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의 겨울, 대한민국 국민들은 내란 소요가 일어난 현장에서 또는 미디어를 통해 역사를 보았다. SNS와 유튜브 생중계를 통해 계엄령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잠 못 이루던 그날 밤, 미디어는 전 국민을 역사의 기록자로 만들었다. 미디어가 시민에게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는 미디어 연구자라면 그날의 현상에 관해 이런 질문들을 던질 것이다. 계엄령 관련 정보를 접하기 위해 이용한 미디어가 이용자의 정치 태도와 참여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미디어 연구는 미디어가 일반 시민의 인식과 태도에 영향을 미치며, 정치 엘리트가 전략적으로 미디어를 활용할 것이라 전제한다. 그러한 까닭에 정치 엘리트는 시민이 접하는 미디어와 정보를 통제한다. 언론 보도를 정정하려 하고, 심의를 통해 특정 정보에 대한 접근을 차단한다. 물론, 민주주의를 위해서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는 그간 주목하지 않았던 중요한 문제를 발견하였다. 당혹스럽게도 대통령과 그 주변 인물들은 계엄령이 그들이 내릴 수 있는 가장 정의롭고 ‘합리적’인 결정이라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합리성’은 도대체 어떻게 구성된 것인가? 국민에게 총구를 겨누는 극단적 결정을 합리화하게 되기까지 대통령과 그 주변 인물들은 어떤 정보를 어떻게 접해왔으며, 어떤 정보 환경을 만들어 왔던 것인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소위 ‘극우’ 유튜브 채널들이 생산하는 정보가 대통령과 그 주변 인물들의 판단 근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확증 편향은 비단 유튜브 알고리즘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시시각각 발표되는 속보들에 따르면, 대통령의 의사결정에 동조한 주변 인물들 역시 놀라울 만큼 ‘선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권력자의 위험한 생각에 찬동하는 사람들이 모여 거대한 반향실을 만들었을 것이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일찍이 배제되거나 침묵해야 하는 억압적 상황에 놓였던 것이 아닐까. 국민을 지키기 위해 거국적인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는 그들의 진부한 언어에서 우리는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의 의사결정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계엄령 이외의 결정들은 도대체 어떻게 내려졌단 말인가. 행정부의 수반이자 군 통수권자로서 대통령은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것으로 기대된다. 전쟁과 계엄을 선포할 수 있고, 긴급경제명령을 발동할 수 있고, 거부권도 행사할 수 있고, 정부법안도 발의할 수 있는 자리다. 그런 권력을 가진 자가 불합리로 일관할 때마다 그를 일깨우려 국민이 직접 한겨울 광장에 모일 수는 없지 않나. 대통령이 어떤 정보 생태계 안에서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극히 드물다. 관련 정보에 접근하기 쉽지 않은 까닭이다. 심지어 이번 정부는 대통령 기록물도 제대로 남기고 있지 않으며, 대통령실을 구성한 인물들이 누구인지조차 모두 공개하지 않았다. 계엄령을 선포하기까지 의사결정 과정을 담은 회의록이 제대로 남아 있기는 한지 알 수 없다.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결정은 어떤 침묵과 불통 위에서 내려졌는가.
