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의 공기가 답답해 밖으로 나갔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길고양이 한 마리가 마루 끝에 앉아 울고 있었다. 인기척 소리가 나면 도망가 버리던 녀석인지라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 얼굴과 배는 하얗고 등은 까만 고양이었다.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내 방을 향해 앉아 있었다. 나를 보자 더 큰 소리로 울어댔다. 배고파? 아무것도 못 먹었어? 라는 내 물음에 말귀를 알아듣는 듯, 녀석은 더 큰 소리로 야옹, 야옹, 쉴 새 없이 대꾸했다. 그 모습이 꼭 배고파 보채는 아이 같았다. 사람 먹는 것밖에 줄 것이 없어 한참을 우왕좌왕하다 주방을 뒤져 참치캔 한 개를 들고나왔다. 참치캔을 따는 동안, 기다리는 녀석의 눈빛은 집요하고 진지했다. 어찌나 뚫어지게 쳐다보는지 덩달아 내 마음도 조급해졌다. 드디어 빼곡히 들어 찬 참치 살이 드러났다. 녀석에게 내밀자, 고개를 박고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얼마나 굶었던 걸까? 참치캔 한가운데를 핥는 소리가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 같았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캄캄한 마당은 더 스산하고 이따금 바람에 흔들리는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거렸다. 사방이 고요한 밤이면 낮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가 빈 마당으로 다 모여드는 것 같았다. 집을 떠나 잠시 머무는 이곳은 시골이라서 그런지 계절의 변화가 눈에 더 잘 보였다. 도시의 아파트였다면, 배고픈 짐승의 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땅에서 멀어진 높은 곳에서 사는 우리에게 저 소리가 닿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물론 시골집이라고 해도 밖으로 나가보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가끔 고라니 소리도 들었다. 그럴 때마다, 고라니가 사는구나! 라고, 무심히 흘려듣고는 했다. 그런데 저 녀석을 보니, 다가올 추위가 걱정되었다. 산속이든 길 위든 먹이를 구하는 게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춥고 배고픈 생명들이 견뎌야 하는 겨울은 가혹한 계절이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며 저 고양이는 방문 앞에 하염없이 앉아 있었을까. 겨울을 견뎌야 하는 건 고양이만의 일이 아니다. 산속의 고라니는 얼어붙은 땅을 긁어 묵은 풀뿌리를 찾아낸다. 전깃줄 위에 잔뜩 몸을 부풀린 참새들은 체온을 잃지 않으려고 서로 가까이 붙어 밤을 버틴다. 바닷가 갈매기는 파도에 떠밀려온 작은 먹잇감을 찾아 해안을 맴돌며 겨울을 난다. 멀리서 보면 고요한 풍경 같지만, 사실 그 모든 움직임은 살아남기 위해 치러내는 치열한 일상의 전투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고요한 풍경 속에서도, 모든 생명은 각자의 방식으로 겨울을 견디게 될 것이다. 추위를 막기 위해,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살아내는 일이 유독 애달프게 다가오는 계절이다. 나는 사료 한 포대를 주문했다. 깊은 밤, 한 생명이 굶주림에 지쳐, 내 곁에 와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것은 살고 싶다는 간절한 구조요청이었을 것이다. 오래전 다큐에서 본, 남극의 황제펭귄이 생각났다. 서로의 몸을 밀착하고 자리를 바꿔가며 추위를 이겨내는 ‘허들링’을 하는 장면이었다. 겨울은 혼자 건너기엔 너무 긴 계절이다. 동물도 사람도 이 겨울을 무사히 건널 수 있기를 바란다.
천지는 쉼 없이 움직인다. ‘논어’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은 변함없이 운행하고, 만물은 여전히 낳고 자라니, 하늘은 무엇을 말하는가.”라고 말한 게 잘 보여주고 있다. 세월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흘러가기에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시작이 좋으면 끝이 좋고, 끝이 좋으면 또 다른 시작이 좋다고 하는 것이다. 격동의 2025년도 저물어 간다. 누군가는 황혼빛이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거기에는 그리움과 아쉬움, 그리고 아픔과 슬픔이 짙게 묻어 있다. “미(美)는 우수(憂愁)와 함께 한다”는 존 키츠의 말처럼, 우리는 내면으로 젖어드는 숭고한 아픔과 회한으로 얼룩진 아쉬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끝이 좋으면 또 다른 시작이 좋다 하지만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나이 먹음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거울 보고 늙음이 기뻐서(覽鏡喜老)’라는 시에서 그는 “늙지 않았다면 요절했을 것이고/ 요절하지 않았다면 노쇠해 마땅한 법/ 노쇠는 요절보다 나은 것/ 그 이치 의심할 나위 없네.”라고 말했던 것이다. 세월의 흐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다. 근래 크고 작은 송년 모임이 이어지고 있다. 다사다난했던 묵은해를 정리하는 자리다. 하지만, 사실은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는 사람들이 외롭지 않음을 확인하려고 몸부림치는 자리라고 하겠다. 늘 쫓기듯 총총걸음으로 살지만 그럴수록 가슴은 더욱 허전하다. 