 흠모함이 아니다. 나는 교회와 사찰을 경외하지 않는다. 나의 우러름의 대상은 종교 지도자가 아니다. 내가 진정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의 가르침이고, 모두가 부처일 수 있다는 신의 깨우침이다. 인간의 탐욕을 넘어서려는 노력과 의지가 없다면, 종교는 언제까지나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허상에 갇혀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여전히 나는 신을 기다린다. 그분이 보낸 응답이 이미 우리 자신에게 존재함을 깨닫는 그 순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