경기도가 경기도의회를 중심으로 ‘외국인 간병인’ 도입을 추진하고 있어서 화제다. 2025년 우리나라는 초고령 사회(65세 이상 인구 20%)에 진입한다. 노인은 급격히 늘고 젊은이는 부족한 상황에서 간병인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가 된 지 오래다. 외국인 간병인에게 한국어 등을 교육한 뒤 병원과 요양원에 배치하겠다는 계획이 골자다. 하늘만 쳐다본다고 해결책이 나오는 게 아니다. 경기도의 계획이 좋은 성과로 귀결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더불어민주당 김동규 경기도의원은 지난달 말 ‘외국인 간병인 제도의 운영 및 지원에 관한 조례안’을 대표 발의했다. 서울시가 시행하는 필리핀 가사 관리사 시범 사업과는 다르다. 다른 국가·기관과 협력해 외국인 간병인을 모집한 다음 일정 기간의 교육·훈련을 거쳐 비자를 전환하여 현장에 배치하는 방식을 추진하고 있다. 내년 2~3월쯤 조례안을 도의회에서 통과시키는 게 목표다. 경기도의회는 외국인 간병인에게 최저임금을 적용할 방침이다.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않으면 외국인 간병인이 돈을 더 주는 다른 일자리로 이탈해 불법 체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 최저임금(시간당 1만30원)을 적용하면 이들은 하루 8시간씩 주 5일 일할 때 주휴수당을 포함해 월 209만 원을 받는다. 앞서 서울시가 도입한 필리핀 가사 관리사 가운데 2명이 무단이탈하면서 낮은 처우 문제가 불거진 데 따른 개선책이다. 서울시의 필리핀 가사 관리사 사업의 시행착오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경기도의회는 간병인들에게 정주(定住) 여건을 만들어주는 시스템에 신경을 쓰고 있다. 식당과 숙박 시설을 갖추고 있는 요양원 등에서 외국인 간병인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현재로서는 한계가 있다. 외국인은 재외동포(F-4)와 방문 취업(H-2) 비자를 가진 경우에만 간병인으로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의회는 외국인 간병인을 2년간 체류할 수 있는 단기 연수(D-4-6)비자 등으로 입국시킨 뒤 교육·훈련을 거쳐 특정 활동(E-7) 비자로 전환시키는 방법을 검토하고 있다. 필리핀 가사 관리사처럼 고용허가제(E-9)로 외국인 간병인을 도입하는 방안도 함께 거론된다. 서울시가 필리핀 가사관리사 제도 도입에 앞서 국내에서 한시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고용노동부 외국인력정책위원회 허가를 받은 전례가 있다. 경기도에서 외국인 간병인을 고용허가제로 도입하려면 이런 과정을 거치면 가능하다. 초고령화에 대응하기 위한 다른 나라들의 외국인 간병인 도입은 이미 오래 된 얘기다. 일찍이 노인 환자 케어 문제에 봉착한 일본은 지난 2008년부터 경제연계협정(EPA)을 통해 인도네시아·필리핀·베트남 등 외국인이 간병 시설에서 교육받고 일하며 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길을 열였다. 유학 외국인이 2년 이상 교육을 받으면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도 가능하다. 호주의 경우는 ‘노인 돌봄 산업 협정’으로 노인을 돌보는 외국인에게 영주권을 준다. 대만은 외국인 간병인이 최장 14년까지 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올 3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간병인 등 돌봄 서비스직 노동 인력은 이미 2022년에 19만 명이 부족했던 것으로 집계됐다. 지금 상태라면 오는 2042년에는 무려 61만~155만 명이나 부족할 것이라는 추계도 있다. 늙고 병든 부모를 임종 시까지 돌보는 일은 이만저만 큰 문제가 아니다. 멀쩡한 젊은 노동 인력의 손발이 묶여서 생산경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도록 할 수도 없다. 젊은 세대가 부양해야 하는 고령자들의 비율이 큰 폭으로 늘어나는 초고령 사회에는 가능하지도 않다. 경기도에서 외국인 간병인 제도가 성공적으로 도입되면 대한민국 전체가 달라질 수 있다. 경기도의 외국인 간병인 제도 도입은 성공해야 한다. 효율적인 간병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은 우리에게 이제 선택과목이 아니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사이트를 접속하면 각양각색의 섬네일(thumbnail)이 시선을 끌며 클릭을 유도한다. 막상 섬네일을 클릭하면 기대하는 내용과는 다르다. 직설적으로 언급하면 가짜뉴스(fake news)나 거짓 내용으로 클릭 장사한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속이는 사람도 속임 당하는 사람도 익숙해져 별다른 느낌도 없다. 이미 가짜나 거짓에 대한 불감증은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민족(異民族)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민족’이라 하여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매스컴에서는 가짜뉴스가 판치는가 하면, 진실을 보도하는 미디어(media)가 오만불손한 권력자들에 의해서 반국가적 세력으로 몰려 오히려 매도당하는 요즈음이다. 그래서 국민은 언론도 정부 당국도 신뢰(trust)하지 않는다. 신뢰는 사회적 자본인데, 신뢰하지 못하고 불..