스마트 폰 한 대에 모든 게 다 들어 있는 것처럼 첨단 문명의 이기(利器)를 마음껏 누리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군중 속의 고독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여느 시대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온갖 문명의 혜택이 크고 다양하지만 가슴 속엔 언제나 허전한 강물이 흐르고 있다. 상대적 박탈감에 사람들의 뒷모습에 드리워진 그늘은 길고 짙다. 그 이유와 해답은 무엇일까. 물질은 유한하고 욕망은 무한하다는 사실 앞에 겸허해야 한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하고 타인과 물질을 비교해 소외감에 허우적거리는 일상의 연속을 단절해야 한다. 무의식중에 길들여진 속도와 성취욕에서 잠시 벗어나 진정한 삶의 의미가 무엇이고, 세상을 조용히 관조하는 여유를 가지는 데서 작지만 뜻깊은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대자유’를 구가할 수 있으리라.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인격이 깊어 가는 일이다. 인격 완성은 자신의 욕심과 감정을 잘 다스리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사변적이고 비판적이며 또한 분석적으로 접근해 그 정수를 다루는 데서 인격은 다듬어진다. 경험·지혜·지식·분별력·배려·경청 등 우리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가치들이다. 문제가 되는 건 시간의 흐름을 대하는 방식이다. 세월의 변화를 불안과 원망 아닌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진정으로 풍요롭고 향기 나며 값진 공동선을 이루는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동시대에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삶의 고귀한 가치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모두의 기쁨이다. 따뜻함이 배어 있는 손길로 나눔 실천을 근래 송년회가 이어지고 있다. 경계할 사항은 술은 적당히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술을 마시되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飮酒不及亂)고 했잖은가. 민폐를 끼치고, 인상이 흐려질 수 있다. 공자가 “몸가짐이 흐트러질 정도까지 마시지는 않았다.(唯酒無量不及亂)”라고 했듯 절제했음을 할 수 있다. 세모(歲暮)다. 아쉬움이 가슴을 쓰리게 한다. 이루지 못한 계획들이 생각나서도 그러겠지만, 한 해가 가고 나이 들어간다는 회한이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우주의 긴 시간에 비춰 볼 때 일 년은 찰나에 불과하고, 세상은 예전처럼 흘러가고 있다. 그래도, 무엇인가 이웃을 위해 베풀고 남겨야 한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에 관심을 가져야겠다. 나눔 실천이다. 베풂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다. 따뜻함이 배어 있는 작은 손길에서 소외된 이웃들은 내일을 꿈꾸게 된다. 지구별에 사는 모두는 다 귀한 존재이기에 하는 말이다. ‘채근담’에 “천금으로도 일시적인 환심조차 사기 어려울 수 있고, 한 사발의 밥일지언정 평생토록 고맙게 여겨진다.(千金難結一時之歡 一飯竟致終身之感)”는 가르침은 우리 가슴에 울림이 크다. 귀하고 많음이 아니라, 정성의 문제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우리 함께 새 희망을 보자.
CU가 전국 매장에서 고객이 결제 과정에서 기부에 참여할 수 있는 ‘착한 100원 기부 캠페인’을 국내 최초로 시행한다는 소식이다. 왕성한 기부문화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은 세계 최고의 강국 미국을 비롯해 역사적으로 충분히 입증된 지혜다. 우리 사회의 기부문화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기부문화 풍조를 확산시킬 다양한 ‘착한 기부’ 캠페인이 양산되도록 유도하고, ‘기부 정신’을 함양하는 실효성 높은 교육·홍보시스템이 개발돼야 한다. CU의 ‘착한 100원 기부 캠페인’은 셀프포스(Self-POS) 모드에서 신용카드 결제 시 마지막 단계에 기부 선택 화면이 뜨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고객은 기부 여부뿐 아니라 기부처 또한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기부처는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와 RMHC Korea 두 곳이며, 고객이 선택한 기부금은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고 해당 기관 계좌로 바로 송금되는 구조다. 기존 거스름돈 모금함 방식에 이어 참여형 기부 모델을 추가하며 고객 주도의 기부문화를 확대한다는 것이 CU 측의 설명이다. 이번 캠페인은 기부 금액을 100원으로 고정하는 ‘소액 기부’ 방식을 채택, 누구나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심리적 문턱을 낮춘 것이 특징이다. CU는 이 같은 구조가 기부 경험 확산과 참여율 제고에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풀무원의 푸드서비스 전문기업 풀무원푸드앤컬처도 지난 7월에 유사한 캠페인을 시작한 바 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특정 메뉴가 판매될 때마다 100원이 자동으로 기부되는 ‘건강한 한 끼, 함께 나눔 캠페인’이다. 휴게소에서 식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지역사회에 나눔을 실천할 수 있도록 기획된 고객 참여형 사회 공헌 프로그램 개념이다. 적립된 기부금 전액은 경기 광주시 및 양평군 소외계층을 위한 식품 지원과 봉사활동에 사용한다. CU나 풀무원의 모범사례는 우리 사회의 기부환경을 새롭게 돌아보게 한다. 연말에 떠들썩하게 한번 떠들고 지나가는 일과성 뉴스에 그치고 마는 우리의 기부생태계 수준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수원시를 비롯한 각 기관이 일상 속 기부 실천과 나눔문화 확산을 위해 도입한 ‘기부 키오스크’도 시민들의 인식이 그리 높지 못한 현실이 많은 문제점을 시사한다. 올 연초에 발표된 경기연구원의 도민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소중한 힌트가 있다. 조사 결과 ‘기부굿즈’나 ‘기부런’과 같은 새로운 기부 방식이 기부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응답은 81.9%에 달했다. 또한, 기부활동에 기부 포인트를 지급하는 경우 참여 의향이 있는 응답자는 전체의 71.1%에 이르렀다. 결국 제도가 미처 도민들의 높은 기부 의향을 행동으로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는 셈이다. 미국에서는 평생을 힘들여 번 돈을 유산으로 대물림하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는 거액의 개인 기부와 사회적 환원, 그리고 살아생전 기부의 즐거움을 중시하는 자발적 기부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오늘날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든 배경이다. 미국 부자들 사이에 ‘죽은 후에도 부자인 것처럼 부끄러운 것은 없다’는 고귀한 정신으로, 살아 있을 때 기부의 즐거움을 실천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소식은 부럽기 짝이 없는 뉴스다. 그러나 정말 부러운 것은 미국 전 국민의 77%가 1년에 한 번 이상, 대부분 500달러 이하의 소액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있다는 놀라운 통계다. 미국의 사례는 궁극적으로 가정과 학교가 일상생활 속에서 기부를 실천할 수 있도록 기부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운영해야 한다는 방향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기부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건강한 정신의 결과물’이다. ‘기부 정신’의 씨를 뿌리는 일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가는 심정으로, 아이들에게 건강한 기부 정신을 기르는 일에 끈질기게 집중해야 할 시점이다.
인공지능(AI) 기술은 세상을 뒤바꾸고 있다. 생성형 AI 기술의 대명사인 챗 GPT를 넘어서 AI 에이전트 기술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AI 산업은 계속 진화한다. AI 기술 발전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파괴적 혁신이 일어날수록 인간은 편안한 세상에서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일자리는 줄어들 수 있다. AI 에이전트 기술은 사람을 대신하여 스스로 결정하고 계획하며 진행한다. 마치 로보택시가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운전하는 원리이다. 이미 로보택시는 미국, 중국에서 상용화되었다. 오픈AI CEO 샘 올트먼은 AI 에이전트 기술을 “신입 사원 수준의 동료이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생성형 AI 기술보다 한 단계 진화된 기술로 사람보다 훨씬 빠른 작업 속도로 일한다. 멀지 않아 인간지능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유한 초지능 AI가 출현하게 될 것이다. 수년 전 빌 게이츠와 메타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는 “앞으로 AI 에이전트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전망했으며, 샘 올트먼은 “2025년은 AI 에이전트 시대이다”고 역설했다. 엔비디아 젠슨 황도 CES 2025에서 “AI는 에이전틱 AI와 피지컬 AI 등 두 갈래로 발전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AI 에이전트 기술은 기업과 인간의 일상생활을 편리하고 신속하게 만들 것이며, 피지컬 AI 기술은 휴머노이드 로봇에 적용되어 대중화를 이끌고 갈 것이다. 미·중 간 AI 기술 격차가 줄어들고 있다. 오픈AI,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 글로벌 IT 기업들이 AI 기술 혁신을 주도하고 있으나, 중국 스타트업의 도전도 만만치 않다.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인 손정의는 “10억개 AI 에이전트 기술을 구축하겠다”고 장담하였다. 구글, 메타, 시스코, 오픈AI, 아마존 등은 AI 에이전트 산업을 선점하기 위해 새로운 서비스를 경쟁적으로 출시하고 있다. 구글 CEO 순다 피차이는 “10년 내 양자컴퓨터 기술이 상용화될 것이며 AI 기술은 디지털 초지능 AI 기술로 진화할 것이다”라고 예측한다. 이는 AI 기술의 획기적인 진화로 모든 산업에서 파괴적 혁신이 일어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중국에서도 AI 기술이 빠르게 발전되고 있다. 올해 초 중국 스타트업 딥시크가 오픈AI 보다 가성비 좋은 AI 챗봇 기술을 개발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알리바바, 텐센트 등 중국 IT 대기업들이 AI 에이전트 시장에 뛰어들었으며, 모니카 등 중국의 대표적인 AI 스타트업도 새로운 기술을 선보여 주목받고 있다. 