같지 않습니다. 아닌 건 어떻게 해도 아닙니다. 넘나들기 쉽도록 설치한 사거리 신호등이 아닙니다. 이리저리 옮겨 가도 무방한 온탕(溫湯)과 냉탕(冷湯)이 아닙니다. 선택 장애 손님을 위한 메뉴, 이를테면 ‘양념 반 프라이드 반 치킨’은 더더욱 아니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같을 수 없습니다. 다름과 틀림 역시 그렇습니다. ‘세상’이라는 울타리 속에 존재하지만, ‘세상’이라는 울타리를 둘로 가르는 ‘낮’과 ‘밤’처럼 별개의 존재입니다. ‘세상’이라는 울타리를 ‘그릇’으로 좁히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밥그릇도 국그릇도 모두 그릇입니다. 다만 그릇 안에 담는 음식에 따라 쓰임새가 다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밥그릇과 국그릇은 생김새와 쓰임새가 서로 다를 뿐이지 틀린 게 아닙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라는 별에 사는 사람은 모두 다릅니다...
경기도가 내년 지역화폐 예산을 1043억 원으로 편성했다. 이는 올해(954억원) 보다 10% 증액된 것이다. 특히 설을 앞두고 도내 시·군과 함께 할인율을 10%까지 높이기로 했다. 현재는 6~7%다. 이 조치는 계엄 사태와 이어진 탄핵 정국으로 침체한 민생경제를 살리기 위한 것이다. 도는 설을 앞두고 시·군과 함께 현재 6~7%인 할인율을 10%까지 높이기로 했다. 수원시의 경우 민생회복 특별경제대책의 일환으로 지역화폐 예산을 2배로 증액했다. 시는 지역화폐인 수원페이 발행액을 올해 200억 원에서 내년 411억 원으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종전의 충전 한도는 30만 원이었지만 다음 달부터 50만 원까지로 확대하기로 했다. 인센티브 할인율은 기존 6∼7%에서 10%로 올린다. 뿐만 아니라 설과 추석 명절이 포함된 1월과 10월에는 20%로 상향 조정할 계획이..
‘5월 광주’를 아는 어떤 이가 뉴스를 보았다. 찬찬히 세수했다. 이게 마지막 재계(齋戒)는 아닐까. 계엄이란 이름의 군사반란을 또 보는구나. 비장한 길을 나섰다. 천지신명이여, 선배가 앞장설 기회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 후, 잠 못 이루는 밤들이 지난다. 여의도의 인파, 젊은 여성들 한 동아리가 “와, 아저씨도 오셨네요, 고맙습니다.” 응원봉 흔들어 환호했다. 그렇지, 그들(몫)의 세상이지. 마음으로 축원했다. 상황의 그런 변화는 진화(進化)일 터다. 교수들이 뽑은 사자성어(四字成語), 계엄 전에 뽑았다는데 우연이었나? 도량(跳梁)과 발호(跋扈)를 묶은 1위작 도량발호는 황당한 저들의 행태를 제대로 찍었다. 후안무치(厚顔無恥)와 석서위려(碩鼠危旅)가 뒤를 이었다. 셋 다 상황에 딱 맞는다. 여러 사람들이 보내고 있는 ‘어려운 밤’을 떠올리다 문득 생각했다, 계엄 후에 선정 했다면 1위로 전전반측(輾轉反側)이 뽑히지 않았을까 하는 발상이다.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비통과 무력감은 도량발호를 넘어서는 특선작이 될 수도 있었으려니. ‘저 몇 사람의 도량발호’보다는, ‘나(우리)의 전전반측의 총량’은 얼마나 참혹한가. 작년엔 ‘이끗 보더니 의리 잊더라’는 견리망의(見利忘義)였다. 왜(倭) 제국주의의 심장을 쏘아 처단한 안중근 장군의 그 글씨 견리사의(見利思義)의 반대편에 서는 말이다. 그런데, 관련기사 살피다가 특이(特異)한 점을 보았다. 일부매체가 도량발호는 한자 ‘跳梁跋扈’ 사진 올리고, 본문은 한글로만 썼다. 후안무치와 석서위려는 아예 한글로만 적었다. 작년의 견리망의 기사도 일부는 역시 한자 없이 한글로만 적혔더라. 특기(特記)할 사항이라 본다. 문해력이 문제라는데, 발음(기호)만으로 뜻을 풀까? 어차피 모르는 말이니 그냥 지나쳐? 좀은 의도적으로 단어들을 선택한 이 글도 그런 걱정을 품는다. 한자 배우지 않은 세대와의 소통부재는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일 터다. 당장 급하지 않다고 미뤄두니 치유나 개선이 더 어려워진다. 그런데도 기성세대는 고사성어 따위의 유식한 ‘말씀’을 멈추지 않는다. 다음세대를 위한 정책의 배려도 없다. 도량발호는, 물론 1위작이니 간단한 해설은 기사에 붙어있었다. 한글로 쓰인 후안무치가 뭐지? 대충 그런 사람을 이르는 말이겠지. 하지만 석서위려는? 견리망의나 견리사의는? 特異와 特記는 같은가? 재계 계엄 축원 장삼이사 따위는 뭐고, 왜 그런 뜻이 쓰일까? 이 또한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일(전전반측) 상황이다. 전전반측, 시경(詩經)의 국풍(國風)에 나오는 시 한 대목이다. 사면초가(四面楚歌)란 익숙한 말의 초나라 노래(歌)의 대표적인 것이 국풍이다. 이런 따위, 전에는 ‘상식’이었다. 연말연시엔 ‘원단’ 들어간 인사 무성하다. 元旦은 ‘새해 첫 아침’의 비유적 표현이다. ‘문자(질) 좋아하는’ 선배들의 저 유식한 인사에 다만 멀뚱한 후배들 표정의 의미는 뭘까? 언어가 바르게 전해지지 않아 세상이 비뚤어지는 건 아닐까. 말과 글이 겨레의 혼이라며. AI시대에는 국어공부도 필요 없을까?