텐센트는 SNS ‘위챗’을 기반으로 하여 수천개가 넘는 AI 에이전트를 개발하였다. 미국 AI 기술력이 중국을 앞서고는 있으나, 중국은 AI 에이전트 기술을 다양한 산업현장에 접목하고 있다. 중국이 AI 후발주자이나, 거대 내수시장에 상용화와 대중화로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점이 중국의 경쟁력을 높인다. 향후 미·중 간에 AI 에이전트 기술의 주도권 확보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우리 기업들도 AI 에이전트 기술 경쟁에 뛰어들어 앞으로 다가올 초지능 AI시대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올해도 변치 않고 찾아온 가을이 이제는 점차 그 끝을 향해 가고 있다. 가을이 오면 여름의 무더위가 사라지고 맑고 시원한 날씨가 이어진다. 하늘도 더 파랗고 투명해 지면서 청량감을 가져준다. 또 가을은 결실과 수확의 계절이다. 아울러 상념과 그리움, 우수와 고독, 사색과 동경, 그리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계절이기도 하다. 이처럼 가을은 다양한 형태와 의미, 색조를 가진 계절이다. 가을은 풍성하고 찬란한 계절이다. 계절의 황금기라고들 한다. 내가 사는 용인에서도 벌판에 나가면 잘 익은 누런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고 군데군데 참새 떼들을 쫓기 위한 허수아비들이 장승처럼 서 있다. 이제는 논두렁길을 가다가 메뚜기 떼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몹시 아쉽다. 시골집 담장에는 빨갛게 익어가는 홍시와 누런 호박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텃밭에서 포도송이가 알알이 영글어가는 풍경도 보인다. 가을은 걷기 좋은 계절이다. 여기저기 가로변과 탄천에는 갸느린 자태의 코스모스가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다. 하양과 연분홍, 짙은 자주색의 꽃잎들이 서로 어울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코스모스 길은 영원한 마음의 고향길이다. 이 아름다운 가을날, 코스모스 길을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해도 좋고 아니면 홀로 고독에 잠겨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또 그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달려보아도 기분이 상쾌해질 것이다. 이에 비해 노란 은행나무 길은 좀 더 세련된 도회지 풍의 멋이 난다. 이 길은 깃을 세운 트렌치코트를 입은 채 걷는다면 왠지 분위기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창경궁과 덕수궁 돌담길 그리고 과천청사 가로변들이 그런 길이다. 학창 시절 이 코스모스나 은행잎을 책갈피에 꽂아 말리던 기억도 새롭다. 빛바랜 그 드라이플라워를 대할 때마다 지나간 시절의 추억들이 가슴에 새록새록 떠오른다. 가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가을 풍경 속으로 사라지고 싶은 그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꿈틀거린다. 어느 늦은 가을날, 억새로 뒤덮인 진부령고개를 찾았다. 왠지 모를 감상적인 분위기에 취하여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자그마한 산장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다른 투숙객은 아무도 없었고 나 혼자뿐이다. 갑자기 이 세상에 나 자신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들기도 했다. 가을은 상념과 그리움의 계절이다. 또 누군가에게 편지를 부치고 싶은 계절이다. 귀뚜라미 울음 애절한 이 가을밤, 문득 당신 생각이 납니다. 당신과 함께 즐겨듣던 음악을 들으면서, 당신이 즐겨 낭송하던 시를 가만히 읊어 봅니다. “세월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수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그러나 무엇보다 가을은 낙엽의 계절일 것이다. 품위 있는 자태와 그윽한 향기를 뽐내는 국화꽃이 가을을 풍성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역시 가을다운 서정적 정취를 한껏 느끼게 하는 것은 낙엽이다. 가을이 되면 불타오르는 듯한 단풍이 우리의 가슴에도 불꽃을 지핀다. 그러나 단풍도 잠깐, 이내 우수수 낙엽이 되어버린다. 이 병든 갈색의 낙엽이 거리를 뒤덮을 때면 마음이 왠지 고독하고 숙연해진다. 그리고 무엇인가 그리워진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지난날의 추억이든... “지난 시절, 우리는 낙엽 지는 모습을 보고 가슴 아파했고, 낙엽 지는 소리에 애간장을 태웠으며, 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맞으며 낙엽 지는 거리를 걸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수북이 쌓인 낙엽 더미에 파묻혀 그 속을 뒹굴어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옛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낙엽을 태우며 지난 추억도 지우렵니다...” 이 풍성하고 아름다운 계절 가을은 머무르는 기간이 너무 짧다. 이렇게 보내기가 서운하고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도 자연의 가을은 또 다른 가을이 찾아오기에 그 짧음이 더 매력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의 가을은 한번 지나면 그만이다. 그래서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이 시기가 처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깊어 가는 이 가을날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무엇을 하면서 지내시는지요?