12월 중순, 한 해의 끝자락이다. ‘벌써?’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어른들의 말씀처럼,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은 점점 더 빠르게 흘러가는 듯하다. 한 해가 지나간다는 사실은 늘 신비롭다. 언뜻 보면 시간은 한 방향으로, 직선적으로 흐르는 듯하지만, 실은 다양한 사건과 감정들이 얽히고설키면서 내 머릿속 구석구석 기억의 형태로 남아 있다. 이맘때면 나는 휴대폰의 달력과 다이어리를 펼쳐본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아무 도움 없이 올해를 떠올려본다. 머릿속에서 저절로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올해 내가 했던 공연, 촬영, 오디션, 그리고 몇몇 긴박했던 순간들. 삶의 주요한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하지만 달력과 다이어리를 펼치는 순간, 내 기억의 빈칸이 채워진다. 스쳐 지나갔던 만남들, 여행에서의 사소한 순간들, 지인의 결혼식, 공연 관람, 그리고 무심코 적어둔 나만의 다짐과 고민들. 적어두지 않았더라면 떠올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저 지금 나의 관심의 방향이 일에 많이 치우쳐져 있어서 그럴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내가 살아온 한 해를 ‘온전히’ 마주하게 된다. 뭔가 놓치고 있었던 내 삶의 조각들을 다시 붙이는 듯한 느낌이다. 매번 그럴 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열심히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의 기억은 종종 큰 사건만을 중심으로 저장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은 작고 평범한 순간들이 모여서 진정한 모습을 갖춘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이 시간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가장 인간 다운 순간이 아닐까? 삶은 결국 지나온 시간의 궤적을 확인하며 다음 발걸음을 내디딜 힘을 얻는 과정이다. 지나온 시간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고, 잠시 멈춰 서서 수고했다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 그것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 완벽하지 못한 선택을 자책하고,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실망하며, 남들과의 비교 속에서 자신을 깎아내린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실체가 없는 기준과 압력이다. 오늘 하루 만큼은 자신에게 올해도 수고했다고, 비록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더라도, 최선을 다했으니 기특하다고 말해보면 어떨까 싶다. 삶은 마치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과 같다. 어떤 장면은 선명히 기억되지만, 어떤 장면은 흐릿하게 사라진다. 그러나 모든 페이지는 다음 페이지를 위한 준비가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발자취가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올해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나는 스스로에게 칭찬을 건넨다. 올해도 잘 버텼다고.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오늘 하루 만큼은 자신을 토닥여주기를 바란다. 당신은 한 해를 묵묵히 살아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을 해낸 것이다. 삶은 속도나 성과로 측정되지 않는다. 삶은 우리가 어떻게, 무엇을 기억하고 그 기억에 스스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올해를 정리하며, 당신 자신과 조금 더 가까워지는 하루를 보내길 바란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가장 먼저 실시한 것은 바로 ‘도량형의 통일’이었다. 물물교환이나 상거래를 약속하는 기본 단위이자 조세와 공납의 가장 기초가 되는 제도였기에, 통일된 국가를 다스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표준’이었던 것이다. 당시 이러한 표준을 소유하고 관리한다는 것은 바로 왕의 권위이자 권력의 상징이었다. 고구려가 한 때 동남아시아의 최강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막강한 군사력과 더불어, 고구려의 실정에 맞게 독자적으로 제작하여 활용한 35.6㎝의 자(척)인‘고구려척’에 의한 경제적 영향력이었다. ‘고구려척’은 토지측량과 건축뿐 아니라, 일본에까지 전파되어 주변국 상거래의 기준이 되어 고구려의 권력을 확장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우리 일상의 무수히 많은 곳에도 표준은 녹아있다. 전 세계에서 하루 몇 만 장이 소비되고 있는 종이인 A4용지, 국제표준화기구인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ISO)가 210×297㎝로 규격을 제정한 A4용지는 종이를 자르는 과정에서 가로, 세로의 비율을 유지해 종이의 낭비를 최소화할 수 있는 수치를 표준화한 것이다. 자르는 과정을 몇 번 반복했는지에 따라 용지의 규격과 명칭이 정해지고 표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표준규격은 종이의 생산뿐 아니라 인쇄기와 복사기의 생산·유통·서비스 및 소프트웨어 개발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에 세계 여러 국가와 기업에서는 선제적으로 ‘표준’을 만들고 준수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정부는 2014년부터 전면 시행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도로명주소를 주소체계 국제 ‘표준’의 일부로 포함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세계 주소의 표준은 어떻게 적용되는 걸까? 나라별 도시형성의 역사와 환경이 달라 세계가 하나의 통일된 주소를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국제표준화기구(ISO)에서는 주소체계 우수 국가의 주소 부여 방식을 우수사례로 표준화함으로써 주소체계가 아직 미흡한 국가에서 이를 참조할 수 있게 하였다. 우리나라는 2014년 도로명주소 전면 사용 이후, 건물에 사용하는 주소 외에 사물주소(시설물)와 공간주소(공터, 산지, 지역)를 도입해 다른 국가보다 촘촘한 주소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필요한 장소에 도로명판, 건물번호판, 사물번호판, 기초번호판, 국가 지점번호판 등을 설치·확장하여 건물이 없는 도로, 공터, 등산로 등에서도 위치 확인이 가능하게 해 어디서나 가능한 위치표시, 입체적 이동경로 구축에 따른 개별주소 부여, 전자지도의 실시간 갱신, 공급체계 구축, 탁월한 위치 예측성 등의 내용으로 2023년에 앞서 언급한, 국제표준(ISO 19160-2)에 ‘실세계 주소부여 및 유지관리’ 분야의 우수사례로 반영되었다. 이는 제대로 된 주소체계를 갖추지 못한 여러 해외원조 수원국들에게 좋은 지침이 될 수 있으며, 국제적 디지털 정부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국형 주소정책이 세계 산업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좋은 모델이 될 것이다. 한국국토정보공사(LX)는 2017년부터 ‘표준개발협력기관’으로 선정되어 공간정보 분야 표준 도입, 개발, 국제 표준화 활동 등을 수행하며 국가 공간정보의 표준화 정책을 지원하고 있으며, 주소정보활용지원센터와의 협업을 통해 주소정보 표준화에 대한 상승효과를 내고 있다. 2024년에는 모빌리티와 연계한 주소정보 데이터 모델을 표준에 반영하여, 주소가 산업화에 적극 활용될 수 있도록 기반 마련에 힘을 쏟고 있다. 표준화는 대량 생산과 국제무역이 활성화되어 있는 오늘날 모든 기술과 체계·서비스 모델의 연구 개발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건이다. 이에 정부는 국제표준에 한국형 주소체계를 반영하기 위한 지속적인 연구·실증과 홍보를 이어가고 있으며, 택배 등 물류업, 내비게이션과 같은 지도 분야, 공간정보 시스템 구축 등 위치정보를 활용하는 기업들의 해외 진출 시에도 한국형 주소체계의 지원을 확대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다가올 미래는 전 인류와 사물이 함께 연결되어 공존하는 세상일 것이다. 사람뿐 아니라 인공지능, 로봇 등 첨단 산업 분야와도 주소테이터를 위치정보로 연계·활용하여 상호 운용성을 높이게 되면, 물류산업 성장, 지역 경제 동향 분석 등 산업계에서도 매우 유용한 공적 자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진화를 거듭해 세계와 사물을 연결하는 데이터를 꿈꾸고 있는 ‘대한민국 주소’, 세계와 미래로 향하는 그 첫걸음의 열쇠가 바로 ‘표준’이다. [ 최진무 경희대학교 교수 ]