재생에너지 100% 전환을 목표로 하는 글로벌 캠페인이 ‘RE100’(Renewable Electricity 100%)이다. 오는 2050년까지 기업의 사용전력량의 100%를 재생에너지인 풍력, 태양광 등으로 조달하겠다는 기업들의 자발적 캠페인이다. 2014년 파리협정의 성공을 이끌어 내기 위한 지지 캠페인으로 시작됐다. 2030년 60%, 2040년 90% 이상의 실적 달성을 권고하고 있다. CDP(Carbon Disclosure Project,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위원회는 연례보고서를 통해 이행실적을 공개한다. 이에 경기도는 ‘경기 RE100’을 선제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탄소 규제 강화에 대응, 공공부문 재생에너지 100% 전환이 목표다. 공공 분야의 대표적인 사업은 의정부시 북부청사 등 유휴부지를 활용한 공공 RE100 1호 태양광 발전소다. 민간에서는 ‘산단 RE100’이 본격 추진되고 있다. SK E&S 등 8개 민간 컨소시엄과 4조 원 규모의 투자 협약을 체결했다. 뿐만 아니라 29개 시군에서 1만 3000여 명이 참여한 에너지 협동조합이 운영되고 있다. 주택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했는데 여기서 생산되는 재생에너지는 17MW(메가와트)에 달한다. 지난 17일엔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한국에너지공단이 주관하는 재생에너지 산업발전 분야 최고 권위의 상인 ‘한국에너지대상’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에너지공단은 경기도가 경기 RE100 정책을 통해 수도권의 구조적 제약 속에서도 재생에너지 전환을 적극 추진했다고 평가했다. 이를 통해 최근 3년 동안 원전 1기 규모의 태양광을 신규 보급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도시가스 미공급 지역을 중심으로 350개 ‘RE100 마을’을 조성, 주민들이 매달 전기요금 7만원 절감, 햇빛소득 15만 원 이상 창출이라는 실질적 혜택을 얻었다고 한다. 이번 수상은 도의 노력이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데 의의가 있다. 도는 지난 9월에도 ㈔에너지전환포럼이 주최한 ‘2025 에너지전환의 밤’에서 지방자치부문 에너지전환상을 수상했다. 지난 4월에는 싱가포르에서 열린 ‘Renewable Market Asia 2025’에서 아시아 지역 청정에너지 도입 선도기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명실상부한 RE100 선도 지방정부가 된 것이다. 도 관계자는 “앞으로도 국공유지와 마을, 산업단지 등을 중심으로 공급을 늘려 도민과 기업에 실질적 혜택이 돌아가는 지속가능한 에너지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정부와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한다. 경기도는 전국 에너지 소비의 25%를 차지하지만,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율은 아직 7%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경기도의회 건설교통위원회 이홍근(더불어민주당·화성1) 의원은 지난 7일 국회의사당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국회토론회에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경기도 주차장 태양광발전소 설치·운영 지원조례’ 제정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김동연 경기도지사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21일 전재수 해양수산부 장관과 면담을 갖고 재생에너지 공급 확대 방안을 공식 건의했다. 해수부는 항만·해양 인허가를 총괄하는 부처다. 해당 부지를 활용하려면 공유수면 사용 등 주요 인허가권을 갖고 있다. 평택항 항만 준설공사로 생기는 유휴수면 약 727만㎡(220만 평)에 수상태양광 발전시설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해양수산부에 공식 건의했다. 평택항 항만 준설공사로 발생하는 흙을 투기하는 용도로 쓰게 될 유휴수면 약 727만㎡(220만 평)에 태양광 발전시설을 설치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내용이다. 이곳에 태양광 발전시설을 설치하면 500MW를 생산할 수 있는 신재생에너지 단지가 탄생하게 된다. 이는 국내 최대 규모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지면 수도권 재생에너지 확보 문제 해소에 큰 도움이 된다. 이에 전재수 해양수산부 장관도 전적으로 동의했다고 한다. 도는 평택항 유휴부지 개발이 실현되면 국내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함께 수도권 재생에너지 공급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해수부의 적극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지난주에 일상에 지친 아내의 간절한 요청으로 괌을 여행했다. 그곳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며 마주한 황홀한 석양을 보고, 어느새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보랏빛 어둠이 짙어질 때까지 사진만 찍고 있는 내 모습을 마주하며, 문득 나는 “지금 이 순간을 느끼고 있는 걸까, 아니면 기록하기 위해 소비하고 있는 걸까?” 