12.3 비상계엄 사태가 벌어진지 2주가 지났다. 우여곡절 끝에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소추 된 지도 엿새가 지나고 있다. 그 사이 대한민국은 경제, 행정, 외교 등 모든 영역에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어제는 금융위기 후 15년 9개월 만에 처음으로 환율이 1450원을 돌파 했다. 금융시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롤러코스터를 타며 국부가 사라지고 있고, 자영업을 비롯한 민생 현장은 이제 비명 지를 힘조차 없어 보인다. 무모한 불장난을 벌인 대통령 탓에 국정은 인공호흡으로 버티는 신세가 되었다. 대한민국은 큰 위기가 닥쳤을 때마다 전 국민이 하나되어 빠르게 위기를 극복해왔다. 권력을 탐하며 싸움질만 하던 정치지도자들도 결정적 위기 순간에는 국민의 뜻에 따르는 결단을 주저하지 않았다. 위기를 곧 기회로 만들었고, 세계는 이런 대한민국의 저력에 감탄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맞이하고 있는 초현실적 위기는 양상이 다르게 흘러가고 있어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민들은 빠르게 마음을 모아 국론을 하나로 만들었으나, 권력만 탐하는 정치권은 아직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특히, 12.3 내란 사태에 큰 책임이 있는 집권여당의 행태는 비상계엄 만큼이나 충격적이다. 내란혐의로 탄핵 소추된 윤 대통령과 탄핵에 찬성하며 대국민사과를 한 한동훈 전 대표를 몰아낸 국민의힘 권성동 지도부는 지금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다. 자신들의 위기를 사법절차 방해라는 저열한 방법으로 모면하려는 행태는 마치 팀플레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 해제 후 대국민담화에서 “정치적 책임이든 법적 책임이든 피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러나 수사가 시작되자 자취를 감췄다. 대통령 관저로 보낸 수사기관의 우편은 ‘수취 거부’, 대통령실로 보낸 우편은 ‘수취인 불명’으로 배달되지 못했다. 인편으로 전달하려고 해도 대통령 비서실과 경호처가 수령을 거부하고 있다. 출석요구서 뿐이 아니다. 윤 대통령은 헌법재판소가 보낸 통지서조차 피하고 있다. 검사 출신인 대통령이 수사기관과 헌법재판소의 공적 서류 조차 수령을 거부하고 있는 모습은 참담하다 못해 기괴하다. 더 큰 문제는 국민의힘이다. 하루라도 빨리 국정공백을 수습해야 할 책임이 있는 집권여당이 윤 대통령의 사법절차 방해 전략에 공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권성동 원내대표의 행태는 12.3 비상계엄 만큼이나 충격적이다. 권 원내대표는 17일 “지금은 대통령이 궐위가 아닌 직무정지 상황이기 때문에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 전까지 헌법재판관을 임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권 원내대표의 주장은 2017년 자신이 했던 발언과 헌법재판소에 의해 바로 탄핵됐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당시 퇴임을 앞둔 이정미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임 절차에 대해 “이 재판관 후임을 대법원장이 지명하고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임명하는 절차를 지금부터 밟아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기자들이 ‘황 권한대행이 헌법재판관을 임명할 권한이 있느냐’고 묻자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헌법재판관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은 형식적인 임명권”이기 때문에 임명할 수 있다고 밝혔다. 헌법재판소도 공석인 3인에 대해 대통령 권한대행이 임명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또한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둔 헌법재판관 후보자 3명도 같은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마은혁 후보자는 “원론적인 입장에서는 국회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선출한 인사라면, 대통령 또는 권한대행으로서는 해당 인사를 재판관으로 임명하는 것이 헌법 조항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밝혔다. 정계선 후보자도 “실질적인 임명 권한은 국회에 있다”며 “대통령의 자의적 임명권 불행사로 인해 재판관 공석이 생긴다면 국민 개개인의 주관적 권리보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헌법재판의 객관적 성격의 측면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므로 위헌의 소지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고 강조했다. 국민의힘에서 추천한 조한창 후보자 역시 “국회에서 특정한 사람을 헌법재판관으로 선출했다면 대통령 또는 권한대행이 그 사람을 헌법재판관으로 임명하는 것이 헌법 조항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주장이 헌법재판소의 단호한 입장에 부딪히자 권 원내대표는 18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의원총회에서 새로운 논리를 꺼냈다. 