생각했다. 온전히 나를 위한 힐링의 시간을 사진에 연연하여 절묘한 감동을 놓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살아가는 일’보다 ‘기록하는 일’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쓰는 경향이 있다. 스마트폰은 늘 손에 있고 SNS는 우리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소환한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여행지에 도착해서도, 절친을 만나는 때조차도 우리는 먼저 카메라 앱을 켠다. 이른바 기록 강박이 조용히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물론 기록은 나쁘지 않다. 사진은 기억을 더 선명하게 살려주고, 잊혀가는 순간들을 다시 불러오는 힘이 있다. 문제는 그것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는 순간이다. 즐기기 위해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남기기 위해 순간을 연출할 때, 우리의 삶의 방향은 아주 오묘하게 전도된다. 살아가는 주체가 아닌, 카메라 앞에서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피사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석양이 진 뒤 비로소 내 눈과 마음에 한가득 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자신에게 “순간을 오롯이 만끽하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남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를 물었다. 이 질문만으로도 많은 것을 정리할 수 있었다. 기록강박이 강해질수록 사진은 증명서로 쌓여만 간다. 내가 이만큼 잘 지내고, 재미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증명. 그러나 진짜 나다운 삶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연출이 아니라, 내가 나로서 편안하게 머무는 시간 속에서 피어난다. 그 시간은 반드시 기록될 필요는 없다. 그래서 때로는 의도적으로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하다. 산책할 때는 폰을 주머니 깊숙이 넣고, 카페에서는 눈앞의 풍경을 사진이 아닌 ‘나의 감각’으로 음미해 보는 것이다. 그 순간의 냄새, 빛, 온도, 의식의 흐름까지 온전히 느끼다 보면, 기록되지 않아 더 소중한 시간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인간은 결국 기록이 아니라 경험을 먹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날은 마음껏 사진을 찍어도 좋다. 사진은 또 다른 언어이자 표현방식이며 기억을 떠받치는 도구다. 중요한 것은 촬영이 나를 방해하지 않고, 시선을 확장시키는 도구가 된다. ‘잘 찍어야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지금 내 마음에 닿는 장면을 자연스레 담으면 된다. 그러면 사진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시물이 아니라, 나를 위한 작은 기억의 서랍이 된다. 정말 나다운 삶은 경험과 기록의 균형에서 이루어진다. 어떤 순간은 찍고, 어떤 순간은 그냥 바라보고 즐긴다. 이 단순한 선택을 스스로 조절하는 능력—기록에 연연하지 않고, 순간을 온전히 선택할 수 있는 여유—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지혜다. 우리는 모두 기록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기억의 주인은 언제나 ‘나’다. 카메라가 아니라 내가 직접 경험하고 느낀 순간들이 모여 결국 나를 만든다. 그러니 오늘 하루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지금이 찍을 때인가, 아님 느끼고 살아볼 것인가?” 이 질문을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기록 강박에서 벗어나 나답게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다.
(기고문) 11월 ‘불조심 강조의 달’이 어느덧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한 달 동안 각 지역 소방서에서는 화재 예방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홍보와 캠페인을 펼쳐 왔으며, 시민 여러분도 여러 활동에 관심을 가져주셨다. 그러나 소방은 강조하고 싶다. 화재 예방은 11월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겨울철 전체를 관통해 지속돼야 하는 ‘생활의 기본’이라는 사실을. 본격적인 겨울철로 접어드는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는 난방기구 사용량이 급증하고 기온이 급격히 낮아지면서 화재 위험이 가장 높아지는 시기다. 실제로 매년 통계에서도 겨울철 화재는 11월보다 12월 이후에 더욱 많이 발생하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전기난로·전기장판·히터·보일러 등 전열기구 사용이 늘면서 과열·과부하로 인한 화재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최근 발생한 여러 화재를 살펴보면, 평소 거창한 부주의가 아닌 작고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콘센트에 여러 기기를 동시에 꽂아주거나, 난방기 주변의 가연물을 치우지 않은 채 사용하거나, 전기장판을 접어서 보관한 뒤 그대로 사용하는 등 사소한 습관이 큰 화재로 이어지곤 한다. 소방은 “전기·난방기구는 안전한 사용법을 숙지하고, 사용 전후 상태를 점검하는 것만으로도 상당수의 화재를 예방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에 더해 주택용소방시설의 역할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단독경보형감지기는 화재를 가장 먼저 감지해 신속한 대피를 가능하게 하며, 소화기는 초기 단계의 작은 불씨를 잡아 큰 피해를 막는 데 결정적이다. 실제로 최근에 김포 관내에서 공장 변압기 화재가 발생했는데 분말소화기를 활용해 초기 진압에 성공하여 인명피해 없이 초기 진화에 성공한 사례가 언론보도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감지기 등 미설치 가구가 많아 개선이 시급한 실정이다. 소방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불조심 강조의 달이 곧 끝나지만, 우리의 안전 점검은 이제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겨울은 화재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계절이기 때문에 가정과 직장에서 전기·난방기구 안전관리, 정기적인 전기 점검, 가연물 정리, 주택용 소방시설 설치 등을 꾸준히 실천해 주시기 바랍니다.”이어 “특히 가족 모두가 화재 발생 시 어떻게 대피할지 미리 정해두고, 비상구나 대피 통로를 확보하는 등 평소 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올겨울은 예년보다 더 추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추위가 강해질수록 난방기기 사용이 늘고, 실내 활동이 많아지며 화재 위험도 그만큼 증가한다. 화재는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지만, 예방은 작은 실천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불조심 강조의 달이 끝나더라도 우리 모두의 관심과 실천이 이어질 때, 안전한 겨울을 보낼 수 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지난 1년 동안 벌여온 사이버도박 범죄 특별단속에 무려 5000명이 넘는 범법자가 검거돼 우리 사회에 만연한 도박 풍토를 여실히 입증했다. 검거된 위법자 중에는 20·30이 절반 이상을 차지해 놀라움을 주고 있고, 특히 7000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도박행위로 적발된 사실은 더 충격이다. 국수본이 앞으로 1년간 특별단속을 연장하기로 한 것은 다행이다. 도박 풍토가 완전히 일소되도록 속도·범위, 깊이를 더욱 확대해 나가기를 기대한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0월까지 진행된 국수본의 사이버도박 특별단속에는 모두 3544건이 적발됐고 도박 사범 5195명이 검거됐다. 이 중 314명은 구속되면서 환수한 도박 수익금은 1235억 원에 이른다. 이 통계는 전년 동기와 비교해 검거 인원은 0.6%, 구속된 인원은 7.9% 증가한 수치다. 피의자의 연령대는 20대가 25.3%(1514명)으로 가장 많았고 30대 24.9%(1489명), 40대 22.8%(1366명)로 뒤를 이었다. 20·30대만 합쳐도 무려 50.2%에 달하는 수치다. 이어서 50대는 13.4%(800명), 10대 7.0%(417명), 60대 이상 1.7%(306명) 순이었다. 도박 유형별로 스포츠토토 등에는 주로 20·30대가 다수였고, 게임 기반의 카지노 유형은 20~40대가 고르게 분포한 것으로 분석됐다. 또 오프라인 경기로 유입된 불법 경마·경륜·경정은 40대 이상이 다수를 차지했다. 내용적으로 청소년들의 도박 폐해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나 걱정거리다. 경찰청은 지난 1년간 청소년 도박 행위자 7153명을 적발했다. 청소년 도박의 경우 상당수 입건 처리되지 않아 단속 통계에는 잡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범행 정도를 감안해 훈방이나 즉결심판, 청구·송치 등이 결정된다. 경미한 사안은 경찰서에 설치된 선도심사위원회에 회부 처리한다. 당사자나 학부모 동의를 받아 한국도박문제예방치유원 등 전문 상담기관에 연결해주기도 한다. 청소년 사이버도박 행위가 좀처럼 근절되지 않는 것은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사이버 접촉면이 넓다는 특성 때문이다. 경찰은 불법 도박 사이트 접근 차단을 위해 수사 단서 확보 후 방송미디어통신심의위원회에 게시글 등 삭제·차단 등의 요청도 병행 중이지만, 방대한 사이버 세상의 특성 때문에 예방이 효과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사이버도박 단속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해외에 사이트를 구축해 우리 아이들을 주 타깃으로 24시간 파상공세를 펼친다는 점이다. 올해 캄보디아·중국·필리핀·베트남 등 4개국 사무실 기반 5300억 원 규모의 도박사이트 운영자 등 97명이 검거되고, 필리핀 해외 서버 도박사이트 운영 조직 23명 등이 붙잡혔다. 하지만 이 같은 실적은 범죄 규모에 비하면 ‘창해일속(滄海一粟)’ 수준이다. 국익을 위해 범죄를 고의로 방치하는 일부 저개발 국가들이 골치다. 도박에 빠진 청소년들의 상황은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하다. 임지연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최근 발표한 ‘청소년의 사이버도박 경험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만 13∼19세 청소년 가운데 사이버도박을 직접 해 본 52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2.7%가 “도박 빚을 갚기 위해 인터넷 불법 대출, 고리 사채를 썼다”고 답했다. 불법도박(57.7%), 사기(36.2%), 절도(22.2%) 등 각종 불법 행위를 경험한 사례도 적지 않아 사이버도박의 가없는 폐해를 절감케 한다. 나라의 미래를 짊어진 아이들이 어둠의 세력이 벌이는 추악한 농간질에 덧없이 희생양이 되는 참상은 하루빨리 개선돼야 한다. 청소년들이 사행심에 찌들어 가는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을 것인가. 경찰 등 당국은 청소년을 노리는 불법 사이버도박 사이트에 대한 집중적인 단속과 예방 활동을 펼치는 한편, 중독 청소년들에 대한 충분한 상담과 치료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사이버도박은 국민건강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독버섯이다. 독버섯은 씨를 말리는 것 말고 다른 대책이 없다. 지금 단계에서 안 하면 영원히 못 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기를 바랄 따름이다.