국정 공백 최소화를 위해 헌법재판소가 이 위원장과 최재해 감사원장 등 주요 탄핵 사건 심리를 우선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회가 헌법재판관을 정하는 건 법적 공정성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임명권을 행사해선 안 된다”고 거듭 해괴한 주장을 펼쳤다. 국민의힘을 장악하고 있는 친윤그룹이 권 원내대표를 앞세워 어떻게든 탄핵 심판을 지연시키겠다는 심산이라면 이 쯤에서 멈추길 권고한다. 결과가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의 친위쿠데타 실패에서 확인했듯이 국민을 배반하고, 헌법과 법률질서를 유린하는 행위는 자멸 뿐이다. 이번 위기의 본질은 헌정질서 파괴다. 따라서 위기 극복의 유일한 방법은 헌정질서 안에서 헌법절차대로 하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두 번째 탄핵소추안이 12월 14일 가결됐다. 1차 탄핵안 폐기 후 김용현 전 국방장관, 조지호 전 경찰청장 등 내란 피의자들의 자백으로 윤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라는 정황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표결 이틀 전 윤 대통령의 ‘12‧12 대국민 담화’ 역시 가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탄핵 직전에 대통령이 당당히,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던 의지는 결연하게 읽히기는커녕 아직도 자기 잘못을 모른다는 자과부지(自過不知)라 할 만했다. 지난 3일 윤 대통령은 위헌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가짜뉴스인가 의심이 들던 것도 잠시였다. 속보로 확인한 비상계엄은 불안과 공포, 그리고 제정신인가와 같은 탄식과 화를 불렀다. 경찰의 국회 진입 차단 상황과 헬기에서 내린 중무장한 군인들이 보좌관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모습이 생중계됐다. 실탄을 실은 장갑차를 막아선 맨몸의 시민들 안위가 걱정됐다. 새벽 1시,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절차에 따라 가결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신 똑바로 차릴 때’라는 것을 확신했다. 윤 대통령은 3일 긴급담화에서 “체제 전복을 노리는 반국가 세력의 준동으로부터 국민의 자유와 안전, 그리고 국가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비상계엄의 이유를 밝혔다. 언론은 국회의 기능을 지체시키거나 마비시킬 목적을 두고 계엄을 내린 현직 대통령의 결정을 두고 내란죄에 해당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분석에 들어갔다. 계엄 포고령 조항을 검토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출동한 국군정보사령부 CCTV 영상을 확보하면서 계엄의 시간대별 정황을 확인했다.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기거나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마비시키는 ‘국헌문란’에 해당하는가를 따져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7일 110초 길이의 두 번째 대국민 담화가 있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와 윤 대통령이 비공개 면담을 진행한 이후였다. 임기 문제를 포함하여 앞으로의 정국 안정 방안을 여당에 일임하겠다는 ‘질서 있는 퇴진’이 제기됐다. 대통령은 국정 운영에서 뒤로 빠지고 누군가 직무를 대신 수행한다는 것이 가능한지 언론은 질문했다. 누구도 부여한 바 없는 대통령 권력의 양도는 명백한 위헌에 가깝다는 판단이 우세했다. 12일 윤 대통령은 세 번째 담화를 공개했다. 29분에 걸쳐 비상계엄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대통령 고유 권한인 계엄을 적법한 절차에 따라 선포했고, 헌법적 결단이자 통치행위는 내란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JTBC는 12일 담화 내용에서 ‘(국회에) 질서 유지를 위해 소수 병력을 투입했다’, ‘예산 폭거 때문이다’ 등의 윤 대통령 주장을 팩트체크 했다. 시민의 저지로 국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병력과 대기조까지 포함하면 그 수가 700명에 달할 수 있고, 예산의 대폭 삭감이라고 주장했지만 정부안대로 통과한 것이 있고, 예산이 줄어든 정도를 볼 때 ‘대폭 삭감’으로 보기 어려운 것이 있다고 검증했다. 탄핵 가결은 문제 해결이 아니다. 헌법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언론의 진실 추구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야 함은 명확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