돌이켜 보니 벌써 9년 전의 일이다. 4·19 혁명 56주년이 되던 2016년 4월 19일, 그 역사적인 날에 그야말로 역사적인 한 인물이 유명을 달리했다. 초당(草堂) 신봉승(辛奉承) 선생. 83세의 일기였다. 선생은 ‘국민 사극 작가’로 불린 극작가요, 시·소설·평론·시나리오에 두루 걸쳐 130여 권의 저술을 남긴 광폭(廣幅)의 문인이었다. 그중에 많은 사람이 오래 기억하는 작품은 8년간 지속한 TV 드라마 '조선왕조 5백 년'이었다. 그 가운데는 세조 조의 한명회나 구한말 흥선 대원군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평가를 비롯하여, 그야말로 볼거리가 즐비했고 화제도 만발했다.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 그 성격이 확정된 역사에 대한 관점의 ‘반란’은 작위적인 의지만으로 가능할 리 없다. 오랜 사료의 검토와 연구, 그리고 역사관에 대한 자기 확신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선생은 이 곤고한 역사 학습의 과정을 초인적인 인내와 근면으로 넘겼다. 그는 언필칭 ‘재야의 역사학자’였다. '조선왕조실록'이 국문으로 번역되기 전에 9년에 걸쳐 통독하고 그 500년 역사를 통시적으로 관통하는 눈을 길렀다. 여러 곳의 말과 글에서 확인되는 선생의 문학관은 자신의 역사관과 면밀히 결부되어 있다. 그는 역사라는 사실적 골격에 문학이라는 상상력의 치장을 덧입힌 것이 역사문학이라는 명쾌한 논리를 가졌다. 치장의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골격을 사실과 다르게 설정하면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그 논리로 그는 춘원 이광수와 월탄 박종화의 역사소설들, 역사적 사실성의 고증을 위반한 작품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동시에 오늘날의 TV 사극들이 얼마나 자주 그리고 심하게 이 사실과 상상력의 균형을 훼손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멀리하고 있는가를 탄식했다. 선생이 보는 당대의 현실 정치도 그와 같았다. 자격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정치 일선에 서 있기 때문에 나라의 모양이 그토록 무질서하다는 것이었는데, 그의 시각에 의하면 조선 시대에는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정암 조광조와 같은 선비 정치의 모범이 있었다는 말이다. 600년의 우리 근대사를 한눈에 꿰뚫는 식견이 없이는 내놓기가 쉽지 않은 말하기 방식이다. 바로 이 식견으로 선생은 2012년에 매우 기발하고 뜻있는 책 한 권을 냈다. 『세종,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다』라는 책이다. 조선조 500년에 명멸한 역사 인물 가운데서, 그 품성과 역량에 비추어 현재 한국 정부를 구성할 ‘드림팀’을 선발한 것이다. 이를테면 대통령에 세종대왕, 국무총리에 이원익, 기획재정부 장관에 이황, 법무부 장관에 최익현, 행정자치부 장관에 이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박지원, 지식경제부 장관에 정약용, 검찰총장에 조광조, 감사원장에 조식과 같은 인재의 선발이다. 우리 근대사의 흐름과 그 경로를 따라 부침(浮沈)한 인물들에 대한 확고한 평가, 또 그에 따른 논증에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글쓰기다. 오늘의 한국 정치인들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다. 그런데 기실 선생의 수발(秀拔)한 이력과 업적보다 필자를 더 감동하게 한 대목은 늘 따라 배워야 할 그 사람됨이었고, 임종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던 삶의 길에 대한 신념이었다. 80세가 넘도록 10여 년을 일관한 저술과 강연도 놀라웠다. 해마다 몇 권의 책을 상재하고 150회 이상의 강연을 소화했으니 가위 철인의 면모가 없지 않았다. 더 나아가 선생은 내면의 질적 수준, 곧 철인(哲人)의 풍모를 지닌 지성인이었다. 늘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다짐했고, 후진들에게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이름 석 자에 때 묻히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마음껏 높은 정신적 지경을 거닐고 또 아낌없이 자신의 예술과 학문의 재능을 현실 속에서 구현하던 생애의 줄을 놓고, 선생은 영면에 들었다. 우리 역사의 행간을 탁월하게 읽어내던 그 눈길을 선물처럼 남겨두고 스스로 역사의 행간 속으로 떠났다. 선생을 잃은 것이 특히 슬펐던 이유는 그 창대한 경험과 지식 그리고 창의적 사유의 자산을 함께 잃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선생을 추억하며 그리워할 때마다, 마침내 후대의 역사가 될 오늘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진중한 마음으로 되돌아볼 수밖